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필레른 부인이 벌벌 떨며 뭐라 변명하려 하던 찰나.
“저, 저는……!”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가 먼저 반응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냐?”
사실 황제도 휘장 뒤에서 대충 들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부러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
아무리 그간 사교계 내 다툼에 관여하지 않고 지냈다 하더라도, 그는 황제였다.
이런 부분에 대한 감각은 일생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그가 상황을 모르는 척하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에반젤린이 달려왔다.
거의 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으면서, 에반젤린이 눈물을 펑펑 흘리며 외쳤다.
“폐하! 제 억울함을 공명정대하게 판단해 주세요!”
“무엇이 억울하다는 게냐?”
에반젤린은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힐리아가 황태자비로 인정받건 말건, 황제를 더 오래 알아 온 건 나야!’
에반젤린은 꽤 황궁에 자주 드나들었고, 젊은 영애 중 황제와 제일 자주 만났다.
‘그리고 오히려 황후보다 내가 더 황제에게 귀여움을 받았어!’
어린 시절 에반젤린의 애교를 보며, 황제가 이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짐에게 딸이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때 그는 드물게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일을 에반젤린은 그동안 사방에 자랑하고 다녔다.
그 때문에 에반젤린과 친한 이들은 황제가 의붓딸을 꽤 귀여워한다고 여겼다.
사교계에서 에반젤린을 황족에 가깝게 떠받드는 분위기에는 이런 소문이 한몫했다.
그리고 에반젤린은 이 소문을 사실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도 오래 그렇다고 주장하다 보니 이제는 믿어 버리게 된 거다.
그녀는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저딴 멍청이보다 내 편을 더 들어주실 거야!’
에반젤린은 세상에서 가장 처연하게 조금 전의 고발을 반복했다.
“폐하, 어떤 분께서 제가 너무 마음에 안 드셨나 봐요. 황족도 아니면서 황제 폐하께 귀여움을 받고, 황태자 전하와도 가까이 자랐으니까요. 상황상 어쩔 수 없었던 일일 뿐인데.”
이 말에 황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떤 분이라니?”
에반젤린이 슬쩍 아르파드 옆에 선 힐리아를 바라보다 눈썹을 늘어뜨렸다.
“차마 제 입으로는 말을 못 하겠어요.”
그때였다.
에반젤린이 전혀 예상 못 한 지적이 황제의 입에서 나온 것은.
“네 눈앞에 있는 ‘황태자비’를 왜 직접 지목하지 못하겠다는 게냐? 아까는 잘 말하지 않았던가?”
“…폐하?”
에반젤린은 놀라서 눈을 들었다.
그제야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을 내려 보는 황제의 시선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는 걸.
황제는 늘 감정을 읽기 힘들게 표정과 행동, 어조의 변화가 드문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주 드물게 의도와 감정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네 고발은 알겠다. 억울할 수도 있겠지. 내 앞에서 밝혀 달라 하는 것도 그럴 수 있어.”
하얗게 질렸던 에반젤린의 안색이 조금 피가 돌았다.
약간 안심하려던 찰나, 황제는 그녀가 전혀 예상 못 한 문제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와 예의가 있기 마련이다.”
“순서와… 예의요?”
황제의 차가운 목소리가 에반젤린의 어깨를 짓눌렀다.
“네가 ‘어떤 분’이니 하는 말을 쓰는 것은 옳지 못하구나. 황태자비라 바로 칭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조금 전 황태자비를 인정한 짐의 얼굴에 먹칠하는 꼴이야.”
놀랍게도 황제와 아주 사이가 나쁜 악시온 대공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폐하. 호칭은 바로 해야지요. 제국과 대륙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작은 예의부터 모두 갖추어야죠.”
에반젤린은 속으로 욕설을 씹어 삼켰다.
‘대륙이니 질서니 하는 건 무슨 상관인데!’
대공비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에반젤린을 비웃었다.
“제가 보기로, 이 자리에 있는 이 중 단 한 명이 황태자비께 알맞은 예의를 표하지 않았습니다.”
“…!”
“고발이든,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든 먼저 해야 할 게 있지 않을까요?”
그와 동시에 대공비는 한쪽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뒤로 몇 발 물러났다.
그러자 아주 자연스럽게 에반젤린의 시야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에반젤린이 굳이 ‘어떤 분’이라고 돌려 말한 이.
힐리아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평온하고 해맑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에반젤린은 입술을 짓씹었다.
아무리 눈치 없는 이라도 깨달을 수밖에 없는 상황.
지금 황제와 대공비는 에반젤린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고발이든 뭐든 하고 싶으면, 그 전에 황태자비 앞에서 제대로 예의를 갖춰라.’
그리고 당연히 그 예의라는 건…….
‘나더러 저 계집에게 황태자비 전하라 부르고, 무릎을 꿇으라고?’
그건 상상도 못 한 굴욕이었다.
꿈에서도 겪고 싶지 않은 끔찍한 일이었다.
에반젤린은 도움을 청하려는 듯 주변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미 황제와 황태자, 악시온 대공비라는 거물이 힐리아의 곁에 서 있었다.
게다가 명분도 확실했다.
전과 달리 황제에게 인정받은 지금은 황태자비로 공경해야 마땅했다.
서부 귀족들은 당연히 힐리아 편을 들며 에반젤린 흉을 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말하는 게 아주 이상해. 왜 굳이 어떤 분이니 하는 말을 쓰는 거지?”
“그러게요. 꼭 황태자비 전하라고 부르기 싫은 것처럼.”
“그 소문을 듣긴 했어요. 루스 후작 영애가 모친이 황후라는 이유로 황족처럼 군다고요.”
“설마 자기가 진짜 황녀급이라고 생각해서 말하기 싫다는 걸까요?”
소곤거리는 척하고 있었으나, 아주 잘 들렸다.
그 자체가 저들의 목적일 터다.
그렇다고 해서 중앙 귀족들이 에반젤린의 편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그들은 에반젤린과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렸다.
그녀를 위해 감히 황제와 맞설 용기가 있는 이는 없었다.
‘지금까지는 잘도 아첨하던 주제에!’
모든 이가 그녀에게 요구하는 듯했다.
힐리아의 앞에 무릎을 꿇고, ‘황태자비 전하’ 라고 부르라고.
에반젤린은 입술을 짓씹었다.
‘그래. 두 발 앞서 나가기 위해서야. 어쩔 수 없어. 한 발 정도는… 물러설 수 있어야 해.’
그녀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래. 굴욕 정도는 잠시 참고, 드레스 문제를 제대로 공론화해서 새 황태자비의 인성과 예의에 문제를 제기하는 게 나아!’
아직 힐리아가 황태자비로서 완전히 자리를 잡기 전이었다.
그 전인 지금 흔들어 놔야 했다.
그걸 위해서라면 잠시간의 굴욕은 참을 수 있었다.
에반젤린은 쓴 내가 올라오는 걸 삼키며, 어쩔 수 없이 힐리아의 앞에서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루스의 딸이 황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 * *
나는 아주 오묘한 기분으로 에반젤린이 절하는 걸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날 ‘황태자비 전하’라 부르는 것도.
새삼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세 번의 회귀 동안, 에반젤린은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이거나 무릎을 꿇은 적 없었다.
‘황태자비 전하는 고사하고, 대공비 전하라고도 제대로 부른 적 없었어.’
루드비히가 황태자가 될 때쯤, 나는 매번 죄인이 된 상태이긴 했다. 그 때문에 황태자비 자리에는 제대로 오른 적이 없었다.
대공비 자리는 달랐다. 원치 않아도, 나는 늘 키엘른 대공비가 되어야 했으니.
하지만 에반젤린은 그때마다 ‘우리는 친구니까’ 하는 등의 말로 교묘하게 피했었다.
나에게 ‘전하’라는 말을 쓰는 걸.
지금까지 이런 상황을 상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면 거짓말일 거다.
하지만 생각처럼 감격스럽거나 아주 통쾌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그냥 이런 거였구나, 하는 느낌?’
생각보다 감흥이 없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런 내 표정을 에반젤린은 제대로 알아본 모양이었다.
고개를 숙였다가 들어 올리면서 시선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
에반젤린의 하얀 얼굴이 굴욕감으로 확 붉어졌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나는 마주 웃어 줄 뿐이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게 제일 열 받을 테니까.’
* * *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다.
거의 독을 삼키는 기분으로 에반젤린은 힐리아의 앞에서 무릎을 굽혔다.
고개를 숙였다 들어 올리며 눈이 마주친 순간.
힐리아의 앞에 무릎을 꿇은 지금 상황보다 더한 모욕감과 굴욕을 느꼈다.
차라리 통쾌해하거나 비웃고 있었다면 나았을 거다.
적의로 가득 차 있어도 좋았으리라.
하지만 어느 쪽도 아니었다.
별다른 감흥이 없다는 듯 열없는 눈으로 자신의 굴욕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마치… 나 따위에겐 그럴 가치도 없다는 것처럼!’
에반젤린은 그 어느 때보다 지독한 모욕감과 굴욕감이 온몸을 휩싸는 걸 느꼈다.
그녀는 옆에 무릎을 꿇고 벌벌 떠는 중인 필레른 부인의 손을 잡아당겨 일으켰다.
“폐하, 조금 전에 황태자비 전하께서 저를 노리고 어떤 음모를 꾸미셨는지 들었어요!”
에반젤린은 힐리아의 뒤에 선 애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선 저기 저 하녀가 입은 드레스가 증거예요! 일개 하녀 따위가 저렇게 호화로운 드레스를 입는 게 말이 되나요?”
그리고 필레른 부인을 거의 내던지듯 앞으로 밀었다.
“무엇보다, 부인이 내게 고백했어요! 내 드레스 디자인을 빼내 황태자비께 알렸다고요!”
에반젤린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증거와 증인이 이렇게 확실해! 그런데 네가 빠져나갈 수 있을 줄 알아?’
그때였다. 에반젤린은 조금 늦게 깨달았다.
전혀 감흥 없는 듯 희미하게 웃고 있던 힐리아의 눈빛이 더없이 생기 넘치게 반짝이기 시작한 걸.
불안감이 스멀스멀 치솟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