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율켄에게 원하는 정보를 얻은 지 사흘 뒤.
나는 좀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오늘은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미리 확보한 정보와 회귀를 통해 내가 가진 기억, 모든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여 최선의 계획을 세워 뒀다.
성공만 하면 나는 돌 하나를 던져 두 마리 새를 잡는 격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이건 미처 예상 못 했다.
“당신이 왜 여기서 나와요?”
총총히 황후궁 방향으로 걸어가는 내 앞을 갑자기 막아선 인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맵시 있게 빗어 올린 백금발이 햇살 아래 찬란히 빛났고, 대낮에 보는 붉은 눈동자는 최고급 루비보다 아름다웠다.
흰 대리석을 조각한 듯한 얼굴의 이목구비가 움직여 심술궂은 미소를 만들어 냈다.
“내 비(妃)께서 날 두고 어디를 혼자 가시나 싶어서.”
“그야… 그냥 산책이죠?”
게다가 두고 가다니. 이상한 표현이다.
“그럼 그 산책을 나와 함께하는 자비를 허락해 주겠나?”
연극적으로 보일 정도로 과장된 예의를 갖추어 손을 내민다. 에스코트 요청이었다.
나는 그걸 바로 맞잡아 주지 않았다.
“…….”
나는 이제 아르파드의 화법을 좀 알았다.
저건 있는 힘껏 비꼬고 있는 거다.
왜 또 심기가 상했다고 저러는 거지? 진짜 종잡을 수가 없는 인간이다.
통제 불가능한 요소를 늘리고 싶지 않아서 회피를 시도했는데.
“하지만 전하께서는 정해진 일정이 있지 않으신가요? 지금쯤이면 알현을 받고 계셔야 할 텐데.”
“율켄이 일러바쳤나?”
말을 이상한 방향으로 돌리는 데는 아르파드가 더 고수였다.
“그거야…….”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경계심을 무너뜨린 후 율켄은 내가 굳이 묻지 않아도 미주알고주알 다 말하곤 했으니까.
덕분에 내가 아르파드의 일정을 알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그는 매끈한 미간을 살짝 구긴 채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까다로운 놈을 대체 어떻게 구워삶은 건지 아무리 봐도 희한해.”
“그냥 능력을 증명했을 뿐이에요.”
연이어 아르파드의 날카로운 시선이 내 등 뒤를 향했다.
내 수행원 중 누굴 보는 건지 알겠다.
‘또 벨테인 경이냐.’
그는 여전히 불편함이 거스러미처럼 남은 어조로 말했다.
“내 성질 나쁜 측근을 단번에 길들이더니, 이제는 애인을 늘 곁에 끼고 다니시는군.”
“애인이 아니라 내 기사예요. 기사의 맹세 하는 거 직접 봤잖아요.”
“아, 하긴 저자가 그대에게 일생을 바치겠다고 맹세하는 자리에 증인으로 있었지.”
“…….”
왜 이런 말이 떠오를까.
‘말이 통하지 않으니 이길 수가 없다.’
아르파드는 히죽 웃더니 물었다.
“내가 저번에 한 말 기억하나?”
“무슨 말이요?”
“그대에게 남자가 몇이라도, 정실은 나 하나라고.”
“…잊기 힘든, 말이긴 하죠.”
너무 창의적인 헛소리긴 하니까.
“그대의 유일한 법적 남편으로서, 그대의 산책에 동행할 것을 요청하는 바야. 그 정도 자격은 있지 않나?”
“…….”
…그러니까 지금 산책하러 같이 가자는 말에 내가 바로 오케이 안 해 주니까, 심술부리는 건가?
설마 하는 생각이 들어 아르파드가 내밀고 있는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그러자 기다란 손가락이 내 손을 꾹 잡아 온다.
동시에 심술이 가득 피어올라 있던 얼굴이 확 펴졌다.
…진짜야?
어쩐지 사자가 고양이처럼 애교를 부리는 꼴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나는 아르파드를 금붕어 똥처럼 달고 목적지로 갈 수밖에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럼 아르파드도 써먹지 뭐. 본인이 알아서 찰싹 붙는데 어떡해.’
* * *
황후궁에는 수많은 정원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장미의 미로라 이름 지어진 곳이다.
그 이름처럼 다양한 장미를 전부 모아 심어 둔 이 정원은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제국의 국력을 보여 주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만큼 중요하고 귀한 곳이라 손님들에게는 잘 개방되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 이 유명하면서도 귀한 정원이 개방되어 있었다.
바로, 황후가 지금의 자리에 오른 날이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결혼기념일.
사교계 활동을 딸 에반젤린을 통해 처리하는 일이 많은 황후 이자벨이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화려한 드레스로 치장하고 황후의 보관을 머리에 쓴 채, 직접 장미의 미로로 행차했다.
황후가 보낸 초대장을 받았으면서도, 어떤 대답도 없는 황제는 올해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황후는 매번 이날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도 한번은 황제가 발걸음 해 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이 특별한 날 특별한 장소에서 황후는 난데없는 광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녀는 경악했다. 그리고 연이어 지독한 모멸감을 느끼며 미간을 구겼다.
“아하하. 어디 있는 거지? 내 사랑?”
잘 아는 목소리였다.
저런 말이 절대 어울리지 않는 인간의 것.
그렇기에 명백한 조롱의 의도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황후는 일그러지는 얼굴을 애써 수습하며 물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아르파드?”
그렇다. 놀랍게도 저 믿어지지 않는 대사를 읊으며 미로 속에서 튀어나온 건 아르파드였다.
그는 빙글빙글 웃으며 대꾸했다.
“사랑하는 아내를 찾고 있었습니다.”
“네 아내를 왜 내 정원에서 찾고 있는 건지 모르겠구나. 내 가든파티를 망치려는 게 아니라면.”
그러자 아르파드는 환하게 웃었다.
황후는 분노와 모멸감으로 눈이 멀 지경이었으나, 아르파드의 화려한 외모는 역할을 다했다.
가든파티에 참석한 여인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붉혔다.
친황후파라 해도 잘생긴 남자의 얼굴을 보는 눈은 똑같았으니까.
“제가 어찌 황후 폐하의 파티를 망치겠습니까. 파티하시는 줄도 몰랐지요.”
황후는 입술을 짓씹었다.
지금 아르파드는 대놓고 비꼰 셈이다.
‘당신의 결혼기념일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 기억하지 못했다’ 라고.
그리고 남편 없이 소박하게 치러지고 있는 결혼기념일의 행사에 의붓아들이 난입해서 제 아내를 찾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왜 내 정원에서 네 아내를 찾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아시다시피 이곳은 제게도 추억의 장소라서요.”
“…!”
황후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사정을 아는 이들 역시 비슷한 반응이다.
그리고 모르는 이들에게는 알려 주겠다는 듯 아르파드가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본디 이 정원은 제 친모께서 결혼 선물로 부황께 받은 곳이니까요. 제게도 아주 추억이 많지요.”
“…….”
선황후의 시녀 출신으로, 후처로 들어온 것이 현 황후 이자벨이다.
그녀는 결혼식마저 약식으로 치렀다.
여러모로 대비될 수밖에 없는 사연이었다.
만개한 장미가 일시에 얼어붙어 버릴 듯한 분위기가 된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추억의 장소를 둘러보러 왔다가, 그만 길을 잃고 헤어져 버렸지 뭡니까.”
아르파드는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혹시 제 사랑스러운 아기 다람쥐를 못 보셨습니까?”
황후는 분노와 모욕감까지 잠시 잊었다.
“아기… 다람쥐……?”
뚝 뚝 끊기는 황후의 되물음에 아르파드는 소년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주머니 속에 숨겨 두고, 남들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제 아내 말입니다.”
그리고 이 충격적 발언에 가장 큰 피해를 본 건 좀 떨어져 숨어 있던 사람이었다.
바로, 남들 눈을 피해 미로 정원 구석에서 곤욕스러운 상황에 빠진 영애를 돌봐 주고 있던 힐리아였다.
‘내 귀가… 미쳤나? 이런 말이 들릴 리가… 없는데? 없어야 하는데?’
하지만 그녀의 청각은 너무나도 멀쩡했고, 덕분에 듣고 싶지 않은 말을 계속 들을 수밖에 없었다.
* * *
아르파드가 난데없이 달라붙었지만, 나는 계획을 속행했다.
아르파드의 존재 덕분에 좀 더 쉬워진 것도 있긴 했다.
이 인간은 존재 자체가 블랙홀처럼 사방의 주의를 끌어들이는 존재였다.
그러니까 세상 어디에 던져둬도, 주변의 모든 시선을 다 끌고 있을 거라는 소리다.
그래서 나는 가장 필요한 장소에 필요한 역할로, 아르파드를 써먹었다.
일명 ‘너로 정했다, 가라, 황태자!’ 작전이다.
“잠시 정원에서 주변의 주의를 끌어 줘요.”
“주의를 끌라고? 방법은 상관없나?”
“네. 알아서 해 주세요.”
어차피 아르파드가 입 다물고 돌아다니기만 해도 시선이 몰릴 거다.
그리고 나는 이때 어떻게 해 달라고 구체적으로 지정해서 부탁하지 않은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된다.
미로 뒤에 내가 숨은 사이, 아르파드는 활기차게 달려 나가더니 기함할 소리부터 했던 것이다.
“아하하. 어디 있는 거지? 내 사랑?”
저 말을 들은 순간, 실수로 혀를 깨물 뻔했다.
‘진짜 광증이 온 건가?’
하지만 불행히도(?) 아르파드는 미친 게 아니었다.
아주 계산적이고 효과적으로 황후의 신경을 득득 긁고 있었다.
덧붙여서 내 신경도.
‘이건, 일부러 저러는 거야! 100% 확실해! 나 약 올리려고!’
졸지에 나와 아르파드는 남의 궁 정원에서 나 잡아 봐라를 즐기는 민폐 커플이 되었다.
그리고 내 정신에 엄청난 타격을 주는 ‘아기 다람쥐’까지 이어졌다.
효과는 대단했다!
‘너무… 대단해서 좀 두려울 정도야.’
아기 다람쥐라니! 아기 다람쥐라니!
아연해 있자 에반젤린이 던진 찻잔에 맞아 드레스가 온통 엉망이 된 솔레누 영애가 나를 보며 물었다.
“지금 비 전하를… 찾고 계신 거죠?”
“…….”
내가 빌려준 외투를 어깨에 두른 채 그녀는 뭐라 말해야 좋을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아주 어색한 말이 이어졌다.
“소문보다… 금슬이 훨씬 더 좋으신 모양이에요.”
“…….”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다시 아르파드의 나사 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내 아기 다람쥐! 어디 숨었지?”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