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아르파드나 황후가 반응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외쳤다.
“저를 이렇게 환영해 주시다니, 정말 기뻐요! 황후 폐하!”
동시에 황후가 내민 손을 덥석 잡았다.
덕분에 황후가 기겁하는 얼굴을 코앞에서 볼 수 있었다.
“…?!”
‘아르파드의 손은 내 거라고!’
지금 이걸 황후에게 뺏기면 내 체면이 뭐가 되는데!
하다못해 이런 일은 적어도 내가 황태자비로 인정받은 후에 있어야 한다.
지금 황후에게 뺏겼다간 연회 시작도 전에 지는 꼴이 될 거다.
그래서 지금 나는 억지로 우긴 셈이다.
황후가 아르파드에게 에스코트를 강요하기 위해 손을 뻗은 걸…….
‘황후가 며느리를 환영하기 위해 손을 내민 걸로!’
진짜 의도가 어떤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황후의 선빵을 긍정적으로 해석해서 먼저 우겼다는 게 중요했다.
‘원래 웃는 얼굴에는 침 못 뱉는 법이지.’
게다가 내가 좋게 해석해 줬는데, 여기서 대놓고 그게 아니라고 대응해 버리면 황후만 우스워진다.
아랫사람 앞에서 배포를 보여야 하는 입장이 황후인데 말이다.
‘사실 우리보다 먼저 입장해서 아르파드에게 에스코트를 요구한 것도 여러모로 전례랑 반대이기도 하고.’
그때, 옆에서 웃음을 삭이고 있던 아르파드가 한발 늦게 지원해 줬다.
“며느리를 이렇게 반갑게 맞이해 주시니, 제가 더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
뿌드득! 황후의 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황후가 내 손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나와 아르파드 사이에 어깃장 놓으려 했다고 자백하는 꼴이니까.’
어쩔 수 없이 항복 선언이 나왔다.
“그래. 좀 더 얼굴을 볼 사이이니 어쩔 수 없구나.”
대충 ‘네가 황태자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얼마 안 남았다’ 정도의 대꾸인가.
여러 예상에 비하면야 아주 부드러운 편이다.
나는 해사하게 맞받아쳤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앞으로 계속 뵙게 될 테니까요. 황후 폐하!”
‘응. 그런 거 없어. 앞으로도 쭉 거슬리게 해 줄게.’
이 정도 대답이 된다.
황후는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녀가 나나 아르파드에게 더 험한 말을 할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
시종이 소리 높여 외쳤던 것이다.
“위대한 아르타누스의 대리인이자 지상의 통치자께서 드십니다.”
황제 등장.
문이 열리며, 아르파드를 20년쯤 묵히고 수염을 기르게 하면 이렇게 될 것 같은 황제가 나타났다.
‘물론 아르파드가 더 잘생기긴 했지만.’
그리고 나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다시 뵈어서 정말 기뻐요, 아바마마!”
아바마마.
이 충격적인 단어에 황족 넷 외에 시종들 수십이 들어찬 만찬장이 고요해졌다.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아버님!’ 하는 거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딱히 예에 어긋나는 일도 아니고. 좀 친근하게 군 것일 뿐이니.
특히 이렇게 가족만 모이는 자리라면 더더욱.
하지만 드문 일인 건 틀림없었다.
하긴 아르파드 성격을 보면 ‘아바마마’ 소리는 말문이 트일 때도 안 했을 거 같긴 하다.
‘혹시 내가 황제에게 아바마마라고 부른 첫 사람은 아니겠지?’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아바마마’로 황제에게 친근감을 어필한 다음.
황후의 마수로부터 아르파드를 지키느라 어쩔 수 없이 쥐고 있던 손을 아주 자연스럽게 넘겨주었다.
‘황태자비 에스코트는 황태자가! 그러면 황후 에스코트는 황제가 해야지!’
당황한 건지, 아니면 황제의 에스코트가 싫지 않았던 건지 황후는 거부하지 않았다.
덕분에 황제는 자연스럽게 황후를 에스코트하게 되었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그와 함께 나는 뒷걸음질 쳐서 아르파드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가 내 손을 덥석 잡는다.
나는 주변 눈치를 보며 아르파드에게 윙크했다.
‘어때요? 나 잘했죠?’
아르파드는 픽 웃는다.
최소한 부정은 아니라는 걸 알겠다.
조금 전 나와 아르파드에게 어깃장을 단단히 놓을 기세였던 황후는 아주 얌전해져 있었다.
하긴, 당연한가.
‘며칠 전 결혼기념일 행사에도 황제가 안 나타났으니. 아마 황제의 에스코트도 별로 못 받아 봤겠지.’
그리고 나는 볼 수 있었다.
황제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정면만 보고 있었는데 황후는 달랐다.
황제가 입장한 이후, 내내 남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역시…….’
그리고 연이어 내가 예상한 일이 벌어졌다.
스륵, 어쩔 수 없이 맞잡은 황후의 손을 황제가 아주 자연스럽게 놓아 버렸다.
“…!”
순간적이지만 황후의 얼굴에 좌절과 절망이 어리는 것이 보였다. 굴욕감은 그 뒤였다.
그녀는 곧 아무렇지 않은 듯 수습했지만, 바로 뒤를 따르던 나나 아르파드는 다 볼 수밖에.
이 부부는 오랜 짝사랑과 외면을 쌓아 온 관계였던 것이다.
아르파드는 익숙한 조롱의 말을 내 귀에 속삭였다.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의 히스테리는 꽤 추해.”
음. 역시 내 남편이지만 진짜 성질 나빠.
하지만 여기서 아르파드에게 뭐라고 할 마음은 안 들었다.
황후 이자벨은 에반젤린의 첫 번째 후원자였고, 가장 큰 뒷배다.
그리고 늘 딸을 위해 나를 처참하게 죽였던 당사자이기도 했다.
‘어쩌면 딸을 황후로 만드는 데에 그렇게 집착한 건 이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네.’
황제의 태도를 보면 이자벨이 황후 자리에 집착하는 것도 이해할 만했다.
‘본인이 제대로 된 황후 취급을 못 받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
그래, 그럴 수 있다.
그 때문에 남편을 원망하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나한테 피해가 오는 것까지 이해해 줄 필요는 없잖아?’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이 모든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전 생에서 봤으니까.’
* * *
2회차, 양위하고 거의 폐인이 된 황제가 변두리 신전에 있던 나를 찾아왔던 그때의 일이다.
황제는 절망 어린 고해를 나에게 한 후 다음날 바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 일주일 뒤 세상을 떠났다.
황제가 세상을 떠나기 전 찾아온 여인이 있었다.
바로, 황후 이자벨.
당시 황후 대관식을 앞두고 있던 에반젤린의 모친이자, 태후로서 권력의 정점에 있던 그녀였다.
나는 쓰러진 황제의 간호를 떠맡고 있었고, 덕분에 본의 아니게 그 말을 엿듣게 되었다.
이자벨은 지금보다 훨씬 나이 들고 지친 얼굴로 이름뿐인 남편을 내려다봤었다.
상복 같은 검은 드레스를 입고, 검은 베일을 길게 늘어뜨린 채.
내가 황후의 얼굴을 미리 알고 있지 않았다면, 알아보지 못했으리라.
그녀는 혼수상태인 황제의 침대 맡에 앉아 원망 어린 말들을 토해 냈다.
“결국… 당신은 마지막까지 날 봐주지 않는군요. 단 한순간도 나는 당신의 아내일 수가 없었네요.”
원망과 절망으로 얼룩진 검은 눈은 마치 피처럼 보이는 눈물을 후드득 쏟아 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가 당신의 황후예요. 그리고 내 딸은 진짜 황후가 될 거고. 그것만은 누구도 부정 못 해.”
문밖에 서 있던 나는 숨소리마저 죽여야 했다.
내가 엿들은 걸 안다면 반드시 죽일 테니.
어차피 얼마 못 가 암살당했지만 말이다.
“당신이 바라는 것처럼 록셀린의 곁에 묻히게 두지 않을 거야. 어차피 그 여자의 하나뿐인 아들을 당신 손으로 죽여서 면목도 없잖아요?”
그녀는 숨이 끊어지기 직전인 남편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당신이 한 번이라도 날 봐줬다면 이렇게는 안 했어.”
그러면서도 그녀의 떨리는 손은 차마 황제의 손을 건드리지 못했다.
“당신이 날 최소한의 아내 대우만이라도 해 줬다면… 적어도 아르파드까지 죽이진 않았을 거야.”
그녀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아르파드‘까지’.
황제가 잃은 다른 사람의 죽음에도 황후가 연관돼 있다는 의미다.
그때 나는 저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짐작이 갔다.
‘아르파드의 친모인 선황후 록셀린의 죽음도 우연이 아닌 거야.’
그리고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황제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절대 황후를 그냥 두지 않을 거다.
선황후에 대한 황제의 사랑은 매우 깊었으니까.
‘하지만… 증거가 없어.’
증거를 찾아낼 수만 있다면, 이건 내가 가진 황후에 대한 가장 강력한 패가 될 수 있었다.
증거는 없지만, 나에겐 확실한 심증이 있었다.
‘록셀린 황후는 광증으로 죽었어. 그리고 아르파드 역시 세 번 모두 그랬지.’
황실에 광증으로 죽은 이들이 많기에 가려져 있으나, 이건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본의 아니게 3회차에 드래곤의 혈통에서 일어나는 광증과 그것을 조절하는 법에 대해 아주 상세히 알게 되었다.
그러니 어느 정도 예상이 갔다.
‘저 여자가 어떤 방법으로 록셀린 황후와 아르파드를 죽였는지 알겠어.’
방법을 아니 황후가 이를 이용한 증거를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을 거다.
그를 위한 준비 역시 착착 진행 중이었다.
나는 속내를 숨긴 채, 방긋방긋 웃으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