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그때, 에반젤린이 조금 섬뜩한 어조로 물었다.
“그런 걸, 왜 가지고 있어…요?”
에반젤린에 대해 꽤 겪어 봤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 에반젤린은 이렇게 물으려다 겨우 이성을 잡은 것이다.
‘너 따위가 그렇게 대단한 걸 어떻게 가지고 있는 거야?’
에반젤린의 눈동자가 마치 불타는 석탄처럼 이글거린다.
그 안에서 타오르는 감정은 분명한 질투와 악의.
에반젤린의 고개가 마치 낡은 태엽 인형처럼 움직인다.
오늘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좀 놀랐을지도 모르겠다.
지난 세 번의 회귀 어디에서도 저런 모습은 한 번도 본 적 없었으니까.
‘아니, 비슷한 광기 어린 감정은 보인 적 있나.’
바로 이전의 생, 죽기 직전에 들은 말이 떠올랐다.
“아하하! 이제 내가 진짜 여주인공이야.”
그때와 대척점에 있는 듯하지만, 겉껍질이 모두 벗겨지고 격렬한 감정이 드러난 것은 같았다.
지금 에반젤린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왜 네가 주인공인 척해? 그건 내 자린데.’
그 순간, 에반젤린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어째서?”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두려움이나 섬뜩함 때문이 아니었다. 희열이 치솟았다.
‘에반젤린을 낭떠러지에 몰아붙였어.’
나는 더더욱 태연하게, 그리고 여유 넘치도록 보이려 노력했다.
“제가 이걸 가지고 있는 게 왜요? 어쩐지 취조라도 하려는 것처럼 들리네요.”
그러자 에반젤린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마치 가면이라도 바꿔 쓴 듯.
“그건… 너무 놀라고 무서워서요.”
에반젤린은 고개를 푹 숙였다.
어깨가 바들바들 가련하게 떨렸다.
아마 사정을 모르고 지금 에반젤린의 행동과 말투만 보면, 가장 서러운 일을 당한 피해자로 오해하기 딱 좋을 거다.
에반젤린은 여전히 신기한 재주를 선보였다.
울먹거리면서도 발음이 아주 또렷하게 잘 들리게 하는 것 말이다.
“어흑! 이건 처음부터 함정을 파 두고 희생양이 걸어 들어오길 기다리신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무엇이 그렇게 억울한지 모르겠지만, 지켜보자니 헛웃음이 나왔다.
“드레스를 시녀에게 입힌 것도, 저 마도구를 미리 준비해서 녹음까지 해 둔 것도……!”
에반젤린은 젖은 눈을 들어 올리더니, 나를 똑바로 보고 외쳤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거라 예상하고 음모를 꾸민 거죠?”
나는 피식 웃었다.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주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러지 않을까 예상했어요. 그리고 대비를 했죠.”
에반젤린은 조금 당혹스러워했다. 당연히 내가 부정하고 변명하는 구도를 예상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를 기회라 생각한 건지 바로 치고 들어온다.
“역시! 자백하는 거군요! 처음부터 날 음해하려고 했다고!”
나는 태연함은 유지한 채로, 거기에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슬픔을 섞어서 대꾸했다.
“준비하면서도, 사실 나는 이 모든 걸 쓸 일이 없길 바랐어요.”
“…아!”
그제야 에반젤린은 제 실수를 깨달은 듯했다.
그녀가 뭐라고 더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하지만 당신은 그 드레스를 입고 아르타누스 홀의 연회장을 찾아왔죠. 나를 비웃으러.”
“그, 그게 아니……!”
나는 연이어 필레른 부인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덤덤함과 슬픔, 씁쓸함이 섞인 태도로.
“필레른 부인, 당신은 저 드레스를 내게 추천했으면서, 내가 루스 후작 영애를 모욕 주려 했다고 증언했죠.”
“아니에요! 저는! 저는 그냥 에반젤린 양이 시킨 대로……!”
“닥치지 못해!”
드디어 분열까지 일어나는 모양이다.
팝콘을 씹고 싶은 기분이었다. 빈정거려서 불쏘시개를 던지고 싶은데 지금은 참기로 했다.
내가 에반젤린에게 아주 잘 배운 것 중 하나를 실천 중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피해자인 척하기.
나는 두 사람의 추태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친구로 지낸 적이 있으니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길 바랐는데… 그렇게 생각한 건 나뿐이었군요.”
홀 안이 숙연함으로 가득 찼다.
* * *
이번 연회에서 내 목적은 간단했다.
‘얕보여서는 안 돼. 내 힘과 능력을 최대한 보여 줘야 해.’
지금까지 나에 대한 이미지는 이러했다.
‘멍청한 힐리아. 바보 같은 힐리아.’
‘델핀 가문에 딸린 부속품.’
‘제 약혼자의 내연녀를 친구로 두는 둔한 여자.’
그리고 약탈혼 이후에도 나는 나 자체로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르파드의 전리품.’
‘루드비히가 빼앗긴 여자.’
‘황태자가 자신의 지위를 굳히기 위한 수단.’
처음에는 루드비히와 에반젤린의 꼭두각시.
다음은 아르파드의 전리품이자 도구.
하지만 그 어느 쪽도 아니라는 걸 모두에게 각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나는 그저 나일 뿐이라는 걸.’
누구에게도 조종당하거나 이용당하는 게 아니라고.
세상에 당당하고 크게 외치고 싶었다.
지난 세 번의 회귀 동안 너무나도 간절히 바란 것이었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했다.
지금 상황 자체가 내가 간절히 바라던 목표의 실현이었다.
누구도 감히 나를 두고 누군가의 도구로 보지 못할 거다.
‘오히려 두려워하겠지.’
앞으로 황태자비로서 사교계에 군림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었다.
그 증거로 서부 귀족들만이 아니라, 중앙 출신 귀족들까지 나를 조금 두려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나와 척을 지면 지금 에반젤린이나 필레른 부인 꼴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딱 내가 바란 대로였다.
권위와 위엄, 두려움. 경외심.
이제 그런 눈으로 날 볼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이것만 챙기는 건 좀 아쉽잖아?’
에반젤린이 잘하던 일이 있었다.
‘주변 모두를 다 가해자로 만들면서 혼자만 피해자인 척했지.’
그리고 주로 가해자로 몰려 비난받는 건 내 역할이었다.
“어떻게 우리 에반젤린 양에게 그렇게 모질게 대할 수 있죠? 너무해요!”
“아니에요. 전부 제가 잘못… 흑, 어흑! 잘못해서 그런 거예요. 힐리아는 잘못 없어요.”
“에반젤린 양은 너무 착해서 걱정이에요. 꼭 옆에서 이용하려는 못된 인간들이 있다니까요.”
겉으로 에반젤린은 늘 무고하고 순수한 피해자로 남았다.
가해자들을 응징하는 것은 에반젤린이 말하지 않아도, 숭배자들이 알아서 했다.
아마 내가 이대로 능력과 경고만 보여 주고 물러난다면, 에반젤린은 특기를 살리려 들었을 거다.
‘내 냉혹함을 아닌 척 비난하면서 동정심을 사려고 했겠지.’
단단하고 강하게 나가던 내가, 미약한 슬픔과 씁쓸함을 내보이며 슬쩍 물러난 건 그 때문이었다.
당당하고 위엄 있었던 만큼…….
지금 살짝 내보인 상처는 더 커 보일 테니까.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 사람은 그걸 통해 누군가를 더 친근하게 느끼고, 편이 되어 주었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조금 전까지 경외감과 두려운 눈으로 나를 보던 귀족들이 이번에는 동정심 가득한 눈빛을 하기 시작했다.
잘 먹힌 모양이다. 다행이야.
나에 대한 동정적이고 긍정적인 여론이 조금씩 일기 시작했다.
“맞아요. 아까 비 전하께서 필레른 부인에게도 마지막 기회를 주셨잖아요.”
“그래도 친구라고 믿고 싶으셨던 거예요.”
“너무 자비로우세요.”
내가 뿌려 둔 밑밥을 눈치껏 알아서 회수해 주고 있었다.
“가여우셔라…….”
“그동안 얼마나 힘드셨겠어요. 사실상 사교계 모두와 싸우고 계셨는데.”
서부 귀부인 하나가 이렇게 말하자, 중앙 귀족들이 화들짝 놀랐다.
“우리와 싸우시다니! 말도 안 돼요!”
“맞아요. 그 말만 들으면 우리가 꼭 루스 영애와 필레른 부인을 따라서 황태자비 전하를 따돌린 것 같잖아요.”
‘…그러긴 했잖아.’
하지만 박쥐 같은 중앙 귀족들은 한사코 그런 적 없다며 항변했다.
그들 중 일부는 나에게 다가와 어떻게든 친한 척하고, 변명하려 들었다.
“저 비 전하. 저희 마음은 절대 그렇지가 않았답니다!”
“맞아요!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예상했지만, 새삼스레 역겨운 모습이었다.
나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났는데, 뒤통수에 뭔가 푹신한 게 닿았다.
뭐야?
고개를 들자, 아르파드의 붉은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
아르파드가 눈매를 사르륵 접어 웃더니, 기다란 팔을 휙 하고 휘둘렀다.
아르파드의 크고 우아한 움직임을 따라, 붉은 망토가 그림처럼 휘날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를 깊이 끌어안은 아르파드의 입술이 내 눈가를 눌렀다.
촉촉하고 뜨거운 혀가 살갗에 닿는 감촉에 온몸의 솜털이 일어서는 듯했다.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중앙 및 서부 귀족들, 그리고 황제와 에반젤린도 있었으니까.
그들 모두가 이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경악해서 굳어 버렸다.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는 건, 유일하게 놀라지 않은 한 명뿐이었다.
바로, 아르파드.
낮게 깔린 목소리가 내 귓불을 톡톡 건드렸다.
거칠면서 다정한 목소리였다.
“울지 마. 힐리아.”
“울, 어요? …내가?”
어이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내가 직접 만져 봐도 이렇게 뽀송뽀송한… 응? 뭐야? 왜 이렇게 축축해?
아주 즐겁게 웃고 있는 아르파드의 붉은 눈동자와 코앞에서 시선이 마주쳤을 때.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인간이 핥아서 축축한 거잖아! 내가 운 게 아니라!’
하지만 아르파드는 한술 더 떴다.
“알다시피 난 독점욕이 많아. 처음 본 순간 반해서 약탈해 온 아내야. 그대의 미소도, 눈물도 모조리 나 혼자 독차지하고 싶군.”
그는 나를 보호하듯 끌어안은 채, 귀족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아니, 이건 숫제 선언이었다.
“그러니 나 외의 누군가 때문에 그대가 눈물을 보인다면, 내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겠군.”
나를 건드리려면 미친 황태자인 본인을 직접 상대해야 할 것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