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맥없이 내 앞에 무릎을 꿇는 듯하던 에반젤린이 당치도 않은 음모를 내세웠을 때.
나는 도저히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새어 나오는 즐거움을 참기 힘들었다.
‘그래. 이래야지!’
만인이 보는 앞에서 에반젤린이 먼저 덫에 들어와 줘야 했으니까.
‘그래야 더 큰 엿을 먹여 주지!’
나는 환호성을 내지르고 싶은 걸 참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꾸했다.
“금시초문이에요. 필레른 자작 부인이 뭔가를 착각한 모양이겠죠.”
잠시 굳어 있던 에반젤린은 더더욱 약이 오른 듯 필레른 부인을 재촉했다.
“어서 아는 대로 전부 말하세요!”
필레른 부인의 옆으로 다가가 귓가에 몇 마디를 속삭이는 게 딱 봐도 협박 중이다.
반면 나는 필레른 부인에게 어떤 협박이나 위협도 하지 않고 얌전히 기다렸다.
그녀의 입에서 나에 대한 조작된 고발이 흘러나오는 걸 말이다.
필레른 부인은 두려움으로 덜덜 떨면서 앵무새처럼 말을 반복했다.
“에, 에반젤린 양 말대로예요. 황태자비께서 제게 에반젤린 양의 드레스 디자인을 알아 오라고 명하셨고… 그걸 자신의 하녀에게 입히셨어요. 에반젤린 양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서요.”
시작할 때 떨리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흔들림이 사라졌다.
없는 확신이 생기기라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와 동시에 에반젤린이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어허엉! 너무하세요, 그래도 저는 친구라고 믿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 * *
필레른 자작 부인의 증언이 끝난 뒤 귀족들, 특히 아까 황후궁 연회에 참석했던 중앙 귀족들은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이번 일 자체는 그저 꼬투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트집 잡을 거리가 생겼을 때, 황제가 어떤 반응을 할지는 중요한 문제였다.
‘황제께서 황태자비의 편을 들지, 아니면 에반젤린의 편을 들지를 보고 우리 행동을 정해야 해.’
‘아직 에반젤린 뒤에는 황후가 있으니까.’
‘앞으로 사교계 권력이 어디로 갈지, 잘 보고 판단해야 해.’
이미 황후궁 퀴니벨 부인의 연회에서 이쪽으로 박쥐처럼 날아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어떤 줄을 타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그때였다. 황제의 입이 열렸다.
“확실히… 저 말이 사실이라면, 모범을 보이고 사교계를 이끌어야 할 황태자비로서 그다지 적절한 태도는 아니구나.”
이 문제는 힐리아가 황태자비로 인정을 받느냐 아니냐는 것과는 상관없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감정을 이유로 또래 영애에게 망신을 주려고 음모를 꾸몄다면.
그리고 그걸 외부에 들켰다면 이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황태자비의 인품이나 인성 이전에, 그녀의 능력과 위엄 문제가.
‘즉, 황태자비의 품위가 시작도 전에 손상되어, 제대로 사교계를 이끌 자격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어.’
에반젤린이 노리는 것도 그것이었다.
아까 용의 일식을 보았을 때 이미 황태자비 인정을 막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느꼈다.
그렇다면 최소한 힐리아가 그걸 완전히 가질 수 없도록 흠집이라도 내야 했다.
그걸 위해 이렇게 무리해서까지 나선 것이다.
권위가 굳어지기 전이어야 상처를 내기 쉬우니까.
그리고 황제는 늘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었다.
감정이나 자신과 가까운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사교계도 황후가 이끄는 게 원칙이기 때문에 행동을 막거나 제한하지 않았다.
지금 에반젤린의 행동은 황후의 허락하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황제 역시 이를 알 것이다.
그래서 황제의 입에서 자신을 역성드는 듯한 말이 나왔을 때 에반젤린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이번에도 황제는 황후의 사교계 지배에 간섭하지 않을 참인 거야.’
그러자 옆에서 악시온 대공비가 신랄하게 말했다.
“마치 피 냄새를 노리고 달려드는 상어 같구나.”
에반젤린은 사나운 눈으로 악시온 대공비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
‘험한 말을 하면 어쩔 거야! 내가 한 말은 증거와 증인이 분명하다고!’
그리고 드레스 건과 연관된 이들은 전부 에반젤린에게 매수되었다.
필레른 부인은 말할 것도 없었고, 엉터리 드레스를 만든 의상실의 디자이너와 직원들 역시.
그들의 입을 막거나 원하는 증언을 짜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금 필레른 부인이 그 증거인 것이다.
하지만 힐리아는 달랐다.
자신이 그런 짓을 한 적 없다고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이미 모든 증인은 내가 확보했다고!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그리고 마침내, 힐리아의 입이 열렸다.
“저는 그런 짓을 한 적 없습니다.”
어떤 증거가 있다거나 증인이 있다는 말은 없었다.
“필레른 부인이 왜 거짓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에반젤린은 기가 살아서 더욱 강하게 외쳤다.
“그게 아니면 왜 굳이 하녀 따위에게 저런 화려한 드레스를 입혀 온 거죠?”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힐리아에게 물었다.
“그건 확실히 특이하구나. 하녀가 입기에는 과한 옷임은 분명하니.”
에반젤린의 입꼬리가 찢어질 듯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힐리아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폐하, 조금 전에 루스 후작 영애에게도 말했지만 애니는 제 젖형제로, 얼마 전에 작위를 내려 수석 시녀로 명했습니다. 그러니 하녀는 아닙니다.”
황제가 이를 듣고 고민하는 듯하자 에반젤린은 서러워 죽겠다는 듯 외쳤다.
“하녀든 시녀든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어흐흑! 저에게 모욕을 주려고 그랬다는 게 중요하죠!”
그러자 힐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죠. 하녀인지 시녀인지는 중요하죠. 애니는 이제 분명히 귀족의 신분이고, 저는 그동안의 고마움을 담아 옷을 선물한 것뿐인걸요.”
힐리아는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에반젤린에게 엄청난 타격이 가는 말을 했다.
“그리고… 사실 루스 후작 영애는 제 시녀가 될 수 있는 신분이잖아요. 같은 처지의 두 사람이, 비슷한 옷을 입은 우연이 어째서 그렇게까지 큰 모욕일까요.”
“…!”
에반젤린은 순간적으로 이성이 하얗게 타 버리는 듯한 분노를 느꼈다.
드레스에 장식된 비단 레이스가 손아귀로 찢겨 나가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지금 힐리아는 에반젤린에게 이렇게 말했으니까.
‘너는 내 시녀에게 어울리는 신분이니까.’
그러자 아르파드가 옆에서 힐리아를 거들었다.
“하긴, 맞는 말이긴 하지. 그대는 나의 유일한 비(妃), 일개 후작 영애로서 그 시녀가 되는 건 영광이지.”
그러자 애니의 근처에 서 있던 솔레누 후작 영애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저 역시 같은 후작 영애의 신분으로서 황태자비 전하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어머. 고마워요.”
힐리아는 방긋방긋 웃으며 이세핀에게 감사하다가 이렇게 물었다.
“아직 신혼이라 내부 살림 정리가 덜 됐어요. 그래서 일손은 늘 부족하답니다. 혹시 내 시녀가 되어 주지 않겠어요?”
그러자 이세핀 솔레누는 감격했다.
“더없는 영광입니다. 비 전하.”
힐리아는 솔레누 노후작과 소후작 부부에게도 물었다.
“영애가 저를 도와주도록 솔레누 후작가에서도 허락해 주시겠어요?”
그러자 노후작은 물론이고 소후작 부부 역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영광입니다.”
“더없는 광영입니다.”
“부족한 여식을 거두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들은 이세핀이 디자이너 일을 하는 걸 반대했기 때문에, 이번에 힐리아의 시녀로 들어가게 되는 것에 기뻐했다.
드디어 이세핀이 쓸데없는 일에 관심을 끄고, 귀족 영애로서 합당한 일을 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이 때문에 힐리아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물론 그들은 힐리아가 이세핀이 디자이너 일을 하는 데에 제일 큰 후원자라는 건 까맣게 몰랐다.
그리고 지금 문제가 된 드레스 중 하나를 이세핀이 고쳤다는 것도.
지금 힐리아가 입은 아름다운 청보라색 드레스도 이세핀의 작품이라는 것 역시 말이다.
어쨌건 지금 솔레누 후작가 같은 전통 있는 명문가가 솔선해서 증명해 준 셈이다.
‘후작 영애가 황태자비의 시녀가 되는 건 도리어 영광이다.’
이 사실을.
게다가 애니는 이미 신분상 귀족이었고, 황태자비의 시녀였다.
겨우 잡은 트집이 빛이 바랬다.
에반젤린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젠장! 꼭 이걸 미리 알고 대비하고 있었던 것 같잖아!’
에반젤린은 순식간에 논리를 바꿨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죠. 저와 같은 옷을 입은 여자의 신분 문제가 아니라, 왜 같은 옷을 입게 되었는지가 문제니까요!”
그리고 마지막 발악을 시도했다.
“황태자비께서 부인을 통해 제 드레스 디자인을 빼돌린 게 문제라니까요!”
마침내 힐리아가 에반젤린과 필레른 부인의 앞으로 다가왔다.
“지겹도록 말했지만, 루스 후작 영애. 나는 그런 적 없어요. 내가 왜 굳이 당신이 입을 드레스 디자인을 빼돌리죠?”
하녀와 동급으로 낮춰 모욕을 주려 했다는 말은 이제 소용없었다.
방금 힐리아에게 논파당했으니까.
“제 입으로 말하기 민망하지만, 저는 지금까지 사교계의 패션을 선도하는 입장이었으니까요. 연회에 똑같은 드레스를 입은 사람이 있으면 타격받을 수밖에 없죠. 그걸 노린 게 아니신가요?”
에반젤린은 약 올리듯 물었다.
“그렇게까지 제가 두려우셨나요? 시작부터 견제하실 정도로?”
힐리아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아까도 말했지만, 루스 후작 영애는 자의식이 좀 과한 것 같아요.”
“필레른 부인이 직접 증언했잖아요. 비 전하께서 제 드레스를 베껴서…….”
그때였다.
힐리아가 휙 고개를 돌렸다.
에반젤린이 아니라, 필레른 부인을 향해.
그리고 물었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어요. 사실대로 말할 생각은 없나요?”
“그, 그건……!”
필레른 부인이 흔들리려 하자 에반젤린이 빠르게 끼어들었다.
“증인을 겁박하지 마세요, 전하!”
그러면서 필레른 부인의 팔을 강하게 잡아챘다.
소매 안쪽으로 살을 꼬집는 감촉에 필레른 부인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협박하고 있는 건 에반젤린이었다.
‘죽고 싶으면 얼마든지 해 봐.’
살의를 느끼며 필레른 부인은 덜덜 떨며 고개를 저었다.
“저, 저는 사실대로 말했어요.”
그러자 힐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네요. 정말 마지막 기회였는데.”
“협박이 통하지 않아 아쉬운 거겠죠!”
그때였다.
힐리아가 손뼉을 쳤다.
짝!
“들여오세요.”
그와 함께 홀 안쪽 휘장이 열리며, 거대한 트롤리에 올린 ‘무언가’를 시종들이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게 뭐지?’
다들 처음 보는 물건에 의아해하는 와중에, 필레른 부인만은 그것이 눈에 익다는 걸 깨달았다.
‘어, 그러고 보니 저건……?’
분명히 힐리아의 응접실에서 본 적 있는 특이한 장식품이었다.
그런데 저게 왜 지금 나온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