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연회 시작부터 황제가 휘장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니다.
힐리아는 아르타누스의 홀을 빌려 달라 황제에게 부탁했을 때 한 가지 부탁을 더했다.
“제가 폐하께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확실해지면, 그 연회에 왕림해 주십시오.”
“그걸 누가 정하지?”
“누구도 이견을 말하지 못할 정도로 확실한 증명이 있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힐리아는 더없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미소를, 황제는 알고 있었다.
죽은 아내가 떠오르는 미소였다.
“당신은 정말이지 겁이 많다니까.”
“록셀린, 나는…….”
“이렇게 겁 많은 남자를 내가 아니면 누가 거둬 주겠어.”
그 때문에 황제는 조건부로 허락의 말을 해 주었다.
“네 말대로 누구도 절대 부정하지 못할 증명을 보여 주면 가 주마.”
그리고 힐리아는 정말로 해냈다.
아르타누스 홀의 연회가 시작되고 한참 뒤.
황제는 본궁의 본인 침실에서 그 현상을 목격했던 것이다.
용의 일식을.
물론 황제는 진심으로 아르타누스가 힐리아를 축복했다는 말을 믿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황실이나 마탑에서도 예측하지 못한 현상을 힐리아는 정확히 알았다.
이를 이용해, 본인의 지위와 권위를 누구도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굳건하게 했다.
‘이만한 능력과 배포라면 황태자비로는 차고 넘친다.’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 아이라면 정말로 호언장담한 걸 지킬지도 모르겠구나.’
“폐하께서 사실 누구보다 아들을 구하고 싶으시다는 걸… 전 잘 알고 있어요.”
“제게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그러면 폐하의 귀한 아드님을 구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이겠어요.”
황제, 아니, 발터 이스트리드는 실로 오랜만에 희망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그 때문이었다.
휘장 너머로 힐리아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진심으로 미소 지은 것은.
“위대한 아르타누스의 대리인이자 지상의 군주, 이스트리드 제국의 유일한 주인을 뵙습니다.”
그와 함께 대기 중이던 시종장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앞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좌우로 열리며, 사람들로 바글거리고 있는 아르타누스 홀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의 대관식 이후 이 홀에 사람이 이토록 많은 건 처음이다.
처음 연회의 시작 때는 서부의 유력 귀족들이 주였다.
그 상태로 지금까지 왔다면, 황제가 힐리아에게 처음 내건 조건은 이루어졌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그걸로는 반쪽짜리 연회일 뿐이니.’
제대로 된 아르타누스 홀의 연회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홀 안은 서부 귀족만이 아니라, 중앙을 비롯한 제국 다수의 귀족이 모여 있었다.
누구도 이 연회가 반쪽짜리니, 모자라니 하는 말은 할 수 없으리라.
이건 지금 황후의 자리에 있는 여인도 해내지 못한 일이니까.
황제는 일사불란하게 머리를 조아리는 이들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지금 이 상황을 만들어 낸 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황제는 옥좌에서 몸을 일으켜 친히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아직 고개를 숙인 힐리아와 아르파드의 앞에서 직접 말을 건넸다.
“고개를 들도록 해라. 황태자. 그리고…….”
황제의 붉은 눈동자가 달과 별의 티아라를 착용한 이에게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황제의 입에서 그 호칭이 나왔다.
“…황태자비.”
이로써 누구도 힐리아가 황태자비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말은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에 대답하듯 힐리아는 아르파드의 에스코트를 받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약 한 달 전, 호언장담하며 짓고 있던 것과 똑같은 미소가 분홍빛 입술에 걸려 있었다.
힐리아는 쾌활하게 대답했다.
“친히 왕림하여 주시니 은혜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황제 폐하.”
황제는 피식 웃으며 그 옆에서 실로 오랜만에 진심으로 웃고 있는 아들을 보았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네가 아내 복이 있구나, 아르파드.”
아르파드의 미간이 꿈틀거렸지만, 여기서 대놓고 부정의 말을 하진 않았다.
“…그렇습니다. 부황.”
이 부자 사이의 공기가 어떤지 아는 이들은 경악할 부드러운 분위기였다.
물론 힐리아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녀는 아르파드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리고 눈빛으로 화를 냈다.
‘정말이지 이런 상황에서까지 이렇게 딱딱하게 굴 거예요?’
아르파드는 딴청을 피웠다.
‘이 인간이 정말!’
그때였다.
황제가 말을 걸어 힐리아는 아르파드의 옆구리를 더 찌르지 못했다.
“폐하라고 부르다니 좀 딱딱한 것 같구나.”
“예?”
그러자 황제는 푸근하게 웃으며 힐리아의 어깨를 톡톡 쳤다.
“지난번 만찬 때는 달리 부르지 않았느냐.”
이게 무슨 소리지?
잠시 당황했던 힐리아는 곧 깨달았다.
‘설마, 지난번에 황후를 열 받게 하겠다고 쓴 그거?’
좀 믿기 힘들었다.
그래서 어색하게 물었다.
“아바, 마마?”
그러자 황제의 표정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래. 듣기 좋구나.”
아르파드는 순간적으로 무너질 뻔한 표정을 다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를 눈치챈 이는 거의 없었다.
모두 경악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황제 폐하께서?!’
‘내 귀가 잘못된 거 아니지?’
‘말도 안 돼!’
그때였다. 적절한 때를 놓치지 않고 악시온 대공비가 끼어들었다.
“황태자 전하. 비 전하. 피로연은 곧 하례연입니다. 마땅히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이에게 하례 인사를 받으셔야지요.”
황제가 옆에서 거들었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대공비.”
“…예, 폐하.”
놀랍게도 선황후의 장례식 이후 황제의 얼굴도 보려 하지 않던 대공비가 부드럽게 말을 받아넘겼다.
이 역시 주변의 경악을 샀다.
‘저 두 분이? 말도 안 돼!’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두 번 뜨나?’
‘이렇게 갑자기 바뀐 이유… 이유는 하나뿐이잖아?’
다들 경이로운 표정으로 델핀 공녀, 아니, 이제 누구도 황태자비임을 부정할 수 없는 여인을 보았다.
‘이 모든 일이 저분이 오신 후 일어난 기적이다!’
게다가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모두 목격했다.
놀라운 기적을.
태양을 뒤덮은 금빛 드래곤의 형상을.
그런데도 이 여인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악시온 대공비를 시작으로, 홀 안에 있는 모든 이가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굽혔다.
마치 한입으로 말한 것처럼 홀 안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황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힐리아는 고개를 들고, 허리를 편 채 이 인사를 받았다.
* * *
솔직히 좀 울컥했다.
황제가 나를 ‘황태자비’라고 처음으로 불러 줄 때.
그리고 홀 안의 모든 이가 일제히 인사를 올리는 순간.
짜릿한 달성감이 온몸을 휘감았고, 가슴께에서 뜨거운 게 울컥했다.
그 순간 내가 떠올린 건, 지난 한 달여간의 고생만이 아니었다.
세 번에 걸친 회귀.
지독하고 비참했던 죽음과 끔찍했던 경험들.
매번 나는 황태자비 자리에 가장 가까웠으나, 진정하게 그 지위에 오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 순간, 나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황태자비로 인정받았다.
세 번의 회귀에서 겪은 고통이 이걸로 전부 보상될 순 없었다.
하지만 조금, 아주 조금, 보상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황제와 아르파드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허리를 굽히지 않은 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에반젤린.’
아니, 정확히는 이름도 모르는 빙의자.
그녀는 망연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고.
나는 그녀를 향해 세상에서 가장 환하게 웃어 주었다.
동시에 소리 없이 입술만을 움직여 말했다.
확신할 수 있었다. 에반젤린은, 빙의자는 내가 말한 것을 알아들었다는 걸.
‘기대해. 이제 시작이니까.’
에반젤린의 어깨가 움찔한 것 같았다.
* * *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필레른 자작 부인은 벌벌 떨었다.
‘어,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이대로 나는…….’
그때였다. 힐리아가 그녀의 앞으로 친히 다가온 것은.
“아까 아주 재밌는 이야기를 했었지, 필레른 자작 부인?”
필레른 부인은 창백한 얼굴을 들었다.
“비, 비 전하?”
“내가 누구를 질투해서 뭘 어쨌다고? 다시 말해 보도록 해.”
꽃처럼 웃는 힐리아의 미소가 더없이 공포스럽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