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내가 율켄에게 준 서류는 간단한 것이었다.
사람의 이름이 쭉 나열된 문서였을 뿐이다.
하지만 아르파드의 측근이자 유능한 첩보관인 율켄이라면 그 이름의 의미를 알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내 예측은 멋지게 맞았지.’
율켄은 서류를 본 순간, 거기 있는 이름들이 전부 황후가 황태자궁에 심어 둔 간자들이라는 걸 알아챈 것이다.
그중에는 이미 율켄이 파악해서 이용 중인 자들도 있을 거다.
의심하는 중인 자들도 있겠지.
‘하지만 아직 전혀 파악 못 하는 이들도 있을 거야.’
그리고 내가 간자일 가능성이 있다고 알려 준 자들은, 그만큼 황후가 심혈을 기울인 간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더 거물이라는 소리다.
당연히 정보의 출처는 회귀 전 내 기억이니, 신빙성은 100%다.
율켄의 입장에선 내가 갑자기 호박을 넝쿨, 아니 밭째로 가져다준 셈이다.
능력 지상주의자라 제 목이 날아갈 때까지 신랄한 말을 멈추지 않았던 남자다.
그런 타입을 공략하는 법은 간단했다.
‘능력을 보여 주면 그만.’
그리고 나는 이 서류 하나로 능력을 증명한 셈이었다.
내 예상대로 서류를 본 율켄은 환한 표정으로 외쳤다.
“물론입니다, 비 전하!”
그는 달콤한 포도송이를 본 여우처럼 침을 질질 흘릴 기세로 서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리스트대로면, 저자와 이자 사이의 고리가 드디어 이해가 되는군. 여기 이 하녀를 통해서 저놈들이… 그러면 역정보를 흘리는 게 몇 배는 쉬워지고…….”
율켄은 지나치게 기뻐서 서류에 아예 혼을 빼앗긴 듯했다.
냉큼 비전하라고 불러 놓고는 내 기색을 전혀 살피지 않았던 거다.
나는 그의 주의를 끌어올 겸 손가락을 부딪쳤다.
딱!
겨우 율켄은 정신을 차리고 나를 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비 전하?”
나는 그의 앞에 오른손을 쭉 내밀고 있었다.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조금 전, 넋이 나간 듯 서류를 보던 눈빛 그대로 나를 보고 있었다.
두 뺨에는 홍조까지 올라 있었다.
어쩐지 뭔가를 기대하는 것 같아 보이는데 착각이겠지?
‘율켄은 그런 캐릭터가 아니니까.’
나는 환하게 웃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율켄의 몽롱한 시선이 내 입술에 닿았다.
하지만 내가 지적한 말을 이해한 순간, 율켄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놀랐다.
“내. 기.”
“내…기? …잠깐!”
확인 사살을 날렸다.
“내놔. 100만 카스텔.”
“…!”
뭔가 홀린 듯하던 율켄의 표정이 공포로 질렸다.
그는 서류를 소중하게 끌어안은 채 달달 떨기 시작했다.
“설마, 정말, 정말로 저에게 100만 카스텔을 받아가실 셈이셨습니까?”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주 자연스럽게 말투가 바뀌었지만, 나도 율켄도 신경 쓰거나 지적하지 않았다.
“그럼 내가 졌으면 율켄은 100만 카스텔 안 받았을 거야?”
“그거야, 당연히 받았죠!”
“그러니까 나도 받겠다는 거야.”
율켄은 가련하게 옆으로 쓰러졌다. 정확히는 그러는 척을 했다.
“내, 내 한 달 치 봉급!”
울 것 같은 남자에게 나는 구원의 손길을 내려주었다.
“걱정 마. 펠릭스 율켄. 내가 그 정도로 잔인하진 않으니까.”
그러자 율켄의 얼굴에 희망이 가득 떠올랐다.
“여, 역시 비 전하!”
나는 아주 자비롭게 말했다.
“3개월 분할 납부.”
“…네?”
“아주 자비롭게 이자는 안 받을 거야. 내가 뭐, 고리대금 업자도 아니니까.”
율켄은 고개를 푹 숙였다.
“벼룩의 간을 빼 가시는군요.”
이쪽 세상에는 한국에서와 비슷한 속담이 많았다.
아마, 원작이 K―로판이라 그런 게 아닐까.
어쨌건 나는 틀린 말을 정정해 주었다.
“벼룩의 간은 아니고, 노랭이의 간이겠지.”
율켄은 완전히 침몰했다.
* * *
아르파드는 이날 아주 불쾌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힐리아가 궁에 들어온 이후, 율켄은 늘 고집스럽게 ‘비 전하’라는 경칭을 쓰지 않았다.
아르파드가 지적해서 좀 바꿔 부르는 것이 ‘상아 침실의 주인’일 정도였다.
그런데 딱 한 번 힐리아에게 불려 갔다 오더니, 사람이 바뀐 것 같았다.
“저는 비 전하께 완전히 넘어가 버린 것 같습니다, 전하.”
아르파드는 드물게 당황했다.
그리고 다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불쾌했다.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모르겠군. 네 입으로 할 리 없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그러자 율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궁의를 불러올까요. 전하의 청각에 이상이 있으시면 큰일 아닙니까.”
“…입이 살아 있는 걸 보면, 내가 아는 펠릭스 율켄이 맞는 것 같은데.”
“전하의 제일가는 능력 있는 신하이자, 최고의 충신, 펠릭스 율켄이 맞습니다.”
“둘 다 틀렸지만, 물에 던지면 입술만 동동 떠서 시끄럽게 떠들어 댈 율켄은 맞군.”
아르파드는 은제 페이퍼 나이프를 들어 올려 서류의 끄트머리를 섬세하게 오려 냈다.
“그나저나 무슨 바람이 분 거지? ‘비 전하’라? 내가 닦달을 해도 거부하더니?”
그러자 놀랍게도 율켄의 눈빛이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보기 드물고 괴상한 광경이었다.
아르파드마저 표정 수습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그분은 ‘비 전하’라 불리기에 전혀 부족함 없는 분이셨습니다! 제 눈이 단춧구멍이라 그동안 몰랐던 거지요!”
아르파드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딱 한 번 만나고 오더니 추종자가 된다고? 다른 놈도 아니고 율켄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무슨 세뇌 마법이라도 쓰나?’
솔직히 그런 게 아닌가 의심을 좀 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율켄의 경우까지 더해지자 진지하게 의심이 들려 했다.
그때, 율켄이 정확히 어떻게 된 일인지 사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된 겁니다!”
“너도 파악 못 한 간자까지 힐리아가 파악하고 있었다고?”
“예! 굉장하지 않습니까? 엄청난 능력이십니다. 과연 황태자비, 아니, 능히 황후의 자리에 어울리는 능력을 갖추신 분인 겁니다!”
율켄이 왜 홀딱 넘어갔는지는 바로 이해됐다.
율켄만한 능력 지상주의자도 없었다.
감탄하다 못해 경악할 정도의 능력을 보여 준 걸로 충분했다. 율켄을 손에 넣는 데에는.
솔직히 아르파드도 놀라웠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이번에도 말 안 했겠지.”
“그거야… 그렇지만요?”
너무 뛰어난 능력이라 이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이런 정보를 알 수 있는 건, 황후의 측근이어야 맞지 않나?”
사실 이런 의심은 아주 초반부터 했다.
그리고 율켄이 계속 그녀를 경계하고 있던 이유기도 했다.
그런데 늘 경계하던 당사자가 이번엔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에이, 그건 말이 안 됩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비 전하께서 정말 황후 측 사람이라면, 루드비히와 혼인하는 게 훨씬 이득입니다.”
이건 맞는 이야기였다. 아르파드의 바로 옆에 간자를 심는 이득은 물론 크다.
하지만 그게 황후가 밀었던 루드비히의 정통성을 보완하고, 황위 계승권자로 발돋움하게 하는 것보다 중요하진 않았다.
‘게다가 분명히 내 광증을 잠재워 주겠다고 장담했지.’
그리고 신물을 통해 그 말이 진실임을 증명했다.
정말 그런 방법이 있다면 황후가 힐리아를 자신의 옆에 보내는 건 말도 안 된다.
그 전에 죽여 버렸겠지.
결국 아무리 고민해도 결론은 하나로 귀결된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여자야.’
하지만 그녀는 아르파드가 원하고 유리한 것들만 들고 왔다.
그리고 항상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이래도 내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할 셈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아르파드는 미간을 찌푸린 채 턱을 매만졌다.
고민에 빠졌을 때의 버릇이다.
그 옆에서 율켄은 물색도 모르고 떠들어 댔다.
아니, 정확히는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다. 알면서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게 율켄의 특기였다.
“아아. 올해 전하께서 하신 일 중 최고가 비 전하를 약탈해 오신 겁니다.”
“정말로 손바닥 뒤집듯이 평가가 바뀌는군. 나한테 미쳤냐고 묻지 않았나?”
“그건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죠. 그땐 그럴만했고, 지금은 이럴만한 겁니다.”
정말이지 언제나와 같은 율켄이다.
“상상해 보십시오. 루드비히 옆에 비 전하가 계신 모습을요! 소름 끼치지 않습니까!”
“…….”
부정할 수 없었다.
아르파드조차도.
솔직히 그러길 잘했다고 안심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팬케이크 뒤집는 것처럼 펄떡펄떡 의견이 바뀌는 놈에게 동의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침묵을 고수 중인 아르파드의 앞에서 율켄은 폭탄을 터뜨렸다.
“그리고 비 전하께서 저를 아주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뭐?”
아르파드는 조금 전보다 지금 더 자신의 청각을 의심했다.
“비 전하께서 분명 저를 처음 보시는 데도, 너무나도 따스한 눈으로 봐주셨단 말입니다! 다과도 엄청나게 호화롭게 준비해서 차도 직접 따라 주세요. 제가 무례했는데도, 화도 안 내시고……!”
끼긱, 아르파드의 목이 녹슨 바퀴 같은 소리를 내며 꺾였다.
“…다시 말해 봐.”
“비 전하께서 어찌나 열렬한 눈으로 보시는지, 저에게 한눈에 반하신 게 아닌가 걱정할 정도였지 말입니다!”
“…….”
율켄은 자신이 어떤 지뢰를 밟은 건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