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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58화 (58/210)

58화

아무도 예상 못 한 힐리아의 명령에 모두가 얼음처럼 굳었다.

대공비의 폭언에 안절부절못하던 이들은 곧 힐리아의 침착한 대답에 대공비가 웃자 안심했었다.

일견 이상적이고 부드러운 흐름으로 보였으니까.

‘나이 든 권력자인 시어른이 도움이 필요한 어린 며느리를 시험하고, 이를 통과하자 웃으며 배포 있게 받아 주는 구도.’

그런데 이게 일시에 반전되었다.

힐리아가 배짱을 증명하기 위해 말한 게 아니라, 진짜 축객령을 대공비에게 내렸으니까.

“먼 길 조심해서 돌아가시길. 저는 따로 배웅하지 않겠습니다.”

“뭐?”

악시온 대공비의 분노는 쉬이 견딜 수 있는 게 아니다.

황제나 황후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새파랗게 어린 데다 아직 입지도 위태로운 힐리아가 축객령이라니.

‘이 자리는 누가 봐도 대공비 전하께서 황태자비를 시험하고 거두시는 자리인데!’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심지어 힐리아의 측근인 하녀 애니마저도.

그런데 힐리아만은 생각이 달랐다.

그녀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침착하게 말했다.

모두가 당황으로 굳어 숨 쉬는 것마저 잊었기에, 힐리아의 낭랑한 목소리는 너무나도 선명했다.

“저는 황실의 일원이 되어 그 자격을 증명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그런데 기본적인 원칙조차 지키지 않는 분에게 힘이 되어 달라 애원할 생각은 없습니다.”

원칙.

그제야 모두 떠올릴 수 있었다.

힐리아가 처음 들어와서 한 말을.

“전 아르파드 전하의 아내로서, 황태자비입니다. 제가 먼저 예의를 갖추어야 할 여성은 황후 폐하뿐이지요.”

그러니 대공비가 먼저 황태자비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맞다.

이건 어떤 정치적인 견해나 입장이 개입되지 않는 객관적 사실.

힐리아는 담담하게 말을 맺었다.

“저는 아직 누구와도 인사를 나누지 못하였으니, 아무와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내내 굳어 있던 대공비의 입술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면… 제 도움이 필요 없으시다는 겁니까?”

대공비가 처음으로 존대를 입 밖으로 내었다.

나는 짜릿함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걸 느꼈다.

‘됐다!’

하지만 절대 티를 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대공비의 질문에 솔직하게 대꾸했다.

“네, 필요합니다. 아주 간절히요.”

어차피 내게 악시온 대공비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러니 아니라고 거짓말해 봤자 더 우습게 보일 뿐이다.

대공비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런데 왜 저를 내치시려는 겁니까?”

나는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저는 누구도 내친 적이 없습니다. 이곳에 와서 누구와도 만난 적이 없으니까요.”

아직 대공비는 나에게 예의를 표하지 않았고, 그렇게 보면 우리는 인사도 하기 전이다.

억지로 우긴다면 누구도 만난 적 없다는 내 말은 틀리지 않다.

결국 내 주장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똑같았다.

‘당신이 날 거두는 게 아니라, 내가 당신을 거두는 거야.’

이건 나이가 많든 적든, 누가 사적으로 어른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힘과 서열의 논리.

그리고 방계 황족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황태자비가 황후와 싸워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대공비가 한숨을 쉬었다.

“이 나이 되어서 이리 어린아이에게 한 방 먹을 줄은 몰랐는데.”

나는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애니에게 말했을 뿐.

“어서 배웅할 준비를…….”

대공비는 싸늘하게 대꾸했다.

“되었다.”

그리고 천천히 앉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는 불안감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설마 진짜 가려는 건 아니겠지? 그랬다간 완전히 망하는데.’

하지만 불안감을 겉으로 티 내지는 않았다.

굳은 확신이 하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절대 대공비가 이대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걸 말이다.

솔레누 영애에게 전해 달라고 한 건 한마디였다.

“록셀린 황후 폐하의 죽음에 아무런 의혹이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딸을 잃은 어머니라면 절대 이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내내 칩거하던 대공비가 절대 발걸음 하지 않던 수도에 온 것 자체가 답이었다.

그래서 나는 태연한 척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어난 대공비가 방을 나가지 않았을 때 놀라지 않았다.

그녀가 마침내 앞에서 무릎을 굽혀 예를 표했을 때도.

그 나이에도 시녀들의 도움 없이 꼿꼿하고 위엄 있는 자태를 잃지 않은 채, 대공비는 나에게 인사를 올렸다.

“악시온 대공가의 마르티네가 황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비로소 나는 웃으며, 대공비와 ‘만날 수’ 있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악시온 대공비. 우리는 서로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내 승리였다.

그리고 이로써 제국 서부의 사교계가 내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 * *

“하아…….”

아르파드는 집무실 옆자리에서 땅이 꺼져라 한숨짓고 있는 율켄이 아주 거슬렸다.

독설을 날리면 날렸지 한숨을 흘리는 건 성격상 어울리지 않기도 했거니와.

“하아아… 비 전하…….”

한숨 뒤에 붙은 저 호칭이 거슬렸다.

‘왜 혼잣말로 힐리아를 부르고 있는 거지?’

율켄이 올리는 모든 서류에 반려를 때린 것이 얼마 전이다.

그런데 율켄이 다시 그의 심기를 박박 긁고 있었다.

율켄이 넘겨준 서류를 반으로 갈라 내던지려던 아르파드의 손이 멈췄다.

서류 제목을 봤기 때문이다.

-아르타누스 홀 연회를 위한 전체 예산 배정 요청서.

-연회에 필요한 물품을 위한 수송선 대여 절차 및 필요 예산안.

-황태자궁의 정원 및 외부 통로 공사를 위한 예산 배정 요청서.

-…인건비…….

…등등.

“…….”

당연히 연회 준비를 주도하고 있는 건 힐리아였다.

그러니 이 예산안 서류도 힐리아를 위해, 혹은 그녀의 명령으로 올라온 것일 터다.

율켄이 거슬린다고 이 서류를 반려시킬 수는 없었다.

‘아르타누스 홀의 연회는 나에게도 중요하니까.’

그렇다.

황후를 꺾고, 황제에게 인정을 받아야 했다.

‘그래야 힐리아가 정식 황태자비로 인정받을 수 있어.’

그러고 나면, 누구도 힐리아가 그의 아내라는 걸 부정 못 하게 될 것이다.

“?”

아르파드는 잠시 의아했다.

자신의 생각 흐름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이러면 내 입지를 다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힐리아가 황태자비로 인정받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걸로 오해하기 딱 좋은데?’

곧 아르파드는 생각을 정리했다.

어쨌든 힐리아가 황태자비로 인정받는 건 황태자인 그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부부는 한 몸이니까.

‘그래. 그리고 힐리아가 황후 견제도 잘해 주고 있고 말이지.’

그렇다. 그뿐이었다.

아르파드는 이상하게 느껴지는 생각을 다잡으며 서류에 황태자의 직인을 찍었다.

황태자궁의 모든 여유 예산을 아르타누스 홀의 연회 준비로 돌리는 서류였다.

그때, 다시 한번 율켄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하아아아… 비 전하… 너무…….”

결국 아르파드는 참지 못했다.

쿵!

집무실 테이블을 내려치면서 율켄에게 짜증을 냈다.

“아까부터 자꾸 무슨 혼잣말을 지껄이는 거지?”

율켄은 의아했다.

“예? 왜 그러십니까? 저는 그냥 개인적인 일에 대한 한탄을 혼자 한 것뿐…….”

“개인적인 일인데 왜 힐리아가 나와?”

그러자 율켄이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아아, 그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그렇답니다.”

“의미심장하게 말 줄이지 말고 제대로 말해!”

율켄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전하께선 평소에 제 개인적인 일에는 관심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다. 율켄은 말이 아주 많았다. 대화는 그에게 큰 즐거움이었다.

당연히 사적인 얘기도 아주 많이 했는데, 아르파드는 매번 매몰차게 면박을 주곤 했다.

“여긴 네 직장 아닌가? 일 얘기만 해.”

“나는 신하의 사생활에는 전혀 관심 없다.”

아르파드는 이번에도 단언했다.

“그건 지금도 똑같아. 네 사생활 따위 알 바 아니다.”

“그런데 이번엔 왜……?”

“이미 말하지 않았나? 네가 힐리아를 언급하니 묻는 거다.”

“…….”

율켄은 잠시 침묵하면서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물었다.

“요즘 좀 이상한 거 아십니까, 전하?”

“뭐가?”

아르파드는 짜증이 확 났다. 하라는 대답은 안 하고 헛소리를 하는 신하가 아주 마음에 안 들었다.

안 그래도 며칠 전에 힐리아가 자기를 좋아하니 어쩌니 헛소리를 했던 놈이…….

그때 율켄의 헛소리가 아르파드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요즘 전하께선 꼭 첫사랑에 정신 못 차리는 애새… 아니, 애송이처럼 구시는 거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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