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퀴니벨 후작 부인은 체면도 다 내려놓고 테라스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그녀 역시 목격하고 말았다.
‘드, 드래곤!’
그때 근처에서 황태자궁의 궁인들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르타누스께서 황태자비 전하를 인정하셨다!”
“드래곤의 축복을 받은 분은 처음 아닌가!”
…등등.
누가 들어도 노골적인 선동이었다.
다른 이들도, 그리고 퀴니벨 부인도 흔들릴 리 없는 초보적인 선동.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야말로 신화적인 광경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었다.
퀴니벨 후작 부인의 여동생이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언니, 어떡해요? 그리고 에반젤린 양은 어디 간 거예요?”
“에반젤린은 잠시 상황을 보러 아르타누스 홀로……!”
퀴니벨 후작 부인은 눈앞이 아찔해지는 걸 느꼈다.
자신이 이렇게 놀라고 동요한 상태다.
하늘에 펼쳐진 광경을 목격한 이들은 당연히 더욱 동요할 게 뻔했다.
지금은 그걸 진정시키는 게 급선무였다.
퀴니벨 부인은 무도회장 안으로 달려갔다.
‘사람들을, 안정시켜야……!’
하지만 이미 내부는 혼란으로 가득했다.
다들 안색이 파리하게 질린 채 목소리를 줄이는 것도 잊고 떠들고 있었다.
와글와글, 거품처럼 불안과 동요가 끓어올랐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설마 저 말대로일까요? 정말로 아르타누스께서 델핀 공녀, 아니, 황태자비를 인정한 거예요?”
“잠깐 에반젤린 양은요?”
“…어디 간 거죠?”
“아까 필레른 부인과 함께 잠시 휴게실에 다녀온다고…….”
“어, 나는 아르타누스 홀에 간다고 들었어요.”
“뭐라고요? 우리는 여기 불러 놓고?”
“…….”
싸늘한 공기가 무도회장에 감돌았다.
“잠깐, 그러면 그 소문도 사실 아니에요?”
“무슨 소문?”
“그… 있잖아! 황제 폐하께서 그 연회에 납실 거라던 소문!”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라고……!”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들은 사람 있어요?”
“에이, 하지만 황후 폐하와 에반젤린 양의 말이 더 정확하지 않겠어요?”
“바로 그 에반젤린 양 본인이 먼저 아르타누스 홀로 갔다잖아요! 우린 여기 두고!”
사람들 사이에 낭패감과 불안감이 휘돌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하늘에 펼쳐진 광경을 확인한 이들이 경악하는 소리가 계속 울렸다.
그들의 놀라움과 낭패감, 불안감은 빠르게 옆으로 전염되었다.
누군가가 작게 중얼거린다고 한 소리가 너무나도 크게 울렸다.
“…우리 여기 남아 있다가 끈 떨어진 연 되는 거 아니에요? 황태자 측에서 화풀이하면 우리만 다 독박 쓸 텐데.”
잠시 껄끄러운 침묵이 무도회장 안을 내리덮었다.
대화를 나누던 이들은 물론, 상황을 늦게 알아채고 춤추던 이들마저 눈치를 보았다.
마침내 오케스트라의 연주까지 멈췄다.
그 고요함 속에서 누군가가 처음으로 ‘그 말’을 꺼냈다.
“우리도 가서 확인해 볼까요?”
“그, 그래도 되나?”
“에반젤린 양 본인이 갔다면서요.”
“홀 밖에서 분위기만 봐요. 그러다가 아니다 싶으면 바로 돌아오면 되지.”
“게다가 황제 폐하께서 와 계실지도 모른다고요. 그러면 우리도 얼굴은 비춰야…….”
“나, 나는 에반젤린 양을 따르는 것뿐이에요.”
변명이 줄줄이 흘러나오더니, 결국 무도회장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빠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명백했다.
하지만 퀴니벨 후작 부인만은 오늘 연회의 주인으로서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점점 비어 가는 홀을 바라보며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에게 무도회를 열라고 강요하고, 일을 이따위로 망쳐 버린 한 명에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에반젤린!’
* * *
일식과 비슷하지만, 일식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현상.
하늘로 날아오른 드래곤의 형상이 태양을 가려, 지상에 드래곤의 그림자가 지는 일.
이건 나중에 ‘용의 일식’이라고 불리게 되는 현상이다.
‘바로 오늘, 이 시간에 이 현상이 일어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
그래서 황제가 아르타누스 홀의 연회를 한 달 후 열라고 명했을 때 부러 부탁했다.
“폐하, 며칠만 더 말미를 주시면 안 될까요?”
“며칠?”
“예, 한 달 하고 엿새요. 한 달이나 한 달 엿새나 비슷하잖아요.”
“…?”
기왕 쓰는 거 좀 더 쓰라는 나의 말에 황제는 의아해하면서도 허락했다.
그 한 달 하고 엿새 뒤가 바로 오늘이다.
저 현상이 구체적으로 뭔지는 몇 년 뒤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그에 대한 몇 가지 가설은 들어서 알고 있다.
‘그중 가장 유력한 가설이, 잠들었던 드래곤이 깨어나 하늘로 날아오른 거였지. 날개를 펴고, 비늘을 햇볕 아래 말리기 위해서 라던가…….’
그게 아니라면 드래곤의 형상이 해를 가리는 일이 굳이 벌어질 리 없기도 했다.
그 드래곤이 아르타누스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번 일에 이용하기는 딱 좋지 않은가?
그리고 ‘용의 일식’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은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온갖 걸 자신의 권위 강화에 이용하던 에반젤린이 용의 일식을 이용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이 현상에 대해 알지 못하는 듯했다.
‘원작’에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던 걸까.
‘어쨌든 덕분에 내가 아르타누스에게 인정받은 존재라는 거짓말은 제법 근거가 생긴 셈이네.’
주변 반응을 보니까 확실했다.
홀 안에 있던 이들은 나를 거의 숭배하는 듯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고.
회랑 쪽의 에반젤린은 날 찔러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아, 진짜 짜릿해, 새로워. 최고야.’
에반젤린을 엿 먹이는 건 언제나 그렇다.
나는 보란 듯 그녀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해. 벌써 놀라면 안 되지, 에반젤린.’
* * *
에반젤린은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부정하는 건 불가능했다.
드래곤의 형상은 여전히 태양을 가린 채, 하늘에 떠 있었고.
그 아래에서 보란 듯 힐리아는 웃으며 아르파드의 품에 안겨 있었으니.
이에 대한 동요는 에반젤린의 측근들부터가 감추지 못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에반젤린 양?”
“설마… 정말로 아르타누스 님인가요?”
“그, 그럼 우리는 어떻게……?”
에반젤린이 뭐라고 한 소리를 해서 주변 단속을 하려던 찰나였다.
테라스 위에서 힐리아와 아르파드 옆으로 누군가 다가갔다.
그런데 그 여자가, 정확히는 입은 옷이 이상하게 눈에 익었다.
옆에서 경악으로 흔들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잠깐, 저 옷! 에반젤린 양의 것과 똑같잖아요!”
그 말대로였다.
진녹색의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힐리아의 옆으로 다가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행동만으로도 저 여자가 어떤 신분인지 다들 유추할 수 있었다.
“설마… 델핀 영애의 하녀?”
“잠깐. 그럼, 저 여자의 하녀가 에반젤린 양과 같은 옷을… 입은 거예요?”
“…말도 안 돼!”
경악으로 숨을 삼키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그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에반젤린의 표정은 지독한 모욕감으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감히 하녀한테 나랑 똑같은 옷을 입혀?’
뿌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울렸다.
에반젤린의 살기 가득한 시선이 놀라서 굳은 필레른 자작 부인을 향했다.
필레른 부인은 흙빛이 된 얼굴을 도리도리 저었다.
주변의 시선이 다 몰린 와중이라 대놓고 뭐라고 말하지도 못한 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드레스를 힐리아가 입을 거였다고 말하면, 그들이 꾸민 음모를 직접 토설하는 꼴이니까.
에반젤린의 머리가 열이 날 정도로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지? 이대로는 내 꼴이 너무 우스워져!’
그때였다.
과시하려는 듯 힐리아를 안은 아르파드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 그럼 이제 들어갈까. 오늘은 우리 결혼식 피로연이야. 주인공이 오래 자리를 비우면 안 되지.”
“…그럴까요?”
아르파드의 앞에서 수줍은 듯 웃는 힐리아의 얼굴을 찢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증오스러웠다.
가증스럽고 끔찍했다.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아르파드 앞에서 저 여자의 면상에 먹칠을 해 주고 말겠어!’
그러지 않으면 분이 안 풀릴 것 같았다.
‘그래! 그거야!’
불현듯 한 가지 아이디어가 머릿속으로 내리꽂혔다.
에반젤린은 삽시간에 표정을 바꿨다.
조금 전 살기 어린 표정을 한 적 따위 없다는 것처럼.
세상에서 가장 가련하고 불쌍한 여자가 되었다.
그러더니 눈가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소리 높여 외쳤다. 울먹거림이 가득한 목소리를.
“너무해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아무리 내가 싫어도 그렇지!!”
주변인들은 당황했다.
하지만 곧 알 수 있었다. 에반젤린의 외침은 바로 힐리아를 향한 것이라는 걸.
에반젤린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입가를 가린 채 계속 외쳤다.
손아래 가려진 입꼬리는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상태였다.
“일부러 내 드레스 디자인 정보를 빼내서 똑같은 걸 하녀에게 입히다니, 내가 그렇게 미웠나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에반젤린은 오열하며 땅으로 무너져 내렸다.
“나는 그래도 친구라, 축하해 주려고 들렀는데 어떻게 이런 모욕을……!”
어흐흑!
서러운 울음소리가 아직 용의 일식이 끝나지 않은 아르타누스 홀 정원에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