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악시온 대공비 마르티네는 선황후 록셀린의 어머니이자, 아르파드에게는 외조모가 된다.
그러니 나에게는 시외조모가 되는 셈이다.
그녀에게 인사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렇게 은밀한 자리를 만든 건 당연히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다.
‘비밀리에 접선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이 만남이 황후나 에반젤린에게 들켜서는 절대 안 된다.
이세핀은 부모와 조부에게 디자이너 일을 하는 것을 전혀 이해받지 못했다.
이건 사실 악시온 대공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고귀한 귀족이 직접 천을 마름질하는 천한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들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솔레누 후작이나 소후작 부부와 달리, 대공비는 이세핀에게는 조금 더 너그러웠다.
아마도 일찍 남편을 잃고 딸마저 잃은 처지라, 이세핀을 더욱 귀여워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면서 정작 외손자인 아르파드와는 소원하다는 게 오묘하지만…….’
그리고 그 사실에 아르파드는 별 불만이 없어 보였다.
내가 솔레누 후작 영애를 통해 대공비에게 접근할 예정이라고 말했을 때.
말리거나 불편해하지 않고, 그저 웃으며 말했기 때문이다.
“응원하도록 하지. 쉽진 않을 거야.”
…딱히 조언해 준 것도 아니었다.
‘아르파드야 늘 그렇지.’
어쨌건 솔레누 영애를 통해 대공비에게 접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영애는 정기적으로 대공비에게 인사를 가는 게 당연한 입장이었으니까.
나는 솔레누 영애에게 한 마디를 전해 달라고 했고, 그것을 들은 대공비가 비밀리에 수도까지 행차한 것이다.
‘그래, 지금부턴 내가 어떻게 하는가에 달렸어.’
방문이 닫히고, 시녀 중 하나가 엄격하게 말했다.
“악시온 대공비 전하이십니다. 예의를 갖추시지요.”
일견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어쨌건 악시온 대공비는 황실의 웃어른이었고, 나에게도 사적으로는 시어른이 되니까.
하지만 어떤 상황보다 우선하는 게 있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숙이지도, 무릎을 굽히지도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되니까.
“그건 제가 델핀 공녀였을 때의 이야기지요. 지금 전 아르파드 전하의 아내로서, 황태자비입니다. 제가 먼저 예의를 갖추어야 할 여성은 황후 폐하뿐이지요.”
이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황태자비는 황실 내 여성 중 의전 서열 2위였으니까.
황녀가 있더라도 황태자비가 우선이다.
그러니 선황의 남동생인 악시온 대공의 비는 나보다 의전 서열이 아래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렇게 말한 셈이다.
‘먼저 무릎을 굽혀야 하는 건 대공비 당신이다.’
그러자 상석에 앉아 있던 노부인이 미간을 찡그렸다.
위엄 넘치는 목소리가 울렸다.
“부러 이 늙은이를 먼 곳까지 청하여 놓고, 무릎을 굽혀 인사하라?”
쯧쯧, 혀 차는 소리가 이어졌다.
“정식으로 황태자비로 인정받지도 못하였으면서 오만하기 짝이 없군.”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은 당신에게 들을 일이 아니야.”
“…뭐?”
“당신은 대공비 전하가 아니니까.”
중앙에 앉은 노부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나는 그녀를 무시한 채, 그 뒤에 서 있는 시녀들에게 다가갔다.
정확히는 그중 가장 안쪽에 뻣뻣하게 선 마른 인상의 노부인에게.
그녀의 얼굴은 자세히 뜯어보면 얼핏 아르파드와 닮은 부분이 있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악시온 대공비 전하.”
그러자 노부인의 검푸른 눈동자가 경탄과 즐거움으로 잘게 떨렸다.
* * *
물론 내가 대공비를 알아본 이유는 간단했다.
‘전생에 얼굴을 본 적 있으니까.’
스치듯 지나간 것이 전부였지만 워낙 인상에 남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만난 장소가 아르파드의 장례식에서였으니까.’
대공비는 하나 남은 혈육의 장례식에서도 눈물 한 방울 비추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그녀의 등장을 놀라워하는 와중에 엄청난 짓을 저질렀는데.
짜악―!
바로 황제의 뺨을 후려쳤던 것이다.
당연히 주변인들은 경악하고 분노했으나, 황제는 초연했다.
당연한 벌을 받는 것처럼.
외손자의 관을 확인하지도 않고, 대공비는 차가운 말 한마디만을 남기고 돌아갔다.
“결국, 발터 너는, 단 하나도 지키지 못했구나.”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던 그때의 나도 이것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그때 황제의 표정은 정말로 모든 걸 다 잃은 사람의 것이었다.
내가 2회차 때 보았던 망가진 황제의 모습은 그 일을 기점으로 완전히 무너져 버린 것이리라.
어쨌건 지금 아르파드는 살아 있고, 황제도 무너지지 않았다.
대공비가 황제의 뺨을 후려칠 일도 없다.
아직은.
대공비의 맞은편에 준비된 의자에 앉으며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사이, 나에게 정체를 들킨 대공비는 재밌다는 듯 웃으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가운데 소파에 앉아 있던 노부인이 더없이 정중하게 대공비를 앉혔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다른 시녀가 은사로 자수가 놓인 회색 비단 숄을 둘러 준다.
그것만으로도 대공비의 인상은 아주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는 정말 시녀 같았는데, 지금은 아무리 초라한 옷을 입고 있어도 절대 시녀로 착각할 수 없을 정도로 박력이 넘쳤다.
대공비는 다리를 모로 꼬며 물었다.
사람을 고압적으로 내려 보는 움직임은 외손자와 아주 비슷했다.
“어떻게 알았니?”
나는 솔직하게 일부만 대답했다.
“그야 아르파드와 닮으셨으니까요.”
“글쎄. 그 애와 내가 외모가 많이 닮진 않은 걸로 아는데. 오히려 아르파드는 제 아비를 너무 닮았지.”
목소리에 불만이 넘쳤다.
적어도 대공비는 아르파드가 딸이나 자신을 닮지 않고 사위를 닮은 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 생각보다 훨씬 닮으셔서 알아보기 쉬웠어요. 특히 눈매가 비슷하시고, 몇몇 행동은 놀랄 정도로 비슷하셨는걸요.”
내 말이 기분 나쁘진 않았나 보다.
대공비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곧 그녀의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래. 아르파드가 알려 줬든, 혹은 이세핀이 내 명을 거역하고 미리 인상착의를 알려 주었든…….”
“저는 절대 그러지 않았습니다, 고모할머님!”
이세핀은 놀라서 변명했다.
그러자 대공비는 미간을 찡그렸다.
“내 말을 가로막지 말거라.”
“…죄송합니다.”
이세핀은 송구해하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아르파드와 대공비의 닮은 점을 하나 더 알았다.
‘사교계의 폭군인 건가. 서쪽 사교계의 폭군.’
하긴 황후에 대항해 제국 내 사교계를 반쪽 낼 수 있는 사람이 보통 성격일 리 없다.
“사실이 어쨌든 네 눈썰미가 좋은 것으로 하자꾸나.”
“실제로 그런 것이니까요.”
나는 뻔뻔하게 웃었다.
대공비의 실소가 커진다.
“하지만, 아가. 넌 아직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게 있구나.”
저 ‘아가’라는 호칭의 뉘앙스는 미묘했다.
나를 손자며느리로 인정해서 부르는 게 아니라, 하찮은 애송이로 낮추어 부르는 느낌.
“네가 정말 황태자비라도 되었다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니니?”
“착각이 아니라, 전 이미 황태자비입니다. 아르파드 전하와 혼인했으니까요.”
“아르파드가 약탈혼을 벌였다는 걸 들었을 때, 드디어 올 게 왔나 했단다.”
역시 반응은 다들 비슷한 모양이다.
“완전히 미쳐 버린 건가 했지.”
새삼 나를 약탈혼해 오는 게 아르파드 입장에선 꽤 큰 결심이었구나 싶어진다.
‘음, 조금 미안…하지 않아! 어차피 내가 살려 주고 황제 만들어 줄 건데, 뭐!’
“하지만 아니라는 건 곧 아셨겠죠.”
“그래. 광증으로 미쳐 날뛰는 건 아닌 것 같으니까.”
“안심하셨겠네요.”
대공비는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아니. 오히려 너무 실망했단다.”
그리고 씹어뱉듯이 말했다.
“제정신이면서 루드비히 같은 반편이 따위가 3년 넘게 끼고 있던 여자를 주워 오다니.”
“…….”
“차라리 미쳤다면 동정이라도 하겠지. 그것도 아니니.”
쯧, 하고 혀를 차는데 아까 대공비인 척한 시녀보다 파괴력이 더 강했다.
이건 예상보다 조금 강한 폭언이다.
마치 일부러 내 화를 돋우려는 것처럼 표현이 과하다.
화가 난 건 아니지만, 놀라는 건 어쩔 수 없다.
물론 심리적인 동요를 티 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데려온 애가 제 주제도 모르고 내 앞에서 황태자비에게 예를 갖추라느니, 헛바람 든 소리만 지껄이고 있다니…….”
그녀의 검푸른 눈동자가 나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내 반응을 분석하고 있는 거다.
“네가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다면, 황태자비니 뭐니 주장하니 전에 스스로 사라져 주는 게 아르파드에겐 차라리 도움이 될게다.”
그녀는 미간을 짚으며 손을 휘저었다.
“이렇게 멀리 와서 부러 볼 필요도 없었구나. 실망했다. 어서 내 눈앞에서 저걸 치워라.”
그러자 이세핀은 당황해서 조금 전에 한마디 들은 것도 잊고 끼어들었다.
“대, 대공비 전하?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대하시는 건…….”
“그만 입 다물지 못하겠니.”
짐짓 머리 아프다는 듯하면서도 대공비는 여전히 내 반응을 관찰 중이었다.
결론은 빠르게 나왔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냉큼 고개를 끄덕인 다음, 명령했다.
“손님이 가신다는군. 배웅하도록 해.”
대공비의 폭언에 원망스러운 표정을 하던 애니마저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비, 비 전하?”
“방금 뭐라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세핀과 대공비의 시녀들도 경악했다.
나는 이세핀을 안심시켰다.
“걱정 말아요, 솔레누 영애. 이번 일이 실패했어도, 내가 일전에 약속한 건 지킬 테니까요. 황태자궁에서 다시 보도록 하죠.”
“네, 네?”
나는 웃으며 이세핀에게 명령했다.
“그러니 안심하고 대공비 전하를 모시고 돌아가세요.”
고개를 돌렸을 때 대공비의 표정은 전에 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나더러 나가라?”
“예. 이곳은 아르파드 소유의 안가이니, 손님께서 돌아가셔야죠.”
집이 마음에 안 들면 손님이 떠나야지, 집주인더러 가라는 건 말이 안 되지.
내 태연한 대답을 들었을 때, 분노로 붉으락푸르락해야 정상인 대공비의 얼굴에 처음으로 부드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꽤 배짱이 있는 아이구나.”
…피라는 건 참 신기했다.
얼굴도 안 보고 산 외조모와 손자가 이렇게 비슷하다니.
아니면 오만하게 남을 시험하는 게 황족의 종특인 걸지도 모르고.
대공비는 작게 감탄했다.
“왜 아르파드가 널 선택했는지 알겠어.”
나는 여전히 희미한 웃음을 띤 채 대꾸했다.
“먼 길 조심해서 돌아가시길. 저는 따로 배웅하지 않겠습니다.”
“뭐?”
대공비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금이 갔다.
나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채 웃었다.
‘시험하는 건 그쪽만이 아니랍니다.’
대공비는 그걸 미처 몰랐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