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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64화 (64/210)

64화

상황을 파악한 에반젤린의 측근들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늘 이렇게 에반젤린의 적들을 공격했으므로, 손발이 착착 맞아 들었다.

“너무하세요!”

“설마 에반젤린 양을 욕보이려고 그런 짓을 벌인 건가요?”

“하녀 따위에게 저렇게 좋은 옷을 사 줄 리 없죠. 일부러 에반젤린 양을 모욕하려는 거예요!”

온 사방에 들으라는 듯이 와글와글 떠들어 대는 소리가 꽤 시끄러웠다.

그사이 용의 일식은 천천히 끝나 가고 있었다.

어느새 태양을 가리고 있던 드래곤의 형상이 잠시 옆으로 비켜나더니,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와 함께 잠시 지상에 드리운 그림자가 사라지고, 다시 낮이 돌아왔다.

에반젤린은 펑펑 울며 외쳤다.

“설명해 봐요! 왜 나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내가 대체 뭘 잘못해서요?”

에반젤린의 피해자 연기나 측근들의 항의에도 힐리아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그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을 뿐.

마침내 힐리아의 입술이 열렸다.

“나는 당신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에반젤린.”

“무슨 소리예요? 지금 그 증거가 바로 거기 있는데!!”

에반젤린은 참지 못하고 힐리아의 옆에 선 하녀, 애니를 삿대질했다.

“그게 아니면 저 하녀가 왜 나와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거죠?! 변명이라도 해 봐요!”

“세상엔 우연이 많아요. 루스 후작 영애.”

에반젤린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에반젤린이라고 부르던 호칭이, 루스 후작 영애가 되었다.

‘지금 힐리아 따위가, 나를 멸시하고 있어!’

저 호칭 하나가 에반젤린에게는 이렇게 들렸다.

‘나는 당당한 황태자비인데, 너는 일개 후작 영애에 불과하구나.’

멸시하고 조롱하는 것으로.

지금 힐리아는 당당하게 아르파드의 옆에 서 있기까지 했다.

에반젤린은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게다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조금 전에 벌어진 드래곤이 강림한 듯한 기이한 현상.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에반젤린은 이미 절감하고 있었다.

‘이대로면 힐리아가 황태자비로 인정받는 건 막을 수가 없어져!’

이미 저 기묘한 일식은 수도 인근의 눈이 붙은 자들이라면 다 봤으리라.

벌써 저것이 아르타누스이며, 힐리아를 인정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낸 거라는 소문을 열심히 내고 있을 거다.

‘힐리아 본인은 아니라도 아르파드가 반드시 그렇게 할 거야.’

그게 통하면, 아르타누스 홀이 텅텅 비어 있다 해도 소용없었다.

에반젤린은 아직도 믿고 싶었다.

‘이 모든 일의 뒤에는 아르파드가 있을 거야. 힐리아는 그저 앉아서 떠먹여 주는 걸 받은 것에 불과해.’

그렇다면 아르파드가 힐리아에게 실망하게 만들면 된다.

둘 사이를 갈라놓는 것으로, 힐리아의 위치를 흔들 수 있을 거다.

그렇게 계산했다.

정확히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 때문에 지금 에반젤린은 더더욱 필사적이었다.

‘어떻게든 힐리아에게 흠집을 내고 먹칠을 해야 해!’

그래서 아르파드가 힐리아를 버릴 수 있도록.

자신이 꾸민 드레스 음모를 도리어 힐리아에게 뒤집어씌우려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에반젤린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읍소했다.

“우연이라니 말도 안 돼요! 오라버니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정말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다고요?”

그녀는 조금 기대감을 가졌다.

아무리 최근에 아르파드가 힐리아를 싸고도는 행동을 보인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의도일 거라고.

‘힐리아 따위에게 정말로 아르파드가 반할 리 없잖아.’

아르파드는 황후와 적대하는 중이었다.

그 딸인 자신을 멀리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했다.

이해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우리는 어릴 때부터 가까이 지냈잖아. 친남매처럼!’

정작 본인이 빙의한 건 십 대 중반일 때였으면서, 빙의자는 에반젤린이 아르파드와 알고 지낸 모든 시간을 자신의 것처럼 합리화했다.

‘힐리아 따위와는 알고 지내온 시간 단위 자체가 다르다고!’

그녀는 희망에 찬 눈으로 아르파드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어?’

아르파드는 더없이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친밀하게 지낸 의붓여동생을 보는 시선이 아니다.

아니, 사람을 보는 시선조차 아니었다.

그저 거슬리는 돌멩이, 혹은 혐오스러운 벌레를 깔보는 눈빛.

에반젤린은 멍하니 불렀다.

“오, 오라버니?”

하지만 아르파드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에반젤린은 보고 말았다. 자신을 혐오감과 무시 어린 눈으로 보던 아르파드가 힐리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에반젤린은 아르파드의 붉은 눈이 저토록 다정하고 상냥해 보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에반젤린의 기억 속 가장 어린 시절조차 아르파드는 냉정한 시선으로 주변을 보고 있었는데.

저렇게, 이 사람만은 다르고 특별하다고 주장하는 듯한 눈빛은… 정말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었다.

아득한 좌절감과 절망감이 에반젤린을 잡아먹으려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에 사로잡힐 수가 없었다.

이대로 포기할 수가 없었다. 절대로!

에반젤린은 울먹거리는 것마저 잊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사자가 직접 이야기해야죠!”

그러자 힐리아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아르파드의 어깨너머로.

그리고 에반젤린의 이성이 완전히 날아가 버리게 하는 말을 내뱉었다.

“나는 굳이 그런 적이 없다니까요.”

“그걸 어떻게 증명하죠?”

“내가 했다고 증명하는 건, 당신이 할 일이에요.”

힐리아는 떼쓰는 어린애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요. 루스 후작 영애.”

굳이 후작 영애라는 호칭을 고수하는 것마저 에반젤린에게는 더없이 모욕적으로 들렸다.

“난 고마운 애니에게 좋은 드레스를 주고 싶었던 것뿐이라, 당신이 어떤 드레스를 입을지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거짓말!”

“연회 준비만으로도 바쁜 와중에 굳이 당신의 드레스 디자인을 베껴서 측근에게 입히는 수고를 하다니, 난 그럴 시간이 없었어요.”

힐리아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너무 자의식이 과한 것 아닌가요?”

“뭐, 뭐라고요?!”

에반젤린의 이성이 하얗게 타올라 사라져 버렸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힐리아는 아르파드와 함께 테라스에서 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더는 멀리서 하는 대화조차 불가능했다.

옆에서 서로 눈치를 보던 이들이 말문을 열었다.

“이만, 돌아가 볼까요?”

“그, 그래요. 이대로 여기 계속 있을 수는…….”

그러자 에반젤린이 벌떡 일어섰다.

눈에는 광기에 가까운 적의와 악의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 파리한 얼굴로 떨고 있는 필레른 자작 부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손목을 잡아 구석으로 끌고 갔다. 주변에 몰려 있던 다른 귀부인들은 눈치 빠르게 따라가지 않았다.

에반젤린의 속삭임이 필레른 부인의 귀를 긁었다.

소리는 겨우 들릴 정도로 작았으나, 분노와 살의가 범벅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필레른 부인?”

“저, 저는, 저는 몰라요.”

필레른 부인이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분명히 델핀 영애가 저 녹색 드레스를 입을 거라고 했어요. 들으셨잖아요. 케멀 의상실의 디자이너가 같이 설명을…….”

필레른 부인은 에반젤린의 처음 보는 살기 어린 눈빛과 일그러진 표정에 공포심을 느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에반젤린에게 매달렸다.

“나는 아니에요, 영애. 분명히 시킨 대로 했어요! 그러니까……!”

에반젤린의 악귀 같은 표정은 조금도 풀리지 않을 듯했다.

필레른 부인이 절망하려던 찰나, 거짓말처럼 에반젤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그제야 필레른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너무 이른 안심이었다는 걸 그녀는 곧 깨달을 수 있었다.

“당신이 책임을 져요.”

“네?!”

“당신이 다 망쳐 놨으니까 책임을 져야죠. 설마 그냥 도망칠 생각이었어요? 나에게 이딴 치욕을 주고?”

“저, 저는 그냥 시키신 대로만……!”

에반젤린은 공포로 떠는 필레른 부인의 멱살을 잡고, 새겨 넣듯 말했다.

임기응변으로 조작해 낸 거짓말을.

“내 말 똑똑히 기억해. 당신은 내 드레스 디자인을 힐리아에게 유출한 거야. 그 여자가 시켜서 말이지.”

“네?!”

“이번엔 제대로 해내. 못하면 정말로 끝이니까.”

살의가 넘쳐흘렀다. 필레른 자작 부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필레른 부인의 손목을 꽉 잡고, 에반젤린은 아르타누스 홀의 1층 입구로 향했다.

힐리아와 아르파드는 홀 안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따라 들어가지 않으면 드레스 문제를 제대로 공론화할 수 없었다.

당연히 힐리아에게 뒤집어씌우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아르타누스 홀의 입구에서 그들을 막아서는 이들이 있었다.

황태자궁에 소속된 황실 기사단이었다.

그들이 치켜든 창날이 삼엄하게 앞을 막는다.

에반젤린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외쳤다.

“아르타누스 홀의 연회에 참석하고자 하십니까?”

“그래, 그러니까 어서 비켜!”

그때 전혀 예상 못 한 질문이 나왔다.

“초대장을 가지고 계십니까?”

“…뭐?”

힐리아가 사방으로 보낸 아르타누스 홀의 연회 초대장, 그걸 가졌는지 물은 것이다.

필레른 부인은 그걸 꽤 많이 받았고, 에반젤린의 손에도 들어갔다.

그들은 힐리아를 비웃으며 그 초대장을 모조리 찢어 버렸다.

그런데, 지금, 그것이 필요해졌다.

“초대장이 없는 분은 들여보낼 수 없습니다.”

쿵!

마치 시위하듯 창대가 바닥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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