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그러자 아르파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뭘 미남계로 뭉개고 넘어가려고 한다는 거지?”
나는 앙칼지게 대답했다.
“그, 다람쥐 말이에요!”
그러자 아르파드는 픽 웃는다.
“그걸 왜 뭉개고 넘어가지? 그럴 필요가 있나?”
“뭐라고요?”
변명할 이유가 있느냐는 말투에 그를 노려보았다.
“그야 그렇잖아. 난 잘못한 게 하나도 없으니, 굳이 상황을 대충 수습하고 넘길 필요가 없지.”
이 인간이!
내가 발칵 화를 내려는데, 아르파드가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
놀라서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사이 아르파드는 아주 논리적으로 말을 이어 갔다.
잠시 흠칫한 사이 나는 그에게 말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미 말했잖아. 그대가 주변의 주의를 끌어 달라고 했고. 나는 제일 효과적인 수단을 선택한 것뿐이야.”
“…하!”
“내가 주의를 제대로 못 끌어서 화를 내라는 거라면 이해하겠지만, 그게 아니잖아.”
아니라고 우기고 싶은데, 불가능했다.
사실이긴 했다.
주변의 주의를 끌어 달라는 내 요구를 그는 완벽을 넘어서 과도하게 이행했으니까.
아르파드는 픽 웃으며 결론을 내려 버렸다.
“역시 부끄러워서 앙탈을 부린 것뿐이잖나.”
“그게……!”
아니라고 해도 전혀 통할 것 같지가 않았다.
결국 나는 아르파드의 입에서 ‘잘못했다’ 그리고 ‘앞으로 안 그러겠다’ 라는 말을 얻어 내는 걸 포기했다.
내가 너무 큰 걸 바란 모양이다.
그래서 당당하게 선언했다.
“당신이 한 그대로 나도 되돌려 줄 거예요! 나중에 후회하지나 말아요!”
그러자 아르파드는 해사하게 웃었다.
“기대하고 있도록 하지.”
여유가 철철 넘쳐흐르는 게 아주 얄미웠다.
나는 다짐했다.
‘내가 꼭 저 여유 박살 내주고 만다! 꼭!’
저 인간이 수치심과 부끄러움에 떠는 꼴을 꼭 보고 말겠어!
내가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 사이, 아르파드의 웃는 얼굴이 또 훅 다가왔다.
“힉!”
딴생각하느라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기에 더욱 놀랐다.
숨결의 습기가 내 입술 위로 내려앉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너, 너무 가깝잖아…….’
다행히 아르파드는 그 이상 뭔가를 하지는 않았다.
손을 뻗더니 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대의 머리 색은 참 신기해. 벚꽃잎 같기도 하고, 솜사탕 같기도 하단 말이지.”
나는 겨우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다행이다. 키스하는 줄 알았네.’
아니었다. 안심하기엔 많이 일렀다.
아르파드는 내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배배 꼬더니 폭탄을 던졌다.
“그보다 내가 미남계를 쓰는 걸로 느껴진다는 건 말이야. 사실 그대가 내 외모를 그만큼 마음에 들어 해서, 내가 뭘 해도 미남계를 쓰는 것처럼 오해하는 거 아닌가?”
“…뭐라고요?”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당신은 내 취향 아니거든요.”
그러자 아르파드의 표정이 좀 진지해졌다.
“…그래? 그럼 그대의 이상형은 어떻지?”
오기가 치솟았다.
이번엔 절대로 휘말리지 않을 거다.
그래서 나는 부러 아르파드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을 골라서 말했다.
“우선 지나치게 잘생긴 건 부담스러워서 싫어요.”
“으음?”
아르파드의 미간에 주름이 갔다.
“잘생긴 게 싫다는 여성은 처음 보는군.”
“취향이라니까요, 취향! 그리고… 키는 당신보다 작고, 좀 더 다부지고 순한 인상에… 성실한 타입이 좋다고요!”
“…….”
그러자 아르파드는 여전히 구겨진 미간을 펴지 않고 고개를 갸웃갸웃하더니 물었다.
“그거… 그대가 내게 의뢰까지 해서 데려온 그 기사 아닌가?”
“…엥?”
아르파드와 다른 스타일을 골라 말한 것뿐이다.
그러면서도 지나치게 이상한 건 피해서 대충 말하다 보니, 이상하게 벨테인 경의 인상과 비슷하게 들린 모양이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아, 벨테인 경과 비슷한 건 그냥 우연이에요.”
“늘 묻는 거지만 별로 의미가 없는 변명이라고 생각 안 하나?”
“늘 하는 대답이지만, 변명이 아니라 그냥 사실대로 말하는 거라니까요.”
진짜 그렇다.
나와 벨테인 경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으니까.
‘아,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닌가. 기사의 맹세가 있으니.’
그저 맹세를 바친 충실한 기사와 레이디일 뿐이다.
그때였다. 아르파드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다시 물었다.
“정말로… 연인 사이가 아닌 건가? 그자와는?”
어쩐지 조심스럽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다니까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진짜 그런 사이면, 내가 굳이 감출 이유가 있겠어요?”
“…넘치지 않아? 일단 내가 정실인데.”
그놈의 정실 타령 좀 그만할 수 없나.
요즘 왜 저기에 꽂힌 건지 모르겠다.
나는 덤덤하게 사실만을 말했다.
“그야 우리는 계약 관계니까요. 나는 당신에게 연인이 있어도 상관없고, 당신도 나에게 연인이 있어도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 우리는 계약서까지 주고받은 관계였다.
나는 언젠가 아르파드에게 연인이 생길 걸 알고 있고, 그때가 되면 놔줄 준비도 되어 있었다.
아르파드가 벨테인 경에게 ‘애인’ 운운하는 건 특유의 빈정거리는 화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
나는 아르파드가 당연히 고개를 끄덕이거나 긍정의 대답을 할 줄 알았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록 그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나는 눈을 들어 아르파드를 올려다봤다.
“아르파드?”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내려다보는 아르파드는 뭐라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가 다시 뭐라 말문을 열기 전이었다.
아르파드가 불현듯 말했다.
“약속 기억하나?”
“…무슨 약속이요?”
“그때, 내가 그대를 약탈했던 때 우리가 했던 약속 말이야.”
설마 약탈혼 계약? 그런데 그건 전날 카타콤에서 아니었나? 계약서 쓴 건 별궁에서고.
아르파드의 부가적인 설명을 듣자 기억났다.
“그 기사를 두고 주고받은 약속 말이야.”
“…아!”
그때 유일하게 아르파드를 막으려 검을 뽑았던 이가 벨테인 경이다.
그에게 반역죄를 묻지 않는 대신, 나는 그가 원하는 걸 들어주기로 했었다.
‘에이, 그냥 잊어버리려고 했는데!’
깜빡하고 있었는데 아르파드는 아닌 모양이다.
‘하긴, 자기에게 유리한 약속이니 잘 기억하고 있겠지.’
그런 건 절대 잊어버릴 인간이 아니니까.
잡아떼도 별 의미 없을 듯했다. 그랬다가 괜히 아르파드가 벨테인 경에게 또 시비를 걸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요. 왜요? 나에게 뭔가 부탁하고 싶은 거라도 생겼어요?”
놀랍게도 아르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가 전혀 예상 못 한 요구를 꺼냈다.
“우리 단둘이 있을 때, 다른 남자 이야기하지 마.”
“…!”
나는 좀 놀라서 멍하니 아르파드를 보았다.
이건 꼭… 그거 같지 않나?
독점욕, 그런 거?
이 얼토당토않은 생각은 바로 부정했다.
‘에이, 그럴 리가!’
사실 어려운 부탁은 아니니 내 입장에선 이득이다.
나는 잽싸게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곧 이상한 걸 깨달았다.
“…그런데 먼저 벨테인 경 얘기 꺼낸 건 당신이거든요?”
그러자 아르파드의 눈이 동그래졌다.
“놀랍게도 그렇군.”
왜 이렇게 바보처럼 말하지? 안 어울리게.
아르파드는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갸웃하며 물었다.
어쩐지 애교스럽게 보이는 행동인데, 내 눈이 미쳤나?
“아, 그러면 내가 먼저 언급하지 않으면 내 앞에서 다른 남자 말할 생각은 없는 건가?”
“그렇죠.”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아르파드는 해사하게 웃었다.
이상할 정도로 소년 같아 보이는 미소였는데 왜 이렇게 만족스러워 보이는지 모르겠다.
의외의 모습에 내가 멍하니 있는 사이, 아르파드가 얍삽하게 말했다.
“그러면 이 요구 취소.”
“네? 뭐라고요?”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내가 먼저 언급하지 않으면 그대가 말할 일 없다면서. 그러면 굳이 귀한 요구권을 낭비할 필요 없겠지. 취소.”
이 치사한 인간아!
드래곤의 혈통에는 더러운 성격과 광증의 위험 외에도, 얍삽함까지 함께 흐르는 게 틀림없었다.
* * *
그리고 이틀 뒤.
투왈렛 룸에서 시녀들의 시중을 받다가, 검은 용병단이 보낸 편지를 하나 받았다.
내용은 간단했다.
「찻잎은 잘 옮겼습니다. 대가는 일전에 주신 것으로 충분합니다.」
아주 평범하고 아리송한 내용이었다. 중간에 누가 봐도, 해석할 수 없는.
당연히 암호다.
‘찻잎’은 솔레누 영애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 편지의 내용을 해석하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솔레누 영애가 내가 알려 준 방법을 통해 긍정의 대답을 해 준 거야.’
좋아.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차례였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