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에반젤린, 즉 빙의자는 원작을 미리 읽었다.
당연히 몇 가지 아주 중요한 비밀을 알고 있었는데, 그중 가장 비밀스럽고 위험한 사실이 바로 이거였다.
‘선황후의 광증 발발에는 황후가 연관되어 있어.’
바로 이 사실.
원래 황실에 내려오는 광증이 발발하는 요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저 황실의 피가 진할수록 광증을 앓을 확률이 높다는 것 정도.
선황후는 황제의 사촌으로, 상당히 진한 혈통을 타고난 황족이었다.
그 때문에 그녀가 광증으로 죽은 것은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녀의 아들인 아르파드가 어린 시절 미약한 광증의 전조를 보인 것도.
반면, 황제는 광증으로 크게 고생한 적이 없었다.
루드비히에게는 광증의 전조가 전혀 없었고 말이다.
이 때문에 황제가 루드비히를 잠시 눈여겨보았던 것이기도 했다.
이것만 보면, 황실의 광증 발발은 불운의 결과로만 보였다.
하지만 에반젤린만은 완전한 우연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황후는 황족의 광증을 도지게 만들거나, 악화시킬 수 있는 법을 알아.’
그렇다면… 어쩌면 광증을 약화하는 법도 알 수 있지 않을까.
빙의자는 이 가능성은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다지 복잡하게 머리를 쓰는 걸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원작을 끝까지 읽는 건데!’
게다가 그다지 좋아하던 작품도 아니라 대충대충 읽었었다.
원작의 정보를 모두 알고 있는 게 아니라는 약점이 행보를 여러모로 제한하고 있었다.
아르파드를 좋아하고, 루드비히를 경멸하면서도, 루드비히를 택한 것부터가 그 때문이었다.
루드비히는 원작 남주인공이니까.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 내에서 움직이길 원했기 때문에.
‘하지만 루드비히는 아니야.’
게다가 힐리아가 아르파드의 곁에 있는 걸 보고 있자니, 질투심으로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원작에서처럼 아르파드가 곁에 누구도 두지 않은 채 미쳐 죽는 걸로 끝난다면 괜찮다.
하지만 그 옆에 다른 여자가 있는 걸 보니 속이 뒤집혔다.
‘하필이면 그게 저 멍청이 힐리아라니!’
절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평소라면 절대 할 리 없는 질문을 황후에게 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황후는 속을 알기 힘든 캐릭터였다.
여러 비밀도 많았고.
그 때문에 그다지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빙의자는 도저히 참을 수 없이 초조해져 있었다.
그래서 직접 물어보는 모험을 시도한 것이다.
“…황족의 광증을 악화시키거나, 완화하는 방법, 어머니는 아시는 거죠?”
내내 원망과 질투, 광기로 들끓던 황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표정 없는 마네킹 같은 얼굴로 딸을 바라보던 이자벨이 물었다.
“…왜 그런 걸 묻니?”
“…….”
에반젤린 안의 빙의자는 긴장했다. 너무 초조해서 황후에게 물어선 안 될 걸 물은 게 아닐까?
“누가 너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했니?”
에반젤린의 손을 부여잡는 이자벨의 손톱 끝은 난동 끝에 부러져 있었다.
까칠한 손톱 끄트머리가 피부를 찔러서 따끔거렸다.
에반젤린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애쓰며 대답했다.
“전 어머니 딸이니까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어요.”
“…….”
이자벨은 속을 알기 힘든 표정으로 딸을 뜯어 보았다.
그렇다고 에반젤린이 간절히 바라는 정보를 알려 준 것도 아니다.
다만 이렇게 말할 뿐.
“그래. 넌 내 딸이지. 내 유일한 핏줄.”
“예, 어머니. 어머니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자식이에요.”
에반젤린은 두 손으로 이자벨의 마른 손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저에게도 알려 주세요. 어머니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게…….”
하지만 그 순간, 이자벨은 딸의 손을 뿌리쳤다.
“네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잊어버리렴.”
“어머니!”
“그런 게 가능했으면 지금껏 수많은 황족이 죽어 가는 걸 황실에서 그냥 뒀겠니? 망상이 지나치구나.”
황후 이자벨은 완전히 평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그녀는 덤덤히 시녀들을 불러 난장판이 된 방을 치우게 하고,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그리고 딸에게 전에 없이 차갑게 말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려무나. 네 할아버님께도 안부 전하고.”
“…예.”
이건 오늘은 황후궁의 에반젤린 방에서 자지 말라는 의미였다.
루스 후작저의 본인 방으로 돌아가라는 의미.
에반젤린은 루스 후작저에 있는 자신의 방을 가장 싫어했다.
가장 좋아하는 곳은 황궁의 방, 그다음이 델핀저의 방이었다.
하지만 빙의 후 몇 년간 에반젤린은 황후의 성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봐 왔다.
지금 황후는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그리고 전에 없는 경계의 눈으로 딸을 보고 있었다.
에반젤린은 굴욕감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네, 물러가겠습니다.”
‘책 속 캐릭터 주제에 진짜 내 어머니인 것처럼 굴다니…….’
하지만 당장은 어찌할 수 없었다.
* * *
솔레누 영애는 바로 나와 손을 잡겠다는 확답을 주진 않았다.
나 역시 재촉하거나 강요하진 않았다.
다만, 남들의 눈을 피해 언제든 나와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을 때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 속에서 일렁이는 욕망을 확인한 이상…….
‘시간문제일 뿐이야.’
그리고 다행히 솔레누 영애와 나의 접촉은 전혀 의심받지 않았다.
황후궁의 연회 도중 솔레누 영애가 사라진 것도, 찻물을 맞는 모욕을 당하고 몸을 피한 것으로만 여겨졌다.
워낙에 크고 충격적인 사건이 있는 와중이라 신경 쓰는 이가 거의 없었다.
이걸 두고, 저 황당한 인간은 자화자찬했다.
“전부 나의 희생 덕분이지. 안 그런가?”
놀랍게도 아르파드의 매끈한 얼굴에는 조금의 흠도 없었다.
아르파드가 황후궁에서 난리를 치더라도 누구도 강제로 끌어내지 못하니 흠 없는 거야 당연했지만…….
유달리 매끈매끈하고 광택까지 흐르는 건 좀 이상했다.
‘어쩐지… 크게 스트레스 해소해서 피부까지 더 좋아진 것 같은데 내 착각일까?’
아르파드는 무려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해서 불행히도 내 예측이 맞다는 걸 증명해 주었다.
“아, 오랜만에 아주 재밌었어.”
“…나는 별로 안 재밌었어요.”
그러자 아르파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솔레누 영애와 이야기도 잘됐다고 하지 않았나? 방해도 안 받았을 거고.”
“그거야, 그렇죠.”
“그게 전부 누구 공인가 말이야!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아? 절대로 그대에게 주의가 가거나 들킬 일 없도록 최선을 다했다고!”
최선을 다하긴 했다.
너무 다해서… 수치심만 내 몫으로 두고 혼자 즐겼지.
나는 결국 대놓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굳이, 굳이… 그런 표현을 써야 했어요?”
“무슨 표현?”
순진무구한 척, 모르는 척을 하는 태도가 아주 얄미웠다.
“그… 그 단어 있잖아요! 그 동물!”
“내가 무슨 표현을 했다는 건지 정말로 모르겠군.”
아르파드는 빙글빙글 웃었다.
“그대가 직접 말해 주면 기억이 날 것도 같아.”
이건 200% 다 알고 저러는 거다!
결국 나는 얼굴과 머리 색이 비슷해지는 수치심 속에서 외칠 수밖에 없었다.
“그놈의… 다람쥐 소리 말이에요!”
그러자 아르파드는 환하게 웃으며 황후궁 정원에서 듣는 이들을 경악으로 빠트린 말을 반복했다.
“아, 나의 아기 다람쥐 말이군.”
방금 ‘아기 다람쥐’만 크게 말했어, 이 인간!
S
일부러다! 이건 일부러가 틀림없어!
아르파드는 여전히 부드럽게 웃으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그게, 뭐? 효과는 아주 확실하지 않았나?”
너무 확실해서 문제였다.
‘확신하는데, 내일 아침이면 모든 황궁 사람이 날 볼 때마다 아기 다람쥐를 떠올릴 거야.’
원래 사교계에서 소문은 발이 빠르다.
특히 이런 일은 말할 것도 없다.
내일 이후 나를 볼 사람들의 눈빛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았다.
“굳이 그런 표현 쓸 건 없었잖아요! 좀 더 평범한… 아니지, 날 언급할 필요도 없었잖아요!”
그렇다. 내가 아르파드에게 부탁한 건 어디까지나 주의만 끌어 달라는 거였다.
굳이 나에게 저 낯부끄러운 애칭을 붙여서 사방팔방에 알릴 필요는 없었던 말이다!
내가 다시 한번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하자, 아르파드는 배를 잡고 웃었다.
“아하하핫! 그거 아나? 지금 그대 표정 정말 귀여워!”
그렇게 말하며 웃는 아르파드는… 정말이지 쓸데없이 잘생겼고, 재수 없었다.
상아의 침실 침대 위에서 데굴거리는 인간이 너무 밉살스러워서, 나는 옆구리라도 꼬집어 주려고 접근했다.
그런데, 한발 앞서 움직인 쪽은 아르파드였다.
두꺼운 근육으로 짜인 팔이 쭉 뻗어 나오더니 내 허리를 감싸 안아 휙 당겼다.
“윽!”
내 몸은 속절없이 아르파드의 품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야말로 ‘폭!’ 하고 안겼다.
내 머리통이 아르파드의 넓고 단단한 가슴팍에 부딪혔다. 남자의 가슴 근육이 쿠션 역할을 해 줬는지 별로 아프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쿠션감이 꽤 좋았다.
게다가 드래곤 혈통이 체온에도 영향이 있는지 그는 몸 전체가 뜨끈뜨끈했다.
손발이 차가운 나로서는 온기를 찾아들게 되는데 아주 딱 좋게 따끈했다.
귓가를 두드리는 느린 심장 소리까지 합쳐져서 그야말로 촉감, 온도, 소리까지 총체적으로 아주 좋은 베개…….
‘아니, 이게 아니지!’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아르파드에 대한 취조를 계속 이어 가려 노력했다.
“이번엔 미남계로 대충 뭉개고 넘어가려는 거 그냥 안 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