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에반젤린을 비롯한 모든 이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양이 갑자기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힐리아의 손짓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태양이 그녀의 명령에 따르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에반젤린은 아연했다.
‘일식? 이렇게 갑자기? 천문관들도, 학자들도 그런 말은 없었어!’
이곳의 과학이 지구에 비해 한참 떨어지긴 하지만, 일식과 월식처럼 큰일은 예측이 가능했다.
일부 시기나 위치가 어긋나긴 해도, 발생 자체는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사전에 어떤 예측이나 예상도 없었다.
어둠이 날개를 펼쳐 삽시간에 땅을 뒤덮는다.
그러자 2층 테라스에 선 힐리아의 모습도 사라졌다.
아니, 사라졌다가 곧 빛으로 다시 나타났다.
물결치는 드레스 자락이 어둠 속에서 빛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렴풋한 빛이, 낮을 도려내고 강림한 밤 속에서 유려하게 반짝인다.
마치 밤의 끝자락에서 빛나는 은하수를 한 자락 잘라 걸쳐 둔 듯했다.
너무나도 이질적이지만, 아름다움만은 부정할 수 없는 광경.
에반젤린은 몰랐지만, 이건 철저하게 계산되어 만들어진 장면이었다.
힐리아에 의해.
그녀의 주장으로 드레스에는 야광 효과가 있는 일리아덴산 진주와 그 가루가 듬뿍 사용되었다.
덕분에 갑자기 나타난 어둠 속에서 드레스는 마치 은하수처럼 반짝일 수 있게 되었다.
에반젤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힐리아는 예상과 달리 너무나도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대체 저게 뭐야? 어떻게 가능한 거지?’
드레스는 둘째 치더라도, 이번 일식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에반젤린이 확보한 그 많은 인재 중에 이번 일식을 예상한 이가 없는 건 분명히 이상했다.
그녀가 모은 인재들은 원작의 정보를 통해 능력이 검증되었다.
게다가 그 외 황실에 종사하는 학자 중에도 이번 일식을 예측한 이가 없다.
‘…이런 일이 가능한 건가?’
그때였다.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드, 드래곤?”
“용이다! 용이야!”
힐리아만 보고 있던 에반젤린은 뒤늦게 눈치챘다.
“…뭐?”
뒤늦게 눈을 들었을 때 그녀마저 보고 말았다.
태양은 ‘무언가’로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대신 금환 일식처럼 태양을 가린 ‘무언가’의 외곽선이 몇 배로 밝게 빛나고 있었다.
눈이 멀 듯한 금빛의 선.
그것은 한 형태를 그리고 있었다.
에반젤린마저 저것을 본 순간, 한 존재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드래곤 아르타누스?’
두 나래를 펼친 위대한 존재가 태양을 가린 채 허공에 떠 있었다.
그에 해가 가려져 일식이 벌어진 듯한 효과가 난 것이다.
반면 외곽으로 쏟아지는 빛은 드래곤의 비늘이 반사한 빛이 더해져 더욱 밝게 빛났고.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내리쬐는 햇빛의 그림자는 드래곤의 형태를 비추고 있었다.
게다가 더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이런 건 원작에 언급된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까지 특이하고 특별한 현상이 원작에 전혀 언급되지 않을 리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원작으로 치면 앞부분이다.
그녀가 읽지 못한 내용이 존재할 수 없는 시기였다.
원작 어디에서도 이런 내용을 읽은 적이 없었다.
에반젤린의 당혹감이 미처 끝나기도 전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이건 내가 철저하게 계산하고 사전에 몇 번의 리허설까지 마친 연출이었다.
사방에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한 순간.
나는 품속에 가지고 온 마도구를 발동시켰다.
시동어를 중얼거리자, 손안에 쥐어진 유리새에서 미약한 마력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딱 적당히 시원한 바람이 내 몸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어머니!’
이 유리새는 지난번에 루드비히의 시종을 협박할 때 썼던 것과 한 세트였다.
그 유리새는 빛나는 기능이 있었고, 지금 내가 가져온 건 약한 바람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이건 여름에 진짜 좋았는데!’
어릴 때 일부러 긴 망토나 드레스를 입고, 그 안에서 이 유리새를 발동시켜 천이 휘날리게 만들어서 시녀들을 놀라게 하곤 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생각한 연출이다.
그리고 효과는… 굉장했다!
펄럭펄럭!
부러 얇은 옷감을 여러 겹 겹쳐 만든 드레스는 우아하고 예쁘게 휘날렸다.
샤링가 꽃잎으로 물들인 드레스의 색깔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웠다.
드레스 자락 끄트머리에 달린 일리아덴 진주와 그 가루는 어둠 속에서 반짝거린다.
야광 진주 장식을 이용한 건 내 회심의 역작이었다.
리허설 때 지켜본 이세핀이 이렇게 표현할 정도였다.
“밤하늘의 은하수가 비 전하의 몸을 휘감아 도는 것 같아요!”
“만든 본인이 그렇게 말하면 자화자찬 같다는 거 알아요?”
“아니, 이 경우엔 아이디어를 주신 비 전하의 천재성을 찬양하는 거죠!”
“천재성은… 좀 오버 같은데요.”
어쨌건 심미안이 좋은 천재 이세핀이 감탄할 정도다.
당연히 일반인들은 보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질 게 분명했다.
저기 아래쪽, 에반젤린과 필레른 부인을 비롯한 이들까지 시선을 빼앗기는 게 느껴졌다.
‘그래! 원래 연출의 완성은 특수 효과라고!’
그때, 기다렸다는 듯 아르파드가 내게 다가오며 소리를 높여 말했다.
“이것으로 증명되었다! 위대한 아르타누스께서 나의 아내를 인정하셨고, 우리를 축복하셨음이!”
마력을 쓴 건지 마치 귓가에서 속삭이는 듯 선명한 목소리다.
아마 거리에 상관없이 아르파드의 마력이 미치는 곳에는 똑같이 들릴 것이다.
아르파드는 가까이 다가와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눈을 빛내며 속삭였다.
“저 현상까지 예측한 건가?”
“당연하죠.”
나는 마주 웃었다.
“미리 좀 말해 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그러면 당신 안 놀랐을 거잖아요? 진짜로 놀라는 모습 보고 싶었어요.”
이건 사실이다.
아르파드는 재수 없게 웃거나 비웃는 모습이 기본이었다.
이 남자가 허를 찔려 진심으로 놀라는 장면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저 현상을 직전까지 숨겼다.
덕분에 충분히 보고 즐길 수 있었다.
아르파드가 진짜 놀라는 모습을.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그거 아나? 나는 가끔 진짜 궁금해.”
“뭐가요? 내가 저걸 어떻게 알았을지?”
“물론 그것도 아주 궁금하지만. 더 궁금한 건 그대가 일부러 이러는 건지, 아니면 표정처럼 진짜 모르는 건지 궁금해.”
“무슨 소리예요?”
진짜 뭔 소린지 모르겠다.
내가 뭘 알고, 뭘 모른다는 거야?
어쨌건 내가 아르파드의 아리송한 말을 길게 고민할 여유는 없었다.
주변에 경탄과 기쁨이 빠르게 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아르타누스께서 직접 모습을 드러내시다니!”
“오오! 영광스러운 아르타누스를 뵙습니다!”
“위대한 드래곤을 경배하라! 황실을 경배하라!”
“와아아!”
홀 안에 모인 사람들은 물론이었고, 저 멀리 황후궁 근처에 사전에 풀어 둔 황태자궁 궁인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르타누스시다!”
“아르타누스께서 직접 나타나셨다!”
“드래곤께서 친히 새로운 황태자비를 인정하고 축복하셨어!”
아주 떠들썩했다.
덕분에 꽤 멀리 있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녹색 드레스를 입은 에반젤린의 안색이 시체처럼 새파랗게 질려 있는 것을.
* * *
에반젤린과 필레른 부인을 비롯한 이들이 나간 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황후궁에서 연회를 여는 중인 퀴니벨 후작 부인의 귀에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정말 아르타누스께서 나타나셨어!”
“우리 비 전하의 말씀대로야!”
“드래곤의 축복이다!!”
어찌나 크게 떠드는지, 연회가 방해받을 정도였다.
잠시 시끄러워 미간을 찌푸렸던 퀴니벨 부인은 곧 온몸의 피가 식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잠깐, 지금 뭐라는 거야? 내가 잘못 들었나?’
그때 창밖의 이변을 뒤늦게 깨달은 이들이 외치기 시작했다.
“저기! 밖을 봐요. 왜 이렇게 어두워졌지?”
“아직 낮인데, 해가 질 때가 아니잖아요?”
일반적으로 무도회는 저녁에 열린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힐리아는 낮부터 연회를 개최했고, 그걸 방해하기 위해 이 무도회도 낮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니 지금 창밖은 밝아야 한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어둠이 커튼처럼 내리깔렸다.
이상을 눈치챈 몇몇 이가 창문을 내다보거나, 테라스로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경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래곤! 드래곤이에요!”
“아르타누스시여!”
무도회장 안에 동요가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