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에반젤린은 생각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그 정도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그녀는 황후에게 몇 번이나 악시온 대공비에 대해 들은 적 있었다.
거의 저주에 같은 말들.
“그 지독하고 끔찍한 늙은이! 남편도 자식도 먼저 보냈으면 따라갈 것이지……!”
직접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나이 든 대공비는 에반젤린이 멈칫할 정도로 위엄이 넘쳤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지금 힐리아 앞에서 무릎을 굽혔다.
저 자세는 잘 알고 있었다.
황후의 앞에서 귀부인들이 보이던 인사.
그런데 그걸 황후인 이자벨 앞에서도 보인 적 없는 대공비가 힐리아 따위에게 예를 표한 것이다.
‘말도 안 돼!’
게다가 그녀가 회심의 방법이라 생각한 드레스 건은 서부 귀족들이 중심인 상황에선 전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전부 힐리아 편을 들고 있었다.
그때 에반젤린의 눈에 멀찍이 선 아르파드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는 금장으로 된 견장이 달린 순백색의 예복을 입고 있었는데, 크라바트가 힐리아와 맞춘 듯 청보라색이었다.
커프스 역시 자수정이었는데 평소와 달라 보였다.
아르파드의 표정은 이전과 똑같았다.
딱히 누군가에게 호의적이지도 않고, 적대적이지도 않다.
그저 위에서 관조하듯 내려다보는 시선.
그 눈빛을 보고 에반젤린은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그래, 대공비나 서부 귀족들이 저러는 건 아르파드의 입지를 위해서일 거야.’
정말로 대공비나 서부 대귀족들이 힐리아 하나를 보고 무릎을 꿇었을 리 없다.
아르파드의 의사를 따르고 있는 거지.
에반젤린은 벌떡 일어섰다.
자신이 음해하려 한 힐리아나, 이를 막아서며 비난한 대공비는 없는 듯 무시했다.
그렇다고 해서 편을 들어 준 측근들이나, 스파이 짓에 거짓 증언까지 한 필레른 부인을 신경 쓴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르파드 한 명만을 보고 달려들었다.
두 눈에 투명한 눈물을 가득 담은 채.
더없이 가련하고 처연한 표정으로.
“오라버니!”
이런 상황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감히 그녀를 가로막는 이는 없었다.
덕분에 에반젤린은 어떤 방해도 없이 아르파드의 가슴팍에 매달릴 수 있었다.
손끝에 걸린 청보라색 크라바트의 감촉이 거슬렸다.
이게 마치 아르파드가 다른 여자의 남자라 주장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아르파드의 크라바트를 찢거나 구길 수는 없었다.
에반젤린은 대신 거기에 제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얇은 천을 천천히 적시기 시작했다.
에반젤린은 감정만으로 움직인 게 아니었다.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그녀는 아르파드만 들을 수 있도록 작게 속삭였다.
“저를 선택하세요, 오라버니. 제가 황후로부터 방패막이가 되어 드릴게요. 서부는 오라버니의 텃밭이니, 중앙은 제가 안겨드릴게요.”
아르파드의 너른 어깨가 움찔거리자 에반젤린은 미소 지었다.
* * *
에반젤린이 벌일 행동이나 음모에 대해 A안부터 Z안까지 예측하고 대비해 둔 나다.
‘하지만 거기에 이건 없었는데…….’
에반젤린이 ‘오라버니!’ 소리를 하며 아르파드에게 쏙 안기는 건 말이다.
그 순간.
그걸, 본 순간…….
가슴이 턱, 하고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지?’
저도 모르게 손이 움찔거렸다.
나는 자신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거나 동요하지 않을 자신이.
이미 세 번의 회귀를 거치며 온갖 꼴을 다 경험했으니까.
비참한 죽음만 세 번이다. 다른 경험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다.
에반젤린이 내 눈앞에서 가증을 떠는 건 지겨울 정도였다.
그런데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꽤 타격을 받은 상태였다.
덕분에 어떤 대응도 하지 못하고 마치 소금 기둥처럼 굳어 있었다.
그리고 불안하게 가슴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어떤 기대감이나 흥분으로 인해 심장이 뛰는 게 아니라, 보고 싶지 않고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일 앞에서의 불안한 반응.
그때 아르파드의 입술이 열렸다.
“…마.”
하지만 소리가 작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네, 오라버니?”
에반젤린은 눈물 어린 눈으로 아르파드를 올려다보며 다시 물었다.
그 순간, 아르파드가 거칠게 에반젤린의 손목을 휙 잡아당겼다.
쿵.
불안하게 뛰던 심장이 갈비뼈 아래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
‘설마?’
하지만 내 불안감처럼 아르파드가 에반젤린을 다시 잡아당겨 안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원심력을 이용해 에반젤린을 휙 돌린 뒤.
아르파드는 그녀가 적신 제 크라바트를 거칠게 풀었다.
그리고 그걸 바닥에 툭 던진 뒤.
뒤에 서 있던 비서관 율켄에게 말했다.
“더러워졌군. 예비품.”
그러자 율켄은 기다렸다는 듯 똑같은 청보라색의 크라바트를 꺼냈다.
나만이 아니라 주변 모든 이들의 표정에 똑같은 의문이 떠올랐다.
‘그걸 왜 가지고 있어?’
하지만 감히 입을 열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율켄이 크라바트를 매 주려 하자, 아르파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붉은 시선이 나를 향했다.
“……!”
그의 눈빛은 마치 창 같고, 또 칼날 같았다.
가슴을 찌르고 들어와 안에 숨겨진 걸 전부 파헤치는 듯했다.
나는 흠칫거리려는 어깨를 억눌렀다.
그의 앞에서는 꼭꼭 숨긴 모든 걸 들켜 버린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의 내 불안감을 그에게 들킨 것 같아 입술이 바짝 말랐다.
그때 아르파드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는 아내 외에 그 누구에게도 몸을 만지게 허락할 생각이 없어서.”
아기 다람쥐 정도는 아니었지만, 듣는 사람 손발이 다 사라져 버리게 하는 말은 여전했다.
그는 활짝 웃으며 나에게 다가와 응석 부리듯 말했다.
“그대가 매 줘, 힐리아.”
나는 조금 전의 이질적인 충격과 불안감을 꾹 눌렀다.
그리고 익숙한 가면을 썼다.
부끄러운 척.
“참, 당신도…….”
크라바트를 매 주는데, 그가 내 귀에만 들리게 속삭였다.
“칭찬, 안 해 주나?”
“…무슨 칭찬이요?”
대꾸하면서도 내 목소리가 좀 누그러져 있다는 건 모를 수 없었다.
“내 정숙함을 칭찬해 줘야지.”
“…!”
뭐 안 먹고 있어서 다행이다. 뭐든 입에 들어 있었으면 뿜었을 거다.
“저, 정숙…….”
“외간 여자의 손길을 피해서 아내의 곁으로 왔잖아.”
조금 전 갈비뼈 아래로 내려갔던 심장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온몸을 울리던 불안한 두근거림이 천천히 스러졌다.
“좋아요. 칭찬해 드리죠.”
뭐, 아까 에반젤린의 얼굴이 흙빛이 되기도 했고.
좀 통쾌한 것도 사실이니까.
그러자 아르파드는 한발 더 나아갔다.
내 귓가에 이상한 말을 속삭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냥 맨입으로?”
“해 달라는 대로 칭찬해 줬잖아요?”
“상도 줘야지. 그래야 제대로 된 칭찬이지.”
“상?”
무슨 상?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아르파드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덕분에 내 눈앞에 아르파드의 매끄럽고 티 하나 없는 뺨이 드러났다.
늘 보는데도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된다.
‘와, 모공 하나도 안 보여. 이것도 드래곤의 혈통 덕인가?’
이렇게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사이, 아르파드의 재촉이 이어졌다.
“…안 줄 건가, 상?”
사실 현실도피긴 했다.
아르파드가 뺨을 내민 게 어떤 의민지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연회 중이고! 대공비도 있고, 귀족들이 그득그득하단 말이야!’
아르파드는 내 ‘상’이 없으면 얼굴을 치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누누이 말했다시피, 우리의 금슬을 자랑하는 건 정치적으로도 좋은 일이긴 했고.
무엇보다… 아르파드 너머로 보이는 에반젤린의 표정이 나를 움직였다.
에반젤린은 내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와 아르파드가 입궁할 때 노려보던 것과도 달랐다.
마치, 유일한 존재에게서 버려진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가 처음 보는 빙의자의 진짜 상처받은 얼굴.
그 순간, 나는 참을 수 없어졌다.
아르파드가 내민 건 뺨이었지만, 내가 훔친 건 입술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