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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49화 (49/210)

49화

시녀들이 따뜻한 차와 다과를 내왔다.

나는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그야 곤경에 처한 숙녀를 돕는데 이유가 굳이 필요할까요?”

하지만 이세핀 솔레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조금 전에는 아니었다는 건 잘 압니다.”

“어째서요?”

덤덤하던 이세핀의 눈빛이 약간 먼 곳을 바라보는 듯 아련해졌다.

“그야 황태자 전하께서 그렇게 눈에 띄게 주의를 끌고 계셨으니까요.”

“…….”

도저히 아니라고 말 못 하겠다.

내내 덤덤한 표정이던 이세핀 영애는 지금만큼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푸흡, 아기 다람쥐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나는 쥐구멍, 아니, 다람쥐 구멍이라도 있으면 달려가서 숨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제발 그 얘긴 하지 말아 줘요.”

“크흡.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은근슬쩍 묻는 건 포기 안 했다.

“그 호칭이 합의되신 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할 리가 없잖아요!”

다람쥐라니!

그것도 아기 다람쥐라니!

게다가 아르파드가 무려 황후 앞에서 떠들어 댔다.

이제 내일이면 수도의 모든 귀족이 진짜 내 애칭이 아기 다람쥐인 걸로 아는 거 아냐?

진짜 왜 하필이면 다람쥔데?!

당장에라도 아르파드를 잡아다가 짤짤 흔들며 물어보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럴 때가 아니지.

나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리려 노력했다.

‘정신 차리자. 지금은 그런 것에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야. 다람쥐건 토끼건 중요하지 않다고!’

눈앞에 있는 이세핀 솔레누 영애가 중요하지.

나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차를 한 입 마시며 권했다.

“우선 좀 마시세요. 몸이 따스해질 거예요.”

아무리 봄이라 해도, 야외에서 몸이 젖었던 사람이다.

따뜻한 차로 체온을 올리는 게 좋을 듯했다.

당연히 차 종류는 아까 에반젤린이 뿌린 꽃차가 아닌 다른 것이었다.

솔레누 영애는 순순히 차를 마시며, 내가 제대로 꺼내지도 않은 본론을 먼저 입에 담았다.

“혹시 아르타누스 홀의 연회 때 제게 도움을 청하려고 하시나요?”

나는 웃으며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야 제 고모할머님이신 대공비께서 아르파드 전하의 외조모이시니까요.”

솔레누 영애는 아주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게다가 서부 사교계가 대공비 전하 때문에 통째로 중앙 사교계와 등진 건 유명하죠.”

하나하나 무거운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세핀은 여전히 덤덤했다.

사실 사교계에 몸담은 이들이라면 다들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인데 말이다.

단순히 사교계의 알력만이 아니라, 황위 계승 문제도 얽혀 있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무뚝뚝하게 사실을 나열했다.

“비 전하께서 서부 사교계를 끌어오시려면, 저에게 손을 내미시는 게 당연하니까요.”

“하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겠죠.”

이세핀은 특유의 힘 빠지는 어조로 단언했다.

“하지만 제게 그걸 원하신 거면 잘못 생각하셨어요.”

나는 놀라지 않았다. 저런 말이 나올 것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질문은 했다. 대화는 이어가야 하니까.

“어째서요?”

“저는 집안에서 내놓은 자식이니까요.”

보통 이런 말을 할 때면 조금은 망설이거나 부끄러워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세핀 솔레누는 전혀 그런 기미가 없었다.

그저 있는 사실을 나열하는 것에 불과했다.

“후작이신 할아버님의 진노를 샀거든요. 저를 중앙 사교계로 보내신 것도 사실상 내쫓으신 거예요.”

게다가 그녀는 아까 에반젤린이 차를 뿌려 옷이 망가지는 상황에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모욕적이라 느끼지도 않았다.

내가 바로 빼 오지 않았다면 덤덤한 모습을 보고 에반젤린이 더 분통 터져 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녀는 끝까지 거의 고저 없는 어투로 자신의 사정을 설명했다.

“황후가 장악한 중앙에서 받아들여질 리 없으니 망신이나 당하라고요. 저는 적당히 망신당하고 나면 이제 서부로 돌아가 수도원으로 들어가야 할 거랍니다. 그러니 도움을 드릴 수 없는 처지입니다.”

이건 사실 명문가의 귀족 영애에게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지나칠 정도로 시큰둥했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지.’

거기에 왜 영애가 후작의 눈 밖에 났는지, 게다가 미래에 어떻게 될지도.

내 미소를 보고 솔레누 영애는 처음으로 조금 놀란 듯 입을 벌렸다.

“비 전하께선 안 놀라시는군요?”

“예.”

“혹시 미리 알고 계셨나요?”

“맞아요.”

잠시 미간을 찌푸리고 고민하던 그녀는 간단히 결론을 내렸다.

“아르파드 전하의 정보망이 대단한 모양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실제로 율켄을 통해 솔레누 영애의 정보를 얻기도 했으니까.

서론은 이쯤이면 충분했다.

나는 슬슬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솔레누 영애. 저는 당신에게 아르타누스 홀의 연회를 도와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부른 게 아니에요.”

“하면 뭘 부탁하기 위해 부르신 건가요?”

물어보면서도 별로 궁금하지 않은 듯했다.

여전히 시큰둥.

나는 저 덤덤한 표정이 깨질 순간이 너무 기대됐다.

“오히려 제가 당신에게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 부른 거예요. 솔레누 영애.”

여기까지 솔레누 영애는 그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내 이어진 한 마디에 그녀를 갑옷처럼 두르고 있던 무덤덤함의 외피는 박살 났다.

“아니, 솔레누 영애가 아니죠. 리타 모건.”

“!!!”

내내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여자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떤 일에도 시큰둥하기만 하던 푸른색 눈에는 늘 안개가 낀 듯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안개는 깨끗하게 개어 있었다.

나는 알고 있는 정보를 마저 말했다.

“서부에는 꽤 이름이 알려진 모건 의상실의 주인이죠? 왜 가게를 갑자기 닫았어요?”

나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다리를 꼬았다.

빈 찻잔에 애니가 다시 차를 따랐다.

이번에는 진한 보라색 액체가 흰 잔을 채웠다.

청보라색의 샤링가 꽃잎들이 찻물 위에서 찰랑거렸다.

내가 ‘리타 모건’이라는 존재를 알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회귀 전, 서부에서 가장 유명했던 의상점의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중간에 잠시 가게를 닫고 사라졌다가, 몇 년 뒤 다시 나타나 서부 사교계 유행을 휩쓸었다.

혁신적으로 아름다운 디자인만을 한정된 양으로 생산했기 때문에 중앙 귀족들조차 그녀의 옷을 간절히 원했을 정도다.

리타 모건의 전성기에는 사교계 양분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리타 모건은 병으로 사망했다.

전성기는 겨우 2년여.

이후 리타 모건 아래서 일하던 재봉사들의 입으로 정체가 알려졌다.

리타 모건이 사실 명문 솔레누 후작가의 영애 이세핀이었다는 게 그때 밝혀진 것이다.

‘그건 진짜 엄청난 스캔들이었지.’

의상 디자이너나 재봉 일은 귀족 영애, 그것도 명문가의 여식이 할 일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비밀리에 활동하다가 결국 그녀는 집안에 들켰던 것이다.

그래서 타의로 가게를 접고 수도원으로 들어갔다가 얼마 뒤 병을 얻게 된다.

수명이 얼마 안 남았음을 깨달은 솔레누 영애는 수도원을 박차고 나와 가문의 방해도 무시하고 하고 싶은 일에 매진했다.

내내 방해했으면서도 마지막 2년 동안 솔레누 가문에서도 딸을 막지 못한 건, 아마 그녀의 수명이 얼마 안 남았음을 알았기 때문이었으리라.

이러한 사정 때문에 리타 모건, 즉, 이세핀 솔레누는 미래에 전설이 되었다.

남긴 작품의 수도 적었기에 하나하나가 엄청난 가치를 가졌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특징이 있었는데 리타 모건은 에반젤린 혹은 그녀와 친한 이들에게는 절대 드레스를 만들어 주지 않았다.

‘이것 때문에 에반젤린이 미친 듯이 화를 내서 기억하기 쉬웠지.’

그리고 그 이유 역시 나는 알고 있었다.

‘바로 오늘 에반젤린에게 당한 모욕 때문인 거야.’

이 지극히 덤덤해 보이는 여자는 사실 영혼을 불태울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한 번 당한 모욕은 잘 잊지 않는 뒤끝이 긴 사람이기도 했다.

솔레누 영애는 나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다시 물었다.

“그걸 어떻게 다 아시는 거죠? 아, 아르파드 전하의 첩보가 거기까지 닿나요?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정보인데.”

“그럴 만한 가치가 왜 없어요?”

이 말에 혼란에 빠져 있던 솔레누 영애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어떤 가치가 있단 말씀이죠?”

“아주 큰 가치가 있죠. 나는 ‘리타 모건’의 능력을 알거든요.”

단 2년뿐이었지만, 그녀는 전설이 되었던 인물이다.

일찍부터 재능을 펼칠 수 있다면 당연히 더 크게 이름을 날릴 수 있었을 거다.

“난 지금 이세핀 솔레누 영애에게 묻는 게 아니에요. 리타 모건이라는 디자이너에게 묻는 거지.”

“무엇을…요?”

나는 테이블에 둔 부채를 들어 올려 한 번에 펼쳤다.

내 얼굴을 가렸던 부채가 아래로 내려가며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나는 눈매를 반달처럼 접으며 물었다.

“아르타누스 홀의 연회 주인공이 입을 드레스. 직접 만들어 보고 싶지 않아요?”

“…!”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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