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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48화 (48/210)

48화

내가 하려던 일은 간단했다.

수치심을 모친 배 속에 두고 온 것 같은 아르파드의 방해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저 평범하게, 심기 불편한 에반젤린에게 모욕당한 솔레누 영애를 눈에 안 띄게 빼돌리려던 거였다.

그리고 미로 구석에서 나는 기다리던 장면과 조우했다.

“어머. 솔레누 영애가 이 먼 곳까지 어쩐 일일까.”

“아, 혹시 가문의 잘못을 드디어 뉘우치고 빌 생각이 들었어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루스 후작 영애.”

솔레누 영애는 아주 덤덤하게 대답했다.

“전 그저 오랜만에 수도에 올라와 초대장을 받은 파티에 발걸음 했을 뿐이에요.”

“어머. 뻔뻔해라. 그대의 부모님이 황후 폐하께 얼마나 무례했는지 여기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서부에는 제국의 역사보다 오래된 전통을 가진 대가문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 중 가장 앞에 선 가문 중 하나가 바로 솔레누 후작가다.

당연히 그 유일한 영애인 이세핀 솔레누는 오랜만에 중앙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면 환영받아야 마땅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녀에게 아주 적대적이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황후와 솔레누 후작가가 척을 졌기 때문이지.’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황후와 악시온 대공비가 척을 진 것이다.

그리고 솔레누 후작가는 악시온 대공비의 친정이었다.

‘10여 년 전 대공비와 황후의 갈등 때, 서부 전체가 똘똘 뭉쳐서 황후에게 대항했지.’

그 결과 중앙 사교계와 서부 사교계가 아예 단절되는 사태까지 벌어진 것이다.

중앙 출신의 귀족 영애나 영식이 서부의 사교 활동에 참여하지 못하고.

서부 출신들이 중앙에서 데뷔탕트를 치르지 못하는 것이다.

누가 봐도 중앙 사교계를 장악한 황후의 승리로 보였으나, 서부에 워낙 역사가 오래되고 고귀한 가문들이 많았기에 상황이 좀 달랐다.

어찌 보면, 서부 전체가 황후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었다.

사교계의 일에 황제가 직접 개입하는 건 거의 없는 일이다.

특히나 갈등의 두 축이 황제 입장에서 미묘한 관계인 이들이었기에 더욱 낄 수 없었다.

악시온 대공비는 황제의 숙모이자 선황후의 모친, 즉 황제에게는 장모이기도 했던 것이다.

현 황후 이자벨은 선황후 록셀린의 시녀 출신.

악시온 대공비는 황후의 권위를 절대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 결과가 현재의 사교계 대분열인 것이다.

‘이 와중에 솔레누 후작가의 영애가 중앙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낸 건 확실히 이례적이지.’

그래서 에반젤린은 처음에는 솔레누 영애를 살살 꼬드기려 들었다.

아마 솔레누 영애를 설득해 서부 사교계가 황후를 인정하고 굴복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거다.

특히나 내가 아르타누스 홀의 연회를 앞둔 상태이니 더더욱.

‘아르타누스 홀의 연회에 참석하면 사교계 추방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중앙 사교계에 한정되니까.’

10년 가까이 갈라져 있는 서부 사교계는 아예 별개로 돌아가고 있었다.

내가 그쪽을 잡으려 들 수 있다는 건 저쪽에서도 예측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그 때문에 에반젤린도 나름대로 솔레누 영애를 설득하려 했고 말이다.

처절하게 실패했지만.

갖은 회유에도 솔레누 영애가 덤덤한 목소리로 지뢰를 밟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황후께서 한때 제 고모할머님을 모시던 시녀 출신인 건 사실 아닙니까?”

“……!”

실제로 황후 이자벨은 선황후의 시녀 출신이고, 그전에는 악시온 대공비를 모셨다.

어디까지나 사실을 말했다.

하지만 황후의 딸인 에반젤린에겐 뺨을 맞은 것처럼 모욕적인 말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촤악―!

“어머 실수했네요. 손이 미끄러져서 그만.”

에반젤린은 들고 있던 차를 솔레누 영애에게 휙 뿌려 버렸다.

그 차는 귀족 영애들이 잘 마시는 샤링가 꽃잎차였다.

영애의 드레스는 연한 노란색이었고, 덕분에 보라색 얼룩은 지나치게 눈에 잘 띄었다.

에반젤린이 사람을 멸시하고 조롱할 때 어떤 눈빛을 하는지 나보다 잘 아는 이는 없다.

그리고 그 진짜 의미 역시.

아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으리라.

‘기껏해야 책 속의 캐릭터 주제에!’

에반젤린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게 확실했다.

그저 자신이 읽었다는 책 속에 쓰인 텍스트로만 생각하겠지.

혹은 얇은 인형처럼.

그러니 저렇게 서슴없이 멸시하는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이용하다 버리고 죽일 수 있겠지.

새삼스레 마지막 죽음이 떠올랐다.

그때의 분노는 내 머릿속을 아릴 정도로 차갑게 만들었다.

‘너에게 지금 이 세계는 현실이 아니겠지. 그냥 심심풀이 책 속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거야.’

그런 유희니까 제멋대로 주무르고 망가뜨리는 데 망설임이 없었던 걸 터다.

하지만 나는 이 세계에 살아 있었다.

지구에서 살았다는 전생의 기억이 있어도 나는 이 세계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세상의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왔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적대하는 사람도, 에반젤린, 아니, 빙의자처럼 행동하고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저건, 저것만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란 말이다!’

나는 이 말을, 언젠가 에반젤린의 앞에서 해 주고 싶었다.

반드시.

* * *

그 시점에서 나는 아르파드를 내보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안 띄게 솔레누 영애를 빼 와야 했으므로.

안 그래도 미친 황태자로 유명한 아르파드니까 좀 기행을 벌여도 다들 그러려니 할 거라 예상했다.

아르파드는 내가 원한 역할을 정확히 해 주었다.

등장한 것만으로 주변의 모든 시선을 다 휘어잡았다.

당연히 에반젤린의 시선마저도.

“오, 오라버니?”

이렇게 중얼거리며 뺨을 붉히는 게 조금 기분이 나빴다.

에반젤린은 솔레누 영애는 신경도 안 쓴 채 아르파드를 향해 달려갔다.

당연히 주변의 추종자들 역시.

덕분에 나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솔레누 영애를 빼돌릴 수 있었다.

준비해 둔 수건과 외투를 입혀 주는 것도 가능했다.

내 예측을 벗어난 것이 있다면 하나였다.

아르파드에게는 수치심이나 부끄러움이라는 게 없었고.

이번 일은 그가 아주 싫어하는 황후의 심기를 긁을 기회였고.

또 내가 이번 일에 그를 진짜 이용만 하자 왠지 모르겠지만 또 뿔이 났던 것이다.

그 결과가 이 참사였다.

“내 심장 속의 아기 다람쥐! 어디로 갔소? 그 작은 발로 어디까지 사라진 거요? 어서 내 심장, 그대의 집으로 돌아와 주지 않으면, 나는 그리움에 죽어 버릴 거요!”

…저 인간이 얼마나 미친 인간인지, 난 아직도 미처 다 몰랐던 거다.

‘사실 이미 광증은 시작된 게 아닐까?’

그게 평소 상태라 다들 모르는 걸지도 모른다.

굳어 있는 내 옆에서 솔레누 영애가 물었다.

“나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저렇게 애타게 찾으시는데…….”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이대로 물러나죠. 조용하게.”

“하지만…….”

솔레누 영애가 가리킨 곳에서는 아르파드가 마치 연극하는 것처럼 망할 아기 다람쥐를 찾고 있었다!

“…!”

얼굴이 불타는 것 같았다.

저런 인간이 내 법적 남편이라니. 크나큰 실수를 한 게 아닐까.

안 그래도 요즘 상태가 좀 많이 이상하던데.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솔레누 영애를 데리고 황후궁 정원을 빠져나오는 데에 성공했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서.

“아, 나의 아기 다람쥐! 분홍색 솜털 한 올도 보이지 않아!”

날 놀리는 게 분명한 아르파드의 목소리로부터 도망친 건… 절대 아니다.

우리의 탈출은 누가 꾸준히 주변의 주의를 모조리 잡고 놓아 주지 않은 덕분에 쉬웠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 * *

잠시 이성과 어이가 저 멀리 날아가는 경험을 했지만.

나는 목표대로 솔레누 영애를 비밀리에 빼내 황태자궁으로 데려오는 데에 성공했다.

차를 맞아 젖은 머리를 말리고, 얼룩으로 망가진 드레스 대신 새 옷도 빌려주었다.

덕분에 말끔해진 상태의 솔레누 영애와 드디어 평범하게 인사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늦었지만, 드디어 인사를 할 수 있게 되었군요.”

“솔레누의 딸이 황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이세핀 솔레누는 아주 깍듯이 예의를 차렸다.

중앙 출신 귀족들에게선 거의 못 본 모습이라 나는 새삼 감동받았다.

그녀는 덤덤한 한편으로 영리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어째서 저를 구해 주신 겁니까, 비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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