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에반젤린의 목소리는 아주 컸고, 발음은 또렷했다.
홀 안에 있는 사람 중에 못 듣는 사람이 있을까 봐 걱정된 모양이다.
덕분에 홀 안에 모인 귀족들 사이로 약간의 동요가 퍼졌다.
“방금 들으셨어요?”
“분명히 지금 황태자비 전하 옆의 시녀와 루스 후작 영애의 옷이 아주 비슷하긴 한데…….”
“설마 정말로 따라 한 걸까요?”
자신의 말이 좀 먹히는 것 같자 에반젤린은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펑펑 울기 시작했다.
“시녀도 아니고 하녀에게 일부러 저와 같은 옷을 입히다니! 날 하녀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거잖아요, 정말 너무해요!”
그 말에 조금 전 애니를 시녀라 언급한 귀부인이 찔끔했다.
에반젤린이 노골적으로 그 말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갸웃했다.
“하녀라니요? 여기 애니카 로렌은 얼마 전에 준남작위를 받은, 제 측근 시녀인데요.”
그러자 에반젤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에반젤린이 애니가 자신과 비슷한 드레스를 입은 일로 공격해 올 거라는 건 예측한 바였다.
이에 대한 대비를 겸하고 그걸 핑계 삼아, 나는 애니에게 작위를 내렸다.
정확히는 아르파드 명의로 내려진 거였지만 말이다.
영지가 따로 없는 단승 작위인 경우 황태자는 얼마든지 내릴 권한이 있었다.
‘사실 벨테인 경에게도 내리려 했는데, 본인이 거절했고. 애니도 이번 일 때문이 아니면 거절했겠지.’
정말이지 충실하고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지금 애니는 하녀가 아니라, 시녀 지위였다.
에반젤린은 얼굴을 찌푸리며 외쳤다.
“결국 나를 모욕하고 치욕을 주기 위해 한 짓인 건 똑같잖아요!”
조금 전 펑펑 울던 건 잠깐 잊어버린 듯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였다.
“이미 말했다시피 나는 그런 적 없어요, 루스 후작 영애.”
“그게 아니라면 왜 저 하녀와 내 옷이 똑같은 건데요?!”
“그건 나도 모르죠.”
나는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생각보다 그다지 모욕적이진 않으셨나 보네요. 지금은 울음을 그치신 걸 보니. 다행이에요.”
“!!!”
나에게 버럭버럭 화를 내는 사이, 에반젤린은 가련한 눈물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러자 에반젤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사나워진 눈매가 나를 죽일 듯 노려본다.
나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에반젤린 역시 서러운 눈물이 본인에게 더 낫다고 판단한 건지, 곧 나를 노려보는 걸 그만두었다.
그리고 억지 눈물과 울음이 이어졌다.
하지만 아르타누스 홀의 분위기는 지금까지 중앙 사교계와는 달랐다.
누군가가 에반젤린의 눈물을 보고도 꿋꿋이 말하기 시작했다.
“우연히 드레스가 비슷한 건 얼마든지 있는 일 아닌가요?”
“맞아요. 저도 비슷한 광경을 본 적 있었어요. 그때 두 영애는 신기하다고 웃으며 넘겼죠.”
지금 에반젤린처럼 속 좁게 난리를 안 쳤다는 소리다.
“게다가 일단 루스 후작 영애는 황태자비 전하의 시녀를 하녀로 착각할 정도로 그다지 가깝지 않은 모양인데요.”
지금 아르타누스 홀을 채우고 있는 이들은 서부 귀족들이 대부분이다.
다들 악시온 대공비나 아르파드, 그리고 덧붙여서 나에게도 호의적인 이들이라는 소리다.
에반젤린의 주장과 항의에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기 힘든 건 당연했다.
에반젤린도 이건 예상한 건지 눈물 바람으로 필레른 자작 부인을 끌어들였다.
“어흐흑! 필레른 자작 부인. 어서 증언해 줘요. 아까 나에게 고백한 대로요!”
“에, 에반젤린 양!”
필레른 부인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르파드와 서부 대귀족들 앞에서, 게다가 내 앞에서 날 고발하는 증인이 되어야 하니 당연했다.
에반젤린이 어떤 주장을 할지는 뻔했다.
‘필레른 부인을 증인으로 삼아 내가 자기 드레스를 베낀 거라고 주장하겠지.’
자기가 하려 한 짓을 나에게 덮어씌우려 할 거다.
너무 뻔히 읽혀서 도리어 김이 샐 지경이었다.
‘식상할 정도야.’
예상한 걸 대비 못 했을 리 없다.
필레른 부인은 망설이면서도 에반젤린을 위한 증언을 했다.
“제가 그동안 황태자궁에 드나들며 저분과 친하게 지낸 건 다 아실 겁니다. 저분께서… 저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에반젤린 양의 드레스 디자인을 알아 오라고요.”
어차피 오늘 이곳에 오지 않고, 황후궁에서 에반젤린 옆에 붙어 있었을 때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
‘그 전에 지금 내가 다른 드레스를 입고, 아르타누스 홀을 서부 귀족들로 채운 걸 봤을 때 이미 내가 자길 이용한 걸 알았겠지.’
에반젤린과 필레른 부인의 차이가 있다면 그거다.
에반젤린은 자신이 농락당했다는 데에 분노했지만, 필레른 부인은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에반젤린에 대한 의존과 두려움이 더 컸다.
필레른 부인의 얼토당토않은 말은 점점 더 살이 붙어서 이어졌다.
“저분께선 에반젤린 양이 너무 부럽고 싫다고, 어떻게든 망신을 주겠다며 꼭 디자인을 알아내 오라고 저를 협박하셨어요. 안 그러면… 저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요.”
그러자 기다렸단 듯 따라온 에반젤린의 측근들이 외치기 시작했다.
“어쩜, 너무하세요!”
“아무리 사교계의 꽃인 에반젤린 양이 부러웠어도 그렇지!”
“에반젤린 양을 끌어내리면 자신이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보죠?”
주변의 서부 귀족 중 하나가 기가 차다는 듯 물었다.
“황태자비께서 굳이 루스 후작 영애에게 그런 주의를 기울이실 필요가 있겠나?”
그러자 에반젤린을 따라온 영애는 더더욱 독기 넘치게 바락 외쳤다.
“당연하죠! 서부 출신이라 모르는 모양인데, 에반젤린 양은 수도에서 모두가 선망하는 사교계의 꽃이라고요!”
“게다가 황후 폐하의 하나뿐인 따님이시라고요! 황제 폐하께서도 예뻐하시는, 그야말로 황족이나 마찬가지인……!”
그때였다.
불쾌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언제 루스 후작가가 황가에 편입되었지?”
노부인이 나서자, 주변에 서 있던 서부 귀족들이 우르르 물러나며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나선 이는 당연히 악시온 대공비였다.
“대공비 전하.”
“전하를 뵙습니다.”
황족이나 마찬가지라며 주장하는 이들 앞에 진짜 황족이 나타난 것이다.
“말해 보거라. 아이야. 대체 언제부터 루스 후작가가 황족의 반열에 이름을 올렸느냐?”
“그, 그게……!”
그녀는 에반젤린과 어울리는 영애들 사이에서 자주 쓰는 미사여구를 그대로 썼을 뿐이었다.
에반젤린의 모친이 황후였고, 황후궁에 거처하는 데다 황제도 에반젤린을 딸처럼 예뻐하니, 황족이나 마찬가지라고.
자신들끼리 에반젤린을 칭찬하고 숭배할 때 쓰던 말을 반복한 것뿐.
하지만 상대가 나빴다.
눈앞에 있는 이는 황후 이자벨조차 꺾지 못한 진짜 황족이었으니.
어린 영애가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녀가 어물거리자, 대공비는 혀를 차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다들 들을 수 있도록.
“내가 칩거한 동안 사교계의 기강이 완전히 무너졌군. 윗사람이 제대로 되어 먹지 못했으니, 이 꼴인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졸지에 에반젤린의 모친인 이자벨 황후까지 되먹지 못한 사람이 되었다.
에반젤린은 악시온 대공비의 말에 분노했으나, 위엄과 기개 넘치는 노부인을 직접 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말실수한 자신의 측근에게 되레 화를 낼 뿐.
“이실리아 후작 영애. 입 다물고 뒤로 가요.”
“에, 에반젤린 양!”
아직 어린 십 대 후반의 귀족 영애는 대공비의 날카로운 시선과 에반젤린의 화풀이를 받으며 쭈그러져야 했다.
그러자 악시온 대공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정말로 수도 사교계에선 예의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모양이구나. 연회에 참석하면 당연히 그곳에서 가장 고귀한 분께 인사를 올리는 것이 먼저이거늘. 그보다 남을 음해하는 게 먼저라니…….”
낮게 혀를 차는 소리가 울렸다.
에반젤린은 눈물 가득한 눈으로 대공비를 올려다보며 호소했다.
“제가 예의를 다 갖추지 못한 건 너무나도 황망하고 힘든 일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대공비 전하. 부디 헤아려 주세요.”
“사정을 헤아리는 건 최소한의 예의부터 갖춘 후의 일이다. 너도 네 주변 영애들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모양이구나.”
대공비는 피식 웃더니 모두가 들으란 듯 덧붙였다.
“뭐, 본디 어린 딸의 실수는 그 부모에게 물어야 하는 법이지만…….”
이게 누굴 노리고 나온 말인지는 분명했다.
주변 분위기는 에반젤린이 원하는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게 분명해졌다.
나는 여유 넘치게 웃으며 에반젤린 가까이 다가갔다.
부러 아르파드를 놔둔 채 말이다.
그러자 에반젤린 일행을 둘러싸고 부정적인 시선을 보이던 서부 귀족들이 일사불란하게 물러섰다.
나를 배려하고 복종하는 것이 눈에 띄도록.
눈물로 범벅된 에반젤린의 눈빛에 불꽃이 튀는 게 보였다.
‘울 건지 노려볼 건지 하나만 해.’
에반젤린의 기대나 예상과 달리,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몸을 휙 돌려, 악시온 대공비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절 위해 이렇게 먼 거리를 직접 와 주시다니. 다시 한번 감사해요, 대공비.”
그러자 서부 귀족들은 물론이고, 에반젤린 일행마저 눈을 휘둥그레 뜨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악시온 대공비가 내 앞에서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한 것이다.
“오히려 이 늙은이를 잊지 않고 불러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황태자비 전하.”
그녀는 내 손등에 가볍게 키스하기까지 했다.
악시온 대공비는 10여 년 전 이자벨 황후에게 예를 표하지 않기 위해 황궁을 뒤집어 놓았던 사람이다.
그런 그녀가 나에게 최고의 예를 표한 것이다.
이건 한 가지 의미였다.
‘황후 따위가 아니라, 내가 진짜 제국의 첫 번째 귀부인이라는 의미지.’
그리고, 나에겐 이런 의미이기도 했다.
‘나에게 에반젤린 따위는 라이벌조차도 아니야.’
이걸 에반젤린이 보는 앞에서 단적으로 보여 준 퍼포먼스였다.
그리고 다행히 에반젤린은 단번에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눈물과 분노로 얼룩져 있던 얼굴이 충격으로 굳어 버렸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