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아르파드는 소름 끼치게도 순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당연하지 않나? 나는 그대와 혼인 성사를 올린 유일한 남편이니까.”
아니,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사실이긴 하니까.
그런데 그 말을 왜 저렇게 이상하게 하냔 말이다.
‘꼭 바람기 많은 남편 앞에서 그래도 제가 정실부인이에요, 라고 주장하는 아내처럼…….’
나는 당치도 않은 소름 끼치는 상상을 고개를 흔들어 털어 버렸다.
‘훠이! 말도 안 되는 상상 저리 가!’
그 사이, 벨테인 경은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여전히 아르파드는 나를 잡고 놔주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와 눈치 싸움을 벌였다.
‘놔요!’
‘싫어.’
‘이 사람 왜 이래 진짜!’
이런 대화가 오가는 사이, 벨테인 경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했다.
스릉―
검을 뽑아 들어 내 앞에 꽂았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벨테인 경?!”
얼마나 놀랐는지 아르파드마저 나를 놓쳤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건 ‘기사의 맹세’였으니까.
기사가 어떤 경우에라도 자신의 검을 상대에게 바치겠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옛날처럼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건 아니지만,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귀부인이 기사에게 맹세를 받았다는 건 그것만으로도 명예가 될 정도였다.
‘실제로 지난 3회차의 회귀 동안 수많은 기사가 에반젤린에게 맹세를 바쳤었지.’
그리고 나는 이번 생에 벨테인 경에게 받은 게 처음이다.
사실 내가 회귀한 직후 벨테인 경이 약식으로 맹세하긴 했다.
하지만 정식으로, 이렇게 많은 증인 앞에서 맹세하는 건 처음이다.
어쩐지 기분이 아주 이상했다.
벨테인 경은 나를 단 한 번도 배반한 적 없고, 나를 돕다 죽었던 사람이지만.
그에게 이렇게 공개적으로 맹세 받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벨테인 경은 더없이 진중한 표정으로 맹세의 말을 내뱉었다.
“기사 레누스 벨테인의 검과 목숨은 오로지 아가씨에게만 일생 바치겠습니다.”
그는 침통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것이 아가씨를 지키지 못한 제가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그리고 벨테인 경은 내 옆에 선 아르파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아르파드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호칭이 틀렸군. 아가씨가 아니라, 황태자비다.”
아르파드는 고압적인 시선으로 벨테인 경을 짓누르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벨테인 경 역시 전혀 지지 않고 마주 봤다.
파지직!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쳐 불꽃이 튀는 듯했다.
아르파드는 웃는 얼굴로 비꼬았다.
“기사의 맹세 같은 명예롭고 중요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호칭을 쓰지 않는 건 내 비(妃)에게 도리어 모욕이 될 수 있을 듯하군.”
“…….”
늘 큰 변화가 없던 벨테인 경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는 아르파드가 아니라 나를 보며 물었다.
“미천한 검은, 주인께서 명하신다면 당연히 따를 뿐입니다.”
으아아. 엄청나게 부담스러운 말이다.
그리고 엄격하고 고지식한 성격을 생각하면, 그는 말한 걸 그대로 지킬 거다.
전생에 그랬던 것처럼.
“저는 아가씨를 지킬 겁니다. 끝까지.”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했다. 솔직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그는 자신의 목숨과 일생을 다 바쳤다.
기사의 맹세를 하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그런데 기사의 맹세를 바친 지금은 어떻겠어.’
그 이상의 것이라도 할 거다. 그야말로 무엇이든.
막말로 지금 내가 원치 않는 약탈혼이었다고 주장하며, 아르파드를 죽이라고 명령해도 따를 기세였다.
…잠깐?
‘…그러고 보니까, 벨테인 경은 내가 진짜 약탈혼 당한 걸로 알고 있지 않나?’
애니는 지난 며칠간 내 옆에서 상황과 분위기를 파악했다.
그래서 안도하며 나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아가씨께서 납치당하셨다고 해서 얼마나 걱정하고 울었는지 몰라요. 제 걱정보다 황태자 전하께서 진심이시고, 아껴 주시는 것 같아서 다행이지만요.”
“그리고 사실… 루드비히 대공보다 황태자 전하께서 더 나은 건 사실이고요. 적어도 다른 여자는 없으니…….”
애니와 달리 벨테인 경은 황태자궁 상황을 몰랐다.
거기에 벨테인 경은 약탈혼을 직접 목격했고, 막으려고 아르파드와 싸우기도 했다.
‘덕분에 더 리얼해 보이는 약탈혼이 되긴 했지.’
하지만 그때 내가 벌인 일의 부작용이 지금 눈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지금 벨테인 경은 나를 지키지 못했다며 자책 중이다.
거기에 델핀저에서 갇혀서 고초를 겪는 걸 내가 구해 주기까지 했다.
벨테인 경이 보기에, 지금 나는 무뢰배에게 잡혀 있는 가련하고 착한 아가씨로 보이기 충분했다.
‘잠깐, 설마… 이번에는 어떻게든 아르파드에게서 날 데리고 탈출하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그랬다간 벨테인 경은 물론이고, 나도 망한다!
* * *
그리고 힐리아의 불안한 예상은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
실제로 기사 레누스 벨테인은 비슷한 생각과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그 순간’을 악몽처럼 기억했다.
아르파드의 손에서 힐리아를 지키지 못한 그 순간을.
“제발 놓아주세요, 전하! 아아아!”
가슴을 찢어 놓는 것 같았던 힐리아의 처절한 절규.
그리고 그의 손을 벗어나 멀리 사라지던 백마와 무정하게 휘날린 아르파드의 흰 망토.
약탈혼이 벌어진 직후부터 주변에서 찧고 까불던 말들.
“이미 그르지 않았겠어?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사달이 나도 몇 번은 났겠지.”
“설사 지금 돌아온다고 해도, 신부의 명예는…….”
끔찍하게 모욕적인 말들이었다.
저 말들이 델핀저의 고용인과 기사들 입에서 나왔다는 게 더 지독했다.
벨테인은 다친 몸으로도 감히 고귀한 여인에게 모욕적인 말을 한 고용인과 기사들을 그냥 두지 않았다.
“감히 그따위 말을 입에 담다니. 검을 뽑아라!”
그리고 아무리 부상이 있어도 벨테인 경을 이길 자신이 없는 다른 기사들은 떼로 모여 그에게 폭력을 가했다.
기사로서의 명예 따윈 내다 버린 행동이었다.
그들은 벨테인을 힐리아를 지키지 못한 원흉이라며 루드비히 앞에 갖다 바쳤다.
“네놈이 힐리아를 지키지 못해서 일이 이 꼴이 된 게 사실이냐?”
“주인을 지키지 못한 기사는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그것이 사실이었으니까.
그 뒤로 벨테인 경은 루드비히의 화풀이 대상이 되어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런 그를 구해 준 것마저 힐리아다.
어찌 경애하지 않을 수 있을까.
기사의 맹세는 물론, 그보다 더한 것이라도 기꺼이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만, 부족한 실력과 다 회복하지 못하여 불편한 몸이 한이었다.
그는 말없이 열정과 각오를 다진 채 힐리아를 올려보았다.
그리고 눈빛과 의지로 온 힘을 다해 힐리아에게 주장했다.
‘저는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구해 달라고요!’
* * *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벨테인 경의 휘느니 부러지겠다는 듯 곧은 눈빛을 마주하고 나는 깨달았다.
‘아, 망했다.’
저 정의로운 분노로 가득 찬 표정.
그리고 의지와 각오로 가득한 입매.
벨테인 경과는 꽤 오래 알아 오고 갖은 고생을 함께 겪었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진짜 약탈혼 당해서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
이 ‘기사의 맹세’는 어떻게든 나를 구하겠다는 그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전생에 들은 말이 떠올랐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깔렸다던가.
내 유일한 기사가 내게 바치는 진실한 신뢰와 충성이, 나를 위협하려 하고 있었다.
‘안 돼!’
게다가 한 술 더 떴다.
옆에서 아르파드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꼭 용에게 잡힌 공주를 구하겠다고 다짐하는 기사 같군.”
아르파드의 고운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붉은 눈동자의 색이 유달리 짙어지며, 세로 동공이 한층 좁혀 들었다.
겉보기엔 눈이 호사스러운 아름다운 미소다.
하지만, 이제 아르파드를 제법 잘 알게 된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인간 진짜 화났다!’
공기가 찢어질 듯한 긴장감이 팽팽하게 차올랐다.
나는 마침내 바짝 마른 입술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