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에반젤린은 어이가 없어서 한숨을 흘렸다.
“지금 날 못 알아보고 막아서는 거예요? 내가 누군지 몰라?”
그러자 앞을 막아선 기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잘 압니다. 루스 후작 영애.”
그제야 에반젤린은 앞에 있는 기사의 얼굴이 눈에 익다는 걸 깨달았다.
‘델핀저에서 본 적 있는 기사잖아?’
그렇다.
지금 에반젤린 앞을 막아선 이는 바로 벨테인 경이었다.
그는 오늘 아침 힐리아에게 철저하게 입구를 지키라는 명을 받은 참이었다.
“황후궁에서 아르타누스 홀과 가장 가까운 입구를 경이 직접 지켜 주세요.”
“예,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도록…….”
“아뇨. 연회인걸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면 안 되죠.”
“그러시면?”
“초대장을 철저하게 확인해 주세요. 초대장을 가지지 못한 이라면 누구도 들이지 말고, 초대장을 가진 이라면 누구라도 들여보내세요.”
그렇게 말하며 힐리아는 오묘하게 웃었다.
마치, 이 상황을 예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벨테인 경은 그 명령에 철저하게 따를 뿐이었다.
“어서 비켜요!”
“그럴 수 없습니다. 초대장을 가지신 분만 입장시켜 드릴 수 있습니다.”
그들의 실랑이가 길어지려는 찰나였다.
아르타누스 홀의 문이 안쪽에서 열렸다.
그리고 진녹색 드레스를 입은 한 여인이 살짝 빠져나왔다.
그녀를 본 순간 에반젤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하녀 따위가 주인을 믿고 감히 이렇게 굴어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단어 하나하나마다, 이를 가는 소리가 붙어 있었다.
에반젤린은 그대로 달려들어 애니의 머리채를 잡아당기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벨테인 경이 앞에서 막아서고 있었기에 불가능했다.
그러자 애니는 마치 뽐내듯 혹은 약 올리듯, 한 바퀴 빙글 돌면서 드레스를 자랑했다.
진녹색 벨벳 위에 화려한 금빛 장미 덩굴을 수놓은 스커트에 어깨부터 바닥까지 크림색의 얇은 와토 주름을 늘어뜨린 것이 특이한 아름다운 드레스.
누가 봐도 하녀에게 입히기엔 과하게 화려하고 고급스러웠고, 특이한 디자인이었다.
연회의 주인공이 입어야 어울릴 수준이다.
사실 에반젤린 본인이 입을 것이기도 하고, 힐리아를 무사히 속여야 했으니 그만한 수준의 드레스를 준비했으니 당연했다.
그런데 그 고급 드레스를, 일개 하녀가 입고 있어서 지금 에반젤린은 하녀와 비교당하는 처지에 처한 것이다.
분노로 눈이 돌아갈 수밖에.
게다가, 한 가지 더 분노가 치미는 이유가 있었다.
‘뭐야? 분명히 같은 디자인인데 왜 이렇게 다르지?’
놀란 건 필레른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일부러 에반젤린의 드레스보다 허술하고 못생기게 만든 거였는데?’
그녀는 드레스 가봉 때 힐리아가 사착한 걸 직접 봤기에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같은 디자인인데, 왜 하녀가 입은 쪽이 더 예쁘고 세련되어 보이는 거야?’
다른 측근들 역시 입 밖으로 내진 않았으나,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애니가 입은 드레스는 지난 사흘간 프리다 웨스, 즉 솔레누 영애가 최선을 다해 보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레누 영애의 디자이너로서의 특기는 세세한 디테일에 강한 것이었다.
그 진가가 지금 드러났다.
사흘 전 마지막 가봉 후 힐리아는 이 드레스를 버리지 않았다.
대신 그날 저녁 들어온 솔레누 영애에게 직접 부탁했다.
“이 드레스를 당신 실력으로 더 우아하고 세련되게 만들어 줄 수 있어요?”
그 이유를 알게 되자, 솔레누 영애는 눈에서 빛을 냈다.
“반드시, 그 여자의 드레스보다 완성도 높고, 아름답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자청해서 사흘 밤을 새운 결과.
그녀의 호언장담은 실현되었다.
애니는 미쳐 날뛰는 에반젤린을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자기는 우리 비 전하를 드레스로 모욕 주려고 했으면서, 반대로 당하니까 저 난리라니. 별꼴이야.’
지금 애니가 입은 드레스는 거의 같은 디자인임에도 분명히 에반젤린 것보다 아름다웠다.
절로 어깨가 으쓱했다.
애니는 동시에 고개도 빳빳이 들었다.
골탕 먹은 에반젤린의 분통 어린 표정을 자세히 보기 위해서였다.
에반젤린은 사납게 외쳤다.
“당장 비키지 못해? 아니면 저 무례한 하녀를 직접 처벌하던가!”
“저는 주인의 명을 따를 뿐입니다.”
충실한 기사는 당연히 요지부동이었고.
애니는 태평하게 에반젤린의 난동을 감상하다, 파우치에서 금빛 압인과 분홍색 리본이 특징적인 초대장을 꺼냈다.
필레른 부인은 그것이 뭔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초, 초대장?”
“네. 맞아요.”
애니는 화사하게 웃으며 초대장을 흔들어 보였다.
“거기 계신 불청객분들에게 필요하신 것 같은데, 아닌가요?”
에반젤린은 이를 갈면서 대꾸했다.
“네 주인이 주라고 한 모양이지? 그럼 어서 내놓고 사라져. 그 옷을 다 찢어 버리기 전에.”
그러자 애니는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어머. 무서워라. 그리고 우리 비 전하께선 아무 명령도 하지 않으셨어요. 초대장에 대해서는 말이죠. 너무 무서우니, 전 이만 돌아갈까요?”
애니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참지 못하고 에반젤린이 외쳤다.
“거기에 서지 못해?!”
애니는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왜 그러신지요, 루스 후작 영애? 혹시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
하지만 에반젤린은 입이 비틀려도, 절대 하녀 따위에게 애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르타누스 홀 안으로는 반드시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저 안으로 가려면 초대장이 꼭 필요했다.
특히나 지금 에반젤린은 필레른 부인이라는 완벽한 증인을 확보한 상태.
‘아르파드의 앞에서 힐리아의 얼굴에 먹칠해 주려면 저 안으로 들어가야 해.’
그녀는 필레른 부인을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그러자 필레른 부인은 억울해하면서도 천천히 애니에게 다가갔다.
“저기, 나 기억하죠?”
애니의 표정이 더없이 싸늘해졌다.
“당연하죠. 비 전하의 옆에서 아첨을 잔뜩 하더니, 하루아침에 루스 후작 영애에게 붙은 기회주의자.”
하녀에게 모욕을 받은 필레른 부인의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 모욕당했다고 물러날 수는 없었다.
“초대장… 내게 주겠어요?”
“어머, 하지만 부인께선 이미 여러 장을 받아 가시지 않았나요?”
“그게…….”
처음부터 올 생각이 없어 비웃다가 전부 찢어 버렸다는 말은 절대 할 수 없었다.
“아, 혹시 잊고 가져오지 못한 건가요?”
“그, 그래요.”
“저런, 기억력이 그렇게 안 좋으셨을 줄은. 큰일이네요.”
애니는 필레른 부인의 기억력이 걱정된다며 한참 떠들어 댔다.
그리고 초대장을 건네주려다 실수로 떨어뜨렸다.
팔랑, 초대장은 벨테인 경의 발 바로 앞에 떨어졌다.
“!”
애니는 환하게 웃으며 돌아섰다.
“그럼 초대장을 드렸으니 저는 이만.”
애니가 쌩하니 사라져 버리자, 필레른 부인은 이를 갈며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굽혔다.
그녀가 어렵게 주워 온 초대장을 에반젤린이 거칠게 낚아챘다.
그걸 든 채, 벨테인 경 앞으로 기세등등하게 걸어갔다.
“자, 여기 그 잘난 초대장이에요. 그러니 당장 거기서 비켜요.”
벨테인 경은 조금 전 애니가 잔뜩 놀려 먹다가 초대장을 주는 걸 봐 놓고 못 본 사람처럼 딱딱했다.
초대장을 열어 글씨 하나까지 전부 확인한 후에야 물러났다.
원칙주의자다웠다.
챙!
마침내 문 앞을 막아서고 있던 창이 거두어졌다.
에반젤린은 벨테인 경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 얼굴, 기억해 주지.”
“뜻대로 하시길.”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에반젤린은 일부러 벨테인 경의 어깨를 치고 지나가려 했으나, 갑주까지 챙겨 입은 단단한 기사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쳇!’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듯했다.
아까부터 그녀의 계획과 예상이 자꾸만 틀어지고 있었으니까.
이 세계가 그녀를 비웃는 것처럼 말이다.
그때 입구에 대기 중이던 시종이 기세 좋게 외치기 시작했다.
“케슬링 백작 부인. 모렐 백작 부인. 필레른 자작 부인. 이실리아 후작 영애…….”
일부러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마지막 한 명을 부른다.
“…그리고, 루스 후작 영애. 입장입니다!”
“……!”
에반젤린은 수치심으로 붉어진 얼굴로 시종을 노려봤다.
저 호명이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혹은 패배를 널리 알리는 것처럼.
에반젤린은 자신을 다잡았다.
‘괜찮아. 아직 괜찮아. 진 게 아니야. 만회할 수 있어.’
아직 그녀의 손에는 남은 패가 많았다.
‘드레스 문제를 트집 잡아 망신을 줘서 연회를 망치면 돼!’
그리고 그 전에, 연회 분위기 자체를 비웃어 줄 수도 있을 터였다.
힐리아가 제대로 연회를 치를 수 있을 리 없으니.
‘게다가 어차피 연회장 안은 텅 비어 있을 거야.’
힐리아가 필레른 부인을 통해 뿌린 초대장은 전부 그녀의 벽난로에서 불태워졌다.
수도 사교계의 주요 인사들이 지금 황후궁의 무도회에 참석한 상태다.
당연히 아르타누스 홀은 텅텅 비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까 하늘에 나타난 것이 설사 진짜 드래곤이라 한들 그 사실은 변함이 없…….
문이 열리자마자 안으로 들어선 에반젤린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뭐, 뭐야? 이건?”
홀 안이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