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자신이 한 말에 아르파드가 움찔거리는 걸 느꼈을 때.
에반젤린은 승리를 직감했다.
‘황후는 아르파드의 가장 큰 적이야. 애초에 힐리아를 택한 것도 루드비히를 쳐 내고, 황후를 상대하기 위해서가 틀림없어.’
그렇다면 친딸인 자신이 황후를 쳐 내는 걸 돕는다면, 그보다 아르파드에게 유리한 일은 없었다.
아르파드는 태어난 직후부터 황태자였던 남자다.
그리고 황제가 되기 위해 살아가고 있었다.
‘힐리아와 나를 두고 비교한다면, 당연히 나일 수밖에 없잖아!’
자신을 얻으면 아르파드는 약점을 전부 보완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황후가 알고 있는 황족의 광증에 대한 정보까지 손에 넣는다면, 그렇다면…….
‘그래. 여주인공이 바뀌면, 남주인공도 바뀌어야지.’
그녀를 위한 이상적인 세상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느라 에반젤린은 아르파드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없어.”
“네?”
세상에서 가장 하찮고 의미 없는 것을 내려다보는 듯한 눈빛.
그리고 어이가 없다는 듯한 작은 속삭임.
“그딴 게 왜 내게 필요하지?”
“…!”
아르파드는 에반젤린의 손목을 꺾어 버릴 듯 강하게 잡고 떼어 냈다.
비명을 지르지 않은 건 아픔보다 아르파드가 한 말이 더 충격적이어서였다.
그녀를 신경도 쓰지 않고 내친 후.
아르파드는 그녀의 눈물이 묻은 크라바트를 풀어 내렸다.
“나는 아내 외에 그 누구에게도 몸을 만지게 허락할 생각이 없어서.”
그리고 비서관이 바친 새 크라바트를 힐리아에게 건네며 애교 섞인 말로 부탁했다.
“그대가 매 줘, 힐리아.”
녹아내린 듯한 따스한 빛깔.
그 눈빛은 오로지 한 여자 차지였다.
두 사람은 세상에 단둘밖에 없다는 듯 다정한 시선과 속삭임을 주고받았다.
그 사이로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순간, 힐리아는 보란 듯 아르파드에게 키스했다.
“…!”
지독한 모멸감과 검은 질투심이 에반젤린의 몸과 영혼을 불태울 듯 타올랐다.
* * *
오늘 연회의 주인공인 황태자 부부가 애정을 과시하자, 사방에서 숨죽인 말들이 오고 갔다.
“서부에까지 소문이 돌 때 의심했는데… 진짠가 봐요.”
“어쩜 열정적이기도 하셔라.”
“전에 황제 폐하와 선황후 폐하를 보는 것 같은…….”
“쉿. 대공비께서 들으실라.”
경탄과 부러움이 작게 오고 가는 와중이었다.
연회장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
연회장 안에 있던 서부 귀족들은 의아해했다.
그리고 연회장 밖의 웅성거림은 곧 안으로 움직여서 그들의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시종들이 연회 입장을 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콜멘 백작 부부와 영애, 이시드 남작 부인, 크랑 자작 영애 입장입니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로벨린 후작 영식, 카넬리안 자작 부부와 영애, 소베린 남작입니다. 그리고…….”
서부 귀족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가문의 이름들이었다.
전부 수도를 중심으로 하는 사교계에서 활동하는 궁정 귀족들.
분명히 지금쯤 황후궁의 퀴니벨 부인의 연회에 참석하고 있어야 할 이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민망한 얼굴로 슬금슬금 연회장에 나타났다.
“여, 여기가 아르타누스 홀이군요.”
“세상에 멋져라.”
“꿈만 같네요, 아르타누스 홀에 들어오다니.”
“헉! 잠깐, 저기 악시온 대공비 전하 아니에요?”
“…서부 유력 귀족들이 죄다……!”
“흠흠. 전 꼭 한번 와 보고 싶었어요.”
홀 밖에 힐리아가 미리 배치해 둔 황태자궁 궁인들에게 받은 초대장을 하나씩 들고 있는 것도 공통점이다.
서부 귀족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소리를 높여 말했다.
“아니, 갑자기 자기들이 무슨 낯으로 발을 들인대요?”
“그러게요. 황후궁의 연회가 한창 아니었나?”
“흥. 다들 눈이 붙었으니 보긴 한 모양이죠. 조금 전 하늘을 다 가린 아르타누스 님의 기적을!”
“하긴 우리 황태자비 전하께서 다른 이도 아닌 아르타누스의 축복을 받으셨는데……!”
그들은 대공비의 줄을 탄 보람을 실감 중이었다.
안 그래도 비밀리에 입궁해야 해서, 마법적 조치가 된 배와 마차를 이용해 짐짝처럼 이동했고.
황궁 안에서도 도둑처럼 움직여야 했다.
서부 귀족들은 뒤늦게 항복하듯 들어선 이들을 향해 마음껏 뽐내기 시작했다.
“다들 낯짝도 두껍지.”
“그러게 말이야.”
홀 안은 누군가가 자로 잰 것처럼 둘로 갈라져 있었다.
아르파드와 힐리아, 그리고 대공비를 둘러싼 서부 귀족들.
그리고 뒤늦게 들어왔지만, 숫자가 많은 중앙 귀족을 중심으로 한 세력들.
그들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어렸다.
“…….”
“…….”
뒤늦게 들어온 중앙 귀족들에게 에반젤린의 측근들이 도움을 요청했다.
말문을 연 건 필레른 자작 부인이었다.
그녀는 이미 힐리아를 대놓고 배신한 상태라,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에반젤린이 몰락할 경우,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그녀의 몰락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지금 힐리아 델핀을 몰락시키면 기회가 있을 거야!’
그런 일이 불가능하리라는 걸 직감하면서도, 필레른 부인은 포기하지 못했다.
“이것 봐요! 에반젤린 양의 드레스와 저기 하찮은 하녀의 드레스가 똑같은 게 이상하지 않아요?”
“그, 그런가?”
난감해하는 이를 붙잡고 필레른 부인은 계속 주장을 펼쳤다.
거의 넋을 놓고 있던 그녀는 힐리아를 손가락질했다.
“저분께서 저를 협박하셨다고요! 에반젤린 양의 드레스 디자인을 훔쳐 오라고요. 그래서 저 하녀에게 똑같은 옷을 입혀서 모욕을 주겠다고! 너무하지 않아요?”
용의 일식을 보고 황후궁에서 분위기를 살피다가 빠져나온 이들은 박쥐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들이 아르파드와 힐리아, 그리고 에반젤린 셋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를 놓칠 리 없었다.
누가 봐도 애정 어린 부부처럼 붙어 있는 두 사람.
그리고 홀로 망연한 얼굴로 떨어져 있는 에반젤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간 건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들은 필레른 부인의 필사적인 발악을 보고도 발을 뺐다.
“그, 글쎄요. 그렇게 비슷한가? 난 모르겠네요.”
“녹색 드레스야 많지 않아요?”
“마, 맞아요. 나도 녹색을 입었는걸.”
그들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애를 썼다.
‘퀴니벨 부인의 연회에 얼굴도장을 찍었으니, 여기도 발을 걸쳐야지.’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걸까? 어디에 붙어야 하는 거지?’
중앙 귀족들이 난감해하며 양측의 눈치를 살피던 찰나였다.
힐리아가 나섰다.
그리고 아르타누스 홀의 가장 안쪽, 황금의 드래곤 아르타누스 조각이 장식된 방향.
24계단 위에 있는 옥좌를 향해 입을 열었다.
“폐하.”
옥좌로 이어지는 통로는 비단 휘장이 내려진 상태였다.
사방에 경악이 울렸다.
“폐, 폐하?”
“설마 벌써 와 계셨던 건가?”
“그럼 황제께서 참석하신다는 소문은 진짜였던 거야?”
경악의 말들이 오고 가는 와중에, 힐리아는 옥좌 앞으로 아르파드를 끌고 다가갔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절을 올리며 말했다.
“위대한 아르타누스의 대리인이자 지상의 군주, 이스트리드 제국의 유일한 주인을 뵙습니다.”
아르파드는 별다른 말 없이 적당히 고개를 숙였다.
그와 함께 옥좌 앞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휙 열렸다.
그리고 아르타누스 상이 굽어보는 옥좌 위에는 그 주인이 앉아 있었다.
“진짜 폐하시다!”
“황제 폐하!”
“위대한 아르타누스의 대리인을 뵙습니다!”
힐리아와 아르파드의 뒤를 따라, 연회장의 모든 이가 우르르 절했다.
그리고 모두가 깨달았다.
‘결판은 이미 시작부터 나 있었던 거였어!’
힐리아의 승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