75화
“뜬금없이 무슨 짓이에요? 지금 중요한 때인 거 몰라요?”
최대한 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지금 싸우는 꼴을 보일 순 없었으니까.
“중요한 타이밍이니까 끼어든 거야.”
아르파드는 목구멍 안쪽이 울리게 웃으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내 아내 눈에서 눈물 흐르는 걸 절대 못 지나치는 미친 애처가거든.”
그러니까 이건 ‘그런 설정’이라는 말이다.
나는 소리를 낮추어 핀잔을 주었다.
“대체 나중에 그걸 빌미로 얼마나 날뛰려는 거예요?”
그러자 아르파드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게 무슨 말이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당연한 얘기 아닌가?
“간자라고 생각되는 시종을 죽이거나 내쫓은 다음, 아내에게 달라붙는 게 싫어서 그랬다고 우긴다거나?”
“…….”
“아니면, 적대 세력의 귀족 영식을 처벌할 때 나에게 접근했다고 핑계를 댄다거나?”
이젠 아르파드의 매끈한 미간에 주름이 졌다.
매번 아르파드가 얼굴을 찡그릴 때는 미간에 세 개의 주름이 같은 위치에 졌다.
나도 모르게 기억과 똑같은 자리에 남은 주름을 톡 건드리며 중얼거렸다.
“자꾸 그러다간 잘생긴 얼굴에 주름 생겨요. 펴야죠.”
내 손톱 끝이 도자기 같은 피부를 건드리자, 주름이 깨끗이 펴졌다.
그리고 아르파드의 붉은 눈이 구슬처럼 동그래졌다.
그는 눈빛으로 나를 뚫어 버릴 것처럼 빤히 바라보다가 투덜댔다.
“정말이지 의도하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다니까.”
“…뭐가요?”
“상처 주고 바로 약 발라 주면 안 아플 거라고 믿는 것 같아, 그대는.”
이건 또 무슨 누명이야?
내가 뭘 어쨌다고?
나는 황당하고 억울했다.
아니, 한창 피해자 연기…가 아니라 피해자인 걸 어필 중인 건 난데, 왜 자기가 상처 입은 것처럼 군단 말인가.
나는 아르파드를 뾰족한 눈빛으로 찌르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이 인간 뭐가 마음에 안 든다고 억지 부리는 거 아냐? 아니면 뭔가 또 시험한다거나…….’
표정이 다 읽혔는지, 아르파드는 부드럽게 웃었다.
저렇게 웃으면 절대 믿을 수 없었다.
“그거 아나? 그대는 의심과 생각이 너무 많아.”
“그게 왜요?”
“생각을 하도 많이 하다 보니 남의 행동과 말을 자꾸 이리저리 곡해하는 것 같단 말이지. 특히 내 말은.”
그의 목소리에 정말로, 너무 안 어울리는 감정이 섞여 있는 것 같은데… 착각인가?
억울함이나, 서러움 같은.
설마.
그럴 리가.
말도 안 돼!
‘그런 거면… 꼭 진짜 이 인간이 날 좋아하기라도…….’
그때 아르파드가 내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한 게 슬픈 나머지, 아내를 독점하겠다고 심술부리는 가련한 남편으로는 안 보이나?”
“…그럴 리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으니까, 굳이 안 비꼬아 줘도 된다고요.”
“…….”
그러자 아르파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작은 한숨이 귓가에 닿는다.
“내 아기 다람쥐는 이렇게 둔해서 어찌하면 좋을까.”
아기 다람쥐 한마디에 간질간질하고 아리송하던 감정의 소용돌이가 순식간에 지워졌다.
그 자리에는 수치심만 남았다.
“…그놈의 아기 다람쥐 좀 어떻게 할 수 없어요?!”
이건 진심 100%다.
아무리 황후나 에반젤린을 열 받게 하려고, 혹은 주변에 우리 금슬이 좋다고 과시하려는 목적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너무… 과했다.
“말하는 당신도 오글거릴 거 아니에요?”
그러자 아르파드는 살짝 놀라더니 고개를 저었다.
“안 그런데.”
“설마…….”
거짓말 잘도 하네.
“진짜야. 난 그냥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진심으로 아기 다람쥐니 하는 말이 나올 리가 없잖아요!”
“왜 없어?”
그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내 귓가에 대고 설명을 쭉 이어 갔다.
“이렇게 작고.”
아르파드는 내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주어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러자 발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히익!
“가벼운 데다가.”
이, 이건 그냥 당신이 크고, 힘이 센 것뿐인 것 같은데.
“늘 작은 입에 뭔가를 넣고 오물거리는 모습이 귀엽고.”
“…!”
조, 좀 위험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내 뒤통수를 잡은 채, 머리카락 안쪽을 슬슬 쓸어내리는 손가락의 감촉이 뜨거웠다.
“그리고 이 복슬복슬한 머리카락을 처음 봤을 때, 다람쥐 꼬리 같아서 만져 보고 싶다고 생각했거든.”
“보통 내 머리 보고 그런 생각 안 할… 텐데요?”
좀 무리수 아냐?
“나는 보통이 아니니까.”
“…….”
아, 네. 그렇긴 하죠. 어련하시겠어요.
* * *
두 사람이 소곤거리고 있는 걸 주변에서는 또 단둘만의 세계를 만든 신혼부부로 보고 있었다.
“정말 시도 때도 없이 뜨거우시네요.”
“황태자 전하의 독점욕이 대단하신데요?”
“한눈에 반해 약탈혼을 하실 정도니 오죽하겠어요.”
황당해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이런 광경에 익숙해 이제 해탈할 지경인 자들도 있었다.
바로 황태자궁 소속의 궁인들이었다.
이 상황이 익숙한 애니는 두 사람이 속닥거리는 사이 직접 나섰다.
황제와 대공비 앞에서 힐리아의 증언을 보완했다.
“부족한 제가 이 과분한 드레스를 입은 건, 제가 먼저 비 전하께 말씀을 올렸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그저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대공비가 눈매를 슬쩍 움직였다.
“비 전하께서 루스 후작 영애의 음모에 대항하신 것도, 본인의 의견은 아니시라는 건가?”
대공비는 애니의 의사를 읽고 적절한 맞장구를 쳐 주었다.
“예. 자비로운 비 전하께서는 루스 후작 영애와 필레른 부인의 음모를 묻어 두려 하셨습니다.”
거의 망연자실한 상태였던 에반젤린과 필레른 부인의 안색에서 핏기가 더 사라졌다.
이미 핏기가 거의 없는 상태라, 사실상 시체 같은 얼굴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애니의 의도가 뭔지 알 수 있었다.
힐리아의 자비심을 강조해서, 그들을 더더욱 쓰레기로 만들려는 거였다.
“하지만 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제게 이 드레스를 입혀 달라 청했습니다. 만일 저 두 사람이 비 전하를 음해하려던 걸 포기했다면, 아무 일 없으리라고요.”
“하지만 이렇게 되었고 말이지.”
“…예. 의연하게 계시지만, 사실은 얼마나 상처받으셨을지…….”
애니는 마른 눈가를 콕콕 찍어 내는 척했다.
힐리아와 사전에 상의한 작전이었다.
덕분에 주변을 둘러싼 귀족들 사이에 힐리아에 대한 동정 여론이 더욱 강해졌다.
“마지막까지 믿고 싶으셨는데, 결국 배신당하신 거네요.”
“묻어 주시려고 했는데 기어코 거짓말해서 누명을 씌우려고 한 거네요? 너무해.”
“어쩜. 너무 비교되지 않아요?”
그와 비례해서 에반젤린과 필레른 부인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점점 더 강해졌다.
특히나 겁을 먹은 필레른 부인이 에반젤린을 버리고 무릎 꿇고 빌기 시작했을 때, 상황은 절정에 달했다.
에반젤린에 대한 고발이 함께였기 때문이다.
“용서해 주세요. 비 전하! 저는 그저 에반젤린 양이 시킨 대로 한 죄밖에 없어요! 저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고요!”
당연히 주변 반응은 좋지 못했다.
“뻔뻔해라.”
“낯짝도 두껍지.”
에반젤린은 흙빛이 된 얼굴로도 주변 분위기를 기민하게 살폈다.
필레른 부인에 대한 여론이 더 악화되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
이 상황에선 차라리 침묵하는 게 나았다.
필레른 부인이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서 다가오자 아르파드는 유유히 피했다.
“벌레가 감히 다가오려 하다니.”
힐리아의 위치에서는 아래쪽이 전혀 안 보였다.
그래서 오해하고 말했다.
“벌레? 벌레가 나왔다고요? 말도 안 돼. 내가 이 홀 관리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데! 어디, 어디 나왔어요?”
아르파드는 피식 웃으며 힐리아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 내가 너무 추한 인간을 벌레로 착각했을 뿐이니까.”
“아. 진짜 나왔다는 건 줄 알고 놀랐잖아요.”
힐리아는 안심하고 편히 웃었다.
사람을 벌레 취급한 것에 대해서는 전혀 뭐라고 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바닥을 기는 벌레 취급을 당한 필레른 부인은 지독한 수치심을 느꼈지만, 누구도 관심이 없었다.
* * *
연회의 분위기는 압도적으로 한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사실상 루스 후작 영애의 중앙 사교계의 꽃 지위는 끝난 거나 다름없어.’
‘오늘 소문이 다 퍼지면, 누가 루스 후작 영애를 따르겠어?’
권력의 흐름에 민감한 이들은 하나같이 에반젤린을 무시했다.
그리고 힐리아에게 조금이라도 줄을 대려 애썼다.
‘게다가 그동안 황후를 따르지 않던 서부 사교계가 나타났지.’
‘그들이 황태자비를 따르고 있는 건 분명해.’
기존에 반쪽짜리 권위를 가지고 있던 황후와 새로이 떠올라 자리를 굳히려 하는 황태자비의 싸움이 된 거다.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특히나 지금 황후의 대리인 역할인 에반젤린의 평판과 이미지가 박살 난 것이 컸다.
에반젤린은 흙빛이 된 얼굴로 그야말로 벽의 꽃처럼 서 있을 뿐이고.
황태자비의 근처에 가는 것도 허락받지 못한 필레른 부인은 서럽게 울어 댔다.
“제 탓이 아니에요! 제가, 어헝! 아니라고요! 흐어엉! 전부 루스 영애가……!”
누구도 예상 못 한 상황이 벌어진 건 그때였다.
당혹감 가득한 목소리가 홀의 입구에서 울렸다.
“황후 폐하께서 드십니다!!”
경악한 이들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놀랍게도 빈틈없는 차림새의 이자벨 황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머리 위에는 황후의 대관식 때나 사용할 법한 티아라가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