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66화 (66/210)

66화

에반젤린은 오늘 자신의 시력을 몇 번째 의심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뭐지? 내가 지금 꿈을 꾸나?’

분명히 텅텅 비어 있어야 정상인 홀 안은 인파로 가득했다.

이색적이고 화려한 예복과 드레스로 치장한 이들이 모여 하하 호호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훌륭한 오케스트라가 듣기 좋은 선율을 연주 중이다.

연회장 구석의 테이블에는 먹음직스러운 요리가 가득했다.

그녀의 옆을 스쳐 가던 시종이 놀리듯 술을 권했다.

“자일랑산 로제 와인과 무셰 샴페인이 있습니다. 드릴까요?”

“…….”

에반젤린은 무시무시한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다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두 종류의 술은 모두 서부에서 유명한 것들이다.

그리고 연회장 안에 들어설 때 느꼈던 위화감이 뭔지도 깨달았다.

‘아는 얼굴이 거의 없어!’

에반젤린은 수도 사교계의 꽃이었다.

당연히 수도 사교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귀족들과는 안면이 익을 수밖에 없다.

그녀에게 낯설다는 건 수도 사람들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리고 에반젤린은 저 멀리, 힐리아 옆에 서 있는 여인을 알아보았다.

‘솔레누 후작 영애!’

얼마 전 회유하려다가 실패해 모욕을 준 여자다. 그 뒤로 종적을 감췄었는데…….

그 여자가 여기 있다는 건 한 가지를 의미했다.

‘설마, 여기 모인 이들이 전부 서부 귀족인 건가?’

그렇다면 그들의 얼굴이 낯선 것도, 또 차림새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도 설명이 된다.

서부와 중앙 사교계는 10년 넘게 단절되어 따로 돌아갔으니까.

양쪽의 복식 유행이 다른 것도 당연했다.

그녀의 판단이 맞다는 걸 알려 주는 이가 저기 안쪽에 있었다.

희게 센 머리를 깔끔하게 틀어 올리고, 푸른 다이아몬드 티아라를 쓴 감청색 눈동자의 귀부인.

그녀는 한눈에도 보통 사람이 아닌 듯 위엄이 넘쳤다.

에반젤린의 측근 중 가장 나이가 많고 신분이 높은 케슬링 후작 부인이 그 여인을 보고 경악했다.

“에, 에반젤린 양! 그분이에요! 그분!”

“그분?”

“악시온 대공비 전하요!”

“…!”

10여 년 전, 황후와 대립하며 서부 사교계를 통째로 떼어 내어 칩거했던 거물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힐리아의 황태자비 인정에 가장 중요한 연회에.

이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설마, 서부 전체가 힐리아에게 붙은 거야?’

아무리 힐리아를 무시하는 에반젤린이라지만, 이건 절대 과소평가할 수 없었다.

아니 그것만으로도 위협적이지만, 지금은 더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어떻게?

‘나도 황후도 그런 낌새는 전혀 못 알아챘는데? 무슨 마법이라도 쓴 거야?!’

* * *

나는 무셰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면서 기분 좋게 웃었다.

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기세 좋게 달려들다시피 연회장 안에 들어온 에반젤린이 경악하는 건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놀람.

그다음은 당혹감과 낭패감. 그리고 긴장감.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을 읽으며 나는 통쾌함을 충분히 맛봤다.

입 안에서 터지는 샴페인의 기포가 기분 좋게 상쾌하다.

에반젤린의 표정은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서부에서 이 인원을 불러들인 거지? 전혀 알지 못했는데!’

그리고 내가 이번 연회 준비에서 가장 공을 들인 게 바로 그 부분이었다.

‘보리와 순무 수송이 제일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렸지.’

연회 직전에 용병단으로부터 받은 쪽지에 쓰여 있던 단어, ‘보리’와 ‘순무’.

이건 특정 집단을 가리키는 암호였다.

바로 서부 귀족들.

이세핀이나 악시온 대공비 개인이라면 황후와 에반젤린의 눈을 피해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연회장을 채울 수 있는 인원을 그들의 첩보로부터 숨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서부로부터 황궁까지 옮기는 것 자체가 문제다.

이 문제는 연회를 위해 사들이는 물자인 척, 귀족들을 수송선에 실어 와서 해결했다.

실제로 보리와 순무는 서부의 특산물이기도 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어지간히 콧대 높은 이들이라, 짐처럼 배에 실려 와서 위장막을 쓴 짐마차로 옮겨지는 건 힘든 일이었을 거다.

하지만 서부 귀족들의 황후와 에반젤린에 대한 악감정이 자존심과 불편함을 이겼다.

‘원래 싫어하는 사람에게 엿 먹이기 위해서는 자신의 불편함도 감수할 수 있는 게 사람이니까.’

서부 귀족들은 그 한 가지 목표에서 나와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덕분에 협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을 수도로 데려오는 것도 문제였지만.

황궁 안으로 들여와 아르타누스 홀로 데리고 들어오는 건 더 문제였다.

나는 당연히 이를 위한 준비를 철저히 해 두었다.

황태자궁에는 외부로 통하는 통로가 있었다.

그리고 황태자궁과 아르타누스 홀은 한 달 전부터 연회 직전까지 사람들이 엄청나게 드나들었다.

연회 준비 중이니 자연스러운 일.

나는 그 사람들이 편하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한다는 명분으로 몇몇 공사를 벌였다.

주변의 눈을 가리는 키 큰 정원수를 많이 심고, 햇살을 가리는 장막을 쳤다.

그 장막에는 마법적인 장치가 되어 있었다.

바로 몇 주 전 내가 확보한 ‘제작자’를 통해 손에 넣은 마도구였다.

‘일정 거리 밖에서 보면 시전자가 원하는 모습으로만 보이도록 해 주는 거지.’

그래서 외부에서는 연회 준비 중인 시종과 하녀들이 드나드는 것으로 보였을 거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위장막 아래로 서부 귀족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주변은 황태자궁의 기사들과 검은 용병단 등, 믿을 수 있는 이들이 지키게 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아르타누스 홀이 북적거리는 광경이다.

물론 악시온 대공비의 영향력과 설득의 효과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대인원이 우리에게 협조하게 만들긴 어려웠다.

난 그걸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것으로 해결했다.

“중앙 귀족들은 서부 귀족들이 이런 식으로 허를 찌를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할 거예요.”

“연회 날 여러분을 보고 일그러질 황후와 에반젤린의 표정이 기대되지 않나요?”

덕분에 나만이 아니라, 악시온 대공비와 솔레누 후작가를 비롯한 서부에 이름 있는 귀족들은 흥미진진하게 에반젤린을 관찰 중이었다.

그녀가 얼마나 놀랄지.

또 얼마나 화를 내고 분통 터져 할지 기대하면서.

그리고 에반젤린은 우리 모두의 기대에 부응해 주었다.

흙빛이 된 얼굴로 한동안 표정 수습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난 세 번의 회귀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가슴께에 얹혀 있던 묵직한 돌이 내려가는 것처럼 시원했다.

에반젤린의 뒤에 선 이들도 낭패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아르타누스 홀에 모인 서부 귀족들의 면면을 확인하고 경악했다.

“악시온 대공비 전하께서……!”

“솔레누 후작과 소후작 부부예요.”

“저기 저 사람들은 분명히 무터 후작 일가!”

서부의 어지간한 대가문들은 다 모여 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에반젤린을 보았다.

‘내가 공들여 만든 물 먹어 보니까 맛이 어때?’

당연히 에반젤린의 표정은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에 쭈그러져 있을 에반젤린이 아니긴 했다.

그녀는 곧 경악과 낭패감의 몇 배 이상 되는 적의로 나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하긴, 이렇게 쉽게 당하고만 있으면 에반젤린이 아니지.’

물론 에반젤린이 어떤 것들로 날 공격하려 할지, 이미 A안부터 Z안까지 모든 대비가 끝나 있었다.

* * *

서부 대귀족들 사이에서 화사하게 웃고 있는 힐리아는 분명히 아름다웠다.

에반젤린에게 맞춘, 본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녹색 드레스가 아니라 처음 보는 색감의 청보라색 드레스가 화사했다.

연한 분홍색 머리카락과 신비한 보라색 눈동자.

그리고 얇아서 속이 비치는 듯 투명한 피부를 잘 살려 주는 색이었다.

힐리아의 머리에는 특이하고 아름다운 티아라가 장식되어 있었다.

가운데에는 초승달 모양으로 세공된 커다란 레인보우 문스톤이 위치하고, 그 주변에 수백 개의 별 모양으로 커팅된 작은 다이아몬드가 빼곡히 박혀 있는 티아라.

에반젤린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달과 별의 티아라!’

저것은 초대 황제의 모친 이스트리드 공주가 쓰던 티아라 중 하나였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티아라들을 며느리인 초대 황후에게 물려주었는데.

모든 티아라가 황실의 보물로 여겨졌다.

그중 이스트리드 공주가 아르타누스에게 약탈혼 당할 때 쓰고 있던 티아라가 바로 저것이다.

그 때문에 저 티아라는 황후나 황태자비가 결혼식 혹은 피로연에서만 쓸 수 있었다.

티아라의 마지막 주인은 아르파드의 모친인 선황후 록셀린.

그녀가 죽은 후, 모친 악시온 대공비가 황후궁에서 록셀린 황후의 유품을 빼 올 때 저것도 끼어 있었다.

아르파드는 절대 저것을 계모에게 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황후가 유달리 한 맺혀 있는 황후의 상징 중 하나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힐리아의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말도, 말도 안 돼!’

에반젤린의 녹색 눈이 분노와 질투로 불타기 시작했다.

마침, 목표인 녹색 드레스의 하녀 역시 힐리아의 곁에 있었다.

그녀는 한달음에 달려가 외쳤다. 조금 전의 논리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일부러 내 드레스 디자인 정보를 빼내서 똑같은 걸 하녀에게 입히다니,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죠?!”

으허헝!

서러운 울음이 홀 안에 난데없이 울렸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