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반려.”
“네?”
“이 서류 전부 반려라고 했다.”
황당한 얼굴을 한 율켄의 앞에 아르파드가 던진 서류가 팔랑팔랑 날아갔다.
“분명히 전에는 이렇게 처리해도 아무 문제없다고 하셨잖습니까!”
“그건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결국 율켄은 밤을 새워서 서류를 전부 새로 작성해서 가져왔다.
그리고.
“이번에도 반려다.”
“어째서요? 어제 지적하신 부분 완벽하게 고쳐 왔습니다!”
그러자 아르파드는 피식 웃으며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았다.
“종이 재질이 마음에 안 들어.”
“드디어 미치셨습니까?!”
누가 봐도 억지로 트집을 잡아 괴롭히고 있었다.
아르파드가 괴짜에 좀 미친 사람이긴 하지만, 이렇게 심술을 부리며 괴롭히는 건 처음이었다.
율켄이 어떤 실수를 해도 이런 적 없었다.
심지어는 다른 부하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어도 그랬다.
‘차라리 그냥 깔끔하게 죽였지!’
트집을 위한 트집을 잡으며 상대방을 말려 죽이려고 든 적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러고 있잖아!’
그것도 아르파드의 부하 중 가장 유능하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율켄에게 말이다.
“전하께서 지금 광증이 도지시면 큰일입니다!”
“왜? 네가 일자리를 잃을까 봐 걱정되나?”
지금까지 율켄이 아르파드에게 ‘님 제정신?’을 시전할 때는 늘 비슷한 말을 덧붙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전혀 다른 반응이 나왔다.
율켄의 핀트 엇나간 말이 아르파드의 심술에 기름을 부었다.
“우리 비 전하께서 시집오자마자 과부가 되시는 건 안 된단 말입니다!”
“…!”
화륵!
아르파드의 손에 들려 있던 율켄의 완벽한 서류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끼약! 이게 무슨 짓이십니까?! 제 피와 땀과 눈물 어린 철야의 결과물이……!”
“말하지 않았나. 종이가 마음에 안 든다고.”
“말도 안 되는 말씀을……!”
“됐으니까 새로 써 와.”
“아아악!”
괴롭히는 사람도, 괴롭힘당하는 사람도 명확한 이유를 모르는 이 난장판은 며칠 동안 더 이어졌다.
그저 원인 제공자만이 아무것도 모르고 태평할 뿐이었다.
‘좋아. 율켄의 호의도 얻었으니 연회 준비에만 집중할 수 있겠네. 다행이야!’
* * *
델핀저에 다녀온 지 사흘 뒤.
응급 처치와 약간의 회복 기간을 가진 벨테인 경이 드디어 입궁했다.
당연히 내 호위 기사로서의 자격으로였다.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나는 직접 벨테인 경을 마중 나갔다.
옷차림도 신경 쓰고, 애니를 비롯하여 궁인들까지 우르르 끌고서.
이유는 간단했다.
‘벨테인 경은 내가 진짜 약탈혼 당한 줄 아니까, 안심할 수 있게 잘 대우받고 있다고 보여 줘야지.’
그래야 안심할 게 아닌가.
안 그래도 걱정이 컸을 거다.
애니의 말에 따르면, 순수하게 나를 걱정한 건 역시 둘 뿐인 듯했으니까.
“다들 대공 걱정만 했어요. 유일하게 벨테인 경만이 아가씨를 지키지 못했다고 자책하다가, 루드비히 대공의 화풀이까지 당하고……!”
그리고 내 귀환 때 함께 궁으로 들어온 애니는 아주 빠르게 적응했다.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특유의 친화력으로 궁인 중에 친구도 사귄 모양이다.
그들 사이에 떠도는 소리까지 나에게 전해 줄 정도였다.
‘벨테인 경도 내 기사로서 자리 잡게 하면, 적어도 두 사람에 대해 걱정할 건 없어지겠지.’
나는 기대감과 뿌듯함으로 두근거리며 황태자궁 입구로 향했다.
그런데 중간에 예상 못 한 침입자가 나타났다.
“이런, 내 신부께서는 오늘도 눈이 아플 정도로 아름다우시군.”
이런 오글거리는 대사를 당연하다는 듯이 읊는 아르파드였다.
아르파드는 진홍색 비단에 금사 자수가 화려하게 들어간 예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금빛 드래곤이 자수로 새겨진 망토는 번쩍번쩍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뭐야? 어디 연회라도 갈 것처럼 차려입었잖아?’
내가 놀라서 잠깐 멈춰선 사이,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다가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게 그대를 에스코트할 영광을 주겠나?”
“…….”
웬 별꼴이지?
나는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주변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수줍은 척 손을 내밀며 대답했다.
주변에서 다 들을 수 있도록.
“제 손은 그 어느 때라도 전하의 것이랍니다.”
아, 내 입으로 말하지만 진짜 오글거린다.
내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참는 사이, 아르파드는 빠르게 내 손을 잡아챘다.
꽉 잡은 손길에 힘이 꽤 들어가 있어서 의아했다.
‘뭐지?’
굳이 손을 뺄 생각은 없었지만, 그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한 굳센 의지가 느껴졌다.
내가 의아해하며 발걸음을 재촉하자 아르파드가 작게 속삭였다.
“그거 아나?”
“뭘요?”
“그대에겐 남자가 너무 많아.”
“…네?”
기상천외한 헛소리였다.
순간적으로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장소와 상황도 잊고 빽 소리를 지를 뻔했다.
나는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무슨 헛소리예요? 갑자기 웬 모함을…….”
아르파드는 더 강하게 힘줘서 나를 끌어당겼다.
덕분에 우리는 거의 얼싸안다시피 한 채 걷게 되었다.
이건 에스코트 수준이 아닌데?
하지만 그런 구도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아르파드의 헛소리가 안 끝났기 때문이다.
그가 손을 펴더니 엄지를 접었다.
“우선, 나.”
그제야 이 남자가 뭘 말하는지 깨달았다.
‘내 남자를 헤아려 보는 거야?’
그러면서 스스로를 가장 먼저 따지는 게 어이없었다.
‘아니, 법적인 남편이니까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검지를 접었다.
“두 번째는, 루드비히 놈.”
“내가 왜 당신에게 의뢰한 건지 잊었어요? 그 인간 손에서 벗어나려는 거였는데, 왜 루드비히 이름이 나와요?”
하지만 아르파드는 고개를 저었다.
“델핀저에서 보니 아직도 그대에 대한 미련이 철철 넘치던걸.”
“내가 아니라 델핀가의 작위와 재산에 대한 미련이겠죠.”
3년 동안 달달하게 빼먹었으니까. 얼마나 아쉽겠나.
하지만 아르파드는 순순히 동의해 주지 않았다.
“그대는 남자의 소유욕과 집착을 잘 몰라서 그래.”
“그걸 내가 왜 알아야 해요?”
그러자 아르파드는 아주 미묘한 표정을 했다. 그러더니 제멋대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그냥 모르는 게 나을 수도 있겠군.”
아까부터 왜 계속 헛소리만 하는 거야, 이 남자?
그 와중에 아르파드의 가운뎃손가락이 접혔다.
이번엔 내가 먼저 물었다.
“그건 왜 접혀요? 남자가 있지도 않은데?”
“율켄.”
“엥?”
아르파드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어떻게 구워삶은 거지? 하루 만에 충견이 다 됐던데.”
“충견은 좀 오버 아니에요?”
놀랍게도 그는 진지했다.
“전혀 오버가 아니야. 내가 이렇게 놀랄 일은 많지 않아. 율켄을 순식간에 길들여 버리다니.”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내 남자 중 하나니 어쩌니 하는 말은 어이가 없었지만.
율켄을 순식간에 길들였다고 하는 아르파드의 말에는 명백한 경탄이 섞여 있었으므로.
“왜요? 내 능력에 감탄했어요?”
“…지나칠 정도로.”
그렇게 말하더니 아르파드는 네 번째 손가락을 접었다.
그리고 황태자궁의 입구에 서 있는 익숙한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번째…는 당연히 유일하게 그대를 위해 내 앞에서 칼을 뽑아 든 저 기사지.”
거기에는 목발을 짚고 선 벨테인 경이 있었다.
* * *
나는 놀라고 기뻐하며 달려가려 했으나 실패했다.
아르파드가 나를 꾹 잡는… 수준이 아니라, 거의 그에게 안겨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파드의 힘을 뿌리치고 달려갈 힘은 내게 없었다.
별수 없이 나는 아르파드에게 속삭였다.
“놔줘요.”
“싫어.”
“왜요?”
그러자 아르파드는 좀 기가 찬 듯한 표정을 했다.
“진짜 모르겠나?”
머리를 갸우뚱했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떠오르는 게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르파드가 나에게 전혀 보일 리 없는 감정을 일부러 꼬집어서 농담으로 던졌다.
“혹시 질투라도 하시는 거예요?”
나는 당연히 아르파드가 질색하거나 비웃을 줄 알았다.
그러면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면서, 아르파드의 품에서 빠져나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르파드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건 상상도 못 했다.
게다가 이렇게 대답하는 것도.
“나에게 질투할 권리는 있지 않나? 그대의 정실이니까.”
“정, 실이요?”
순간적으로 내 청각의 안위를 의심하게 하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