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당연한 말이지만, 율켄은 아르파드에게 엄청나게 깨지고 쫓겨날 뻔했다.
“황족 모독죄로 3개월 감봉이다!”
“아악! 안 됩니다! 안 그래도 비 전하께 봉급을 뜯기고 있단 말입니다! 부부가 쌍으로 가련한 신하의 봉급을 빼앗으려 하시다니, 너무합니다!”
“뭐? 힐리아가 네 봉급은 왜?”
“사실은 말입니다…….”
율켄은 눈물과 함께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덕분에 아르파드는 힐리아와 율켄 사이에 있던 내기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한 마디로 율켄의 처지를 축약했다.
“자업자득이군.”
“…….”
“내가 몇 번 말하지 않았나. 넌 언젠가 네 혀 때문에 죽을 거야. 이 정도는 약소하군.”
두 주종은 실제로 율켄이 말 때문에 죽은 적 있는 건 몰랐다.
율켄은 훌쩍거리며 매달렸다.
“제발 비 전하 좀 설득해 주시면 안 됩니까?”
“네 봉급을 돌려주라고?”
“네!”
율켄의 눈이 희망에 반짝거리는 걸 보며 아르파드는 피식 웃었다.
“싫어.”
“어째서요! 간 빼 먹힌 벼룩이 불쌍하지 않으십니까!”
“그야 부부는 한 몸이니까. 힐리아의 재산이 늘면 나도 이익이니 굳이 말릴 이유가 없지.”
율켄이 원망 어린 눈으로 노려보다가 달려 나가자 그 뒤통수에 아르파드는 인장 찍힌 서류를 내던졌다.
* * *
근 일주일 만에 황태자궁에 들어온 필레른 부인은 볼멘소리를 했다.
“비 전하! 너무하세요! 초대도 안 해 주시고, 알현 요청도 전부 안 된다고만 하시다니!”
힐리아는 부드럽게 웃었다.
“미안해요. 어쩔 수 없었어요. 아팠다고 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필레른 부인은 구시렁거리면서도 끝까지 힐리아를 걱정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힐리아는 쓴웃음을 감췄다.
‘아마 황태자궁 감시를 일주일간 못 했다고 에반젤린에게 한 소리 들은 모양이지.’
그녀의 예상은 정확했다.
필레른 부인은 눈에 불을 켜고 그동안 달라진 게 없나 살피고 있었다.
오늘 그녀는 아르타누스 홀의 연회를 위한, 힐리아의 드레스 가봉에 참여한 것인데도 말이다.
“어때요, 필레른 부인?”
“…….”
드레스를 시착 중인 힐리아는 본체만체하고 주변을 살피는 데에 더 열심히였다.
그때, 필레른 부인의 눈이 이질적인 것을 잡아냈다.
‘저게 뭐지?’
커다란 수정을 깎아 놓은 장식품이었다. 몇 가지 복잡한 도형 형태의 금속 장식이 매달려 있고.
안에는 오묘한 빛을 가둬 둔 듯 반짝거리고 있었다.
필레른 부인은 허락도 받지 않고 물건에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이건 뭔가요? 처음 보는 건데…….”
그러자 애니가 불쾌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선물하신 조명 장식이에요. 약해서 함부로 건드리면 안 돼요.”
필레른 부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감히 하녀 주제에!’
하지만 다행히 그녀가 애니에게 화낼 일은 없었다.
늘 알아서 기는 힐리아가 먼저 화를 내주었기 때문이다.
“애니! 그 무슨 무례한 말이니! 필레른 부인은 내 하나뿐인 친구야!”
애니는 시무룩해졌다.
“넌 이만 나가서 곁방에서 기다리렴.”
“네, 전하.”
애니가 쫓겨나고 나자, 필레른 부인은 그제야 말했다.
“저는 괜찮답니다. 굳이 쫓아내실 것까진…….”
“괜찮아요. 얼마든지 구경하세요. 제가 밤에 무서워하니까, 리파가 선물한 거예요. 불이 꺼져도 은은히 빛나서 예쁘답니다.”
“리…파요?”
힐리아는 뺨을 발그레하게 붉히며 대답했다.
“황태자 전하요. 우리 둘만의 애칭이랍니다.”
“그, 그렇군요…….”
필레른 부인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 장식 외에 별로 변한 게 없는 걸 확인한 뒤 아르파드의 선물을 흠잡았다.
“크긴 하지만 그다지 특별할 건 없는 장식이네요.”
“…그렇죠?”
힐리아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을 뿐이었다.
필레른 부인은 속으로 힐리아의 흉을 보았다.
‘별것도 아닌 걸 굳이 자랑까지 하고 있어. 허영심만 커서는.’
그러다가 드디어 힐리아의 옆으로 다가왔다.
힐리아를 내내 기다리게 하다가 말이다.
궁인들만이 아니라, 필레른 부인과 모종의 교감이 있는 의상실 직원들까지 뾰족한 눈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필레른 자작 부인 한 명 때문에 일정이 마구잡이로 늦어지고 있었다.
필레른 자작 부인은 일부러 과장되게 손뼉을 치며 힐리아를 칭찬했다.
“세상에 너무나 아름다우세요!”
응접실 안에는 오로지 그녀의 목소리만이 울리고 있었다.
원래 황태자비의 드레스 가봉 정도면 시녀들만이 아니라, 수많은 귀부인이 참관을 원하기 마련이다.
당연히 투왈렛 룸이 북적여야 정상.
하지만 지금 황태자비의 투왈렛 룸은 꽤 한가했다.
황태자궁 소속이 아닌 사람은 필레른 자작 부인뿐일 정도다.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찾아오지도 않은 것이다.
마치 지금 상황이 얼마 남지 않은 연회 당일의 광경을 연상시켰다.
필레른 부인은 속으로 힐리아를 업신여기면서 조롱했다.
‘역시 멍청하고 바보 같은 여자!’
그리고 힐리아는 당연히 필레른 부인의 속내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녀는 쑥스러워하면서 안도했다.
“그래요? 정말 다행이에요. 사실 수도에서 가장 인기 많은 의상실을 수배하려고 했는데, 이미 몇 년 치 일정이 차 있다고 들었을 땐 눈앞이 깜깜했어요.”
힐리아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처연하게 수그러들었다.
필레른 부인은 음흉한 웃음을 숨겼다.
‘그야 내가 의상실 정보를 다 미리 에반젤린에게 빼돌렸으니까 그런 거지!’
덕분에 에반젤린은 수도 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의상실 대부분이 힐리아의 드레스를 만들지 못하도록 손을 쓸 수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말이 안 될 일이지만, 그 모든 곳이 에반젤린의 단골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 중앙 사교계의 유행을 에반젤린이 이끌고 있어 의상실 주인들도 거역하기 어려웠다.
필레른 부인은 이번 일을 잘 해낸 덕분에 에반젤린의 신뢰를 조금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에반젤린은 당연히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단순히 연회를 망치는 것만으로는 안 돼. 그날 그 계집애를 단단히 망신 줘야 해!”
그렇게 말하며 에반젤린은 필레른 부인에게 명령했다.
힐리아가 한 의상실을 선택하도록 유도하라고.
그 의상실은 당연히 모든 직원이 에반젤린에게 매수당한 상태였다.
덕분에 에반젤린은 힐리아가 연회 당일 입을 드레스의 디자인까지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런 사정을 전혀 모르는 힐리아는 그저 필레른 부인에게 감사할 뿐이었다.
“전부 부인이 케멀 의상실을 소개해 준 덕분이에요. 잘못하면 최신 유행인 새 드레스도 못 맞추고, 선황후 폐하의 유품을 입고 나갈 뻔했어요.”
“별말씀을요. 친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필레른 부인은 힐리아가 걸친 거의 다 완성된 드레스를 보며 비웃었다.
‘그래. 계속 멍청하게 고마워하고 있으라고. 연회 당일에 울면서 절망하게 될 테니까.’
필레른 부인은 승리감에 취해 힐리아의 진짜 표정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 * *
필레른 부인과 케멀 의상실의 직원들이 모두 돌아간 뒤.
나는 드디어 편해질 수 있었다.
필레른 부인이 나가고 조심스레 들어온 애니에게 나는 사과부터 했다.
“아까 진짜 미안해.”
“괜찮아요. 이미 다 합의한 거였잖아요!”
애니는 씩씩하게 웃었다.
그렇다. 당연히 애니가 쫓겨난 건 합의한 연기였다.
“그나저나 우리 아가, 아니지, 비 전하는 연기도 잘하시지.”
“고마워. 아, 애니. ‘그거’ 이상 없나 확인해 줘.”
“네.”
애니는 아까 필레른 부인이 집적거린 오묘하게 빛나는 장식품의 상태를 확인했다.
어디 한군데 깨지거나 금이라도 가면 큰일이니까.
“괜찮아요. 아무 이상 없어요.”
그리고 애니는 이미 알고 있는 대로, 그 장치를 작동시켰다.
그러자 수정이 점점 밝아지며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비 전하! 너무하세요! 초대도 안 해 주시고…….
아까 우리의 대화가 처음부터 고스란히 재생되는 것이다.
애니는 새삼 감탄했다.
“진짜 신기한 물건이에요.”
물론 나는 애니처럼 놀라거나 신기해하진 않았다.
‘지구의 녹음기보단 음질이 훨씬 떨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 세상에선 엄청나게 혁신적인 물건이긴 해.’
지난 일주일 사이 필레른 부인이 황태자궁에 들어오지 못한 건 내가 자리를 비운 경우가 많아서였다.
바로 ‘저것’의 제작자를 찾느라.
새삼스레 신기했다.
‘그런 어수룩한 사람이 이런 천재적인 마도구의 제작자라니.’
나는 며칠 전에 본 그 어벙한 얼굴을 떠올렸다.
깨진 안경을 쓰고 허름한 옷을 입고 있던 남자.
“이, 이런 허접한 물건을 그렇게 비싸게 사 주신다고요? 저, 저야 감사하지만…….”
“네? 그, 그, 그렇게 많은 금액을 저에게 투, 투자하신다고요…?! 아, 아니, 감사하죠, 당연히! 하지만, 하지만!”
율켄에게 얻은 정보로도 바로 찾지 못해서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제때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도구도, 제작자도.
물론 내가 준비해 둔 건 이것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