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사실 율켄은 힐리아가 자신을 불렀을 때 올 게 왔다는 생각을 했다.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그리고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황태자비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런데 막상 얼굴을 마주한 힐리아의 표정이 이상했다.
기묘할 정도로 호감이 넘치는 은은한 미소를 띤 채, 자신을 바라봤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혀가 고슴도치라는 말을 듣는, 이 펠릭스 율켄을!
그는 남을 불쾌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데에는 자신 있고 익숙했지만.
본인이 불편해하는 데엔 한없이 약했다.
게다가 힐리아의 눈빛이 너무 기묘하고 이상했다.
‘이번에 처음 보는데 지나친… 호의 아닌가.’
호화로운 다과상도, 그녀가 직접 건넨 차도 그렇고.
율켄이 잠시 이런 걱정을 할 정도로.
‘설마… 내 외모를 보고 한눈에 반한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큰일이다.
물론 율켄은 제 외모에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인간 같지 않아 보이는 외모를 가진 주인과의 격차 정도는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사람마다 취향 차이는 있을 수 있잖아?’
이건 논리적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제대로 인사하는 게 처음인 상황에서 힐리아가 지나치게 호의 넘치는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설마, 설마 내가… 델핀 공녀의 취향이라던가 그런 건 아니겠지?!’
당사자가 들으면 웃으면서 바닥을 구를 거다.
하지만 율켄은 자신이 회귀 전에 루드비히 암살 시도를 하다가 실패했다는 걸 몰랐다.
루드비히와 에반젤린에 대한 찰진 욕으로, 감옥 옆방 친구(?)였던 힐리아의 호감을 샀다는 건 더욱 몰랐다.
지금의 화려한 다과상이 그때의 결과물이라는 것도 알 리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율켄으로서는 ‘첫눈에 반했다’ 외에 뾰족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덕분에 율켄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긴장감을 느껴야 했다.
‘아니, 안 돼! 아무리 상대가 달콤한 솜사탕처럼 생긴 미녀라고 해도!’
펠릭스 율켄은 스스로 다짐했다.
‘나에게 난데없는 호감을 적극적으로 들이대도 안 돼!’
안 될 이유는 사방에 산재해 있었다.
‘아무리 황태자비로 인정은 못 해도, 아르파드 전하와 혼인 성사를 올린 사람이라고!’
결론은 이거다.
‘불륜은 안 돼!’
하급 귀족가 출신으로 부친의 불륜으로 모친이 고생한 경험이 있었기에 그는 불륜을 매우 싫어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말하는 연애결혼은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안 돼!’
방금 한 생각은 어쩐지 변명 같다는 걸 율켄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율켄이 난처함과 기묘한 감정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데, 힐리아가 전혀 예상 못 한 걸 지적했다.
“왜 나에게 ‘비 전하’라는 호칭을 쓰지 않는 거죠?”
“내가 황태자비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죠? 아르파드 전하께 걸림돌이 될 거라고.”
조금 전까지 헛생각하느라 바빴던 율켄이 번쩍 정신을 차렸다.
‘아, 맞다. 나 선전포고할 겸 온 거였지?’
그제야 자신의 원래 목적을 깨달았다.
펠릭스 율켄은 눈을 똑바로 뜨고 눈앞에 있는 여자를 다시 상대하기 시작했다.
내내 불편함과 당황을 감추지 못하던 율켄은 곧 평소의 비서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유들유들하게 힐리아의 공격을 넘겼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아직 대화를 몇 마디 나누지도 못했는데…….”
힐리아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에도 아직 한 번도 나를 ‘비 전하’라고 부르지 않았죠.”
“…제가 그랬습니까? 미처 몰랐습니다.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율켄은 틈 하나 보이지 않는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비 전하’라는 호칭은 쓰지 않았다.
그게 바로 율켄의 고집이었으니까.
‘아무리 아르파드 전하께서 갑자기 광증이 도지셔서 약탈해 온 신부라곤 하지만, 그래도 황태자비로 인정받으려면 능력을 보여 줘야지!’
그게 바로 율켄의 신조였다.
그리고 힐리아는 율켄의 그런 생각을 마치 손바닥 들여다보듯 콕 찔렀다.
“내가 아직 황태자비에 어울리는 능력을 못 보여 줘서 그런 거죠?”
“…….”
이쯤 되자 율켄은 솔직히 물었다.
“혹시 독심술이라도 하십니까?”
힐리아는 환하게 웃었다.
“아니에요. 그냥… 비서관의 능력주의는 유명하니까요. 본인의 능력도 출중하고.”
율켄은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이시긴 합니다.”
절대 겸양은 하지 않는 것이 율켄의 또 다른 신조였다.
‘그건 능력 있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예의가 아니다!’
이것이 율켄의 생각이었다.
동시에.
‘내가 마음에 없는 겸양을 떨면, 진짜 능력 없는 사람은 얼마나 모욕감을 느끼겠어!’
이런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마치 이런 점까지 안다는 것처럼 힐리아는 부드럽게 말했다.
“나도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고귀한 자리에 오르려면 그만한 능력을 보여 줘야 하는 건 당연하니까.”
그리고 루드비히와 에반젤린이 그 기준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만은 율켄과 힐리아가 공유하는 생각이었다.
힐리아는 그것만으로도 율켄을 좋게 봐줄 의사가 충분했다.
“하면 제가 명에 따를 수 없음도 이해해 주시겠군요.”
하지만 힐리아는 입을 싹 닦았다.
“이것과 그건 별개죠. 날 황태자비로 인정하든 못하든, 내 명령은 따라야 해요.”
“…….”
펠릭스 율켄. 27년 인생에서 처음으로 말문이 막히는 경험을 했다.
* * *
율켄은 드물게도 할 말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진짜 의외네. 단두대에서 목 날아가기 직전까지 떠들던 사람이.’
어쨌건 힐리아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준비해 온 서류를 율켄의 앞으로 쭉 내밀었다.
“읽어 봐요.”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건지…….”
율켄은 마지막 자존심, 혹은 관성을 지키려는 것 같아 보였다.
‘힐리아를 쉽게 인정할 수 없다’ 라는 생각을 오기처럼 잡고 버티는 중인 것이다.
그걸 한 방에 박살 내는 방법은 간단했다.
그녀는 웃으며 장담했다.
“나랑 내기할래요?”
“갑자기 웬 내기 말씀이십니까?”
귀엽고 심약한 인상을 가진 주제에, 혀는 칼보다 날카롭고 표정은 아주 더러운 게 율켄이다.
팍 찌그러진 얼굴을 보며 힐리아는 자신 있게 장담했다.
“나는 당신이 그 서류를 보고 나면, 날 ‘비 전하’라 부를 거라는 데에 100만 카스텔을 걸죠.”
100만 카스텔은 대략 율켄의 한 달 치 봉급과 비슷한 금액이다.
“하지만 아직 황태자비의 예산 집행권을 가지지 못하셨지 않습니까?”
한 마디로 ‘그 돈 어디서 나서?’ 라는 대답이다.
‘이런 일로 황태자궁 예산 축내지 마라’는 경고도 된다.
다 알아듣고도 힐리아는 환하게 웃었다.
“그야 나는 델핀 공작가의 가주니까요.”
“아.”
율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힐리아가 델핀저의 단속에 성공한 건 이미 소문이 나 있었다.
특히 율켄은 좀 더 자세히 아는 편이었다.
‘세간의 소문과 달리 아르파드 전하의 도움 없이 일을 해결하긴 했지.’
물론 이건 율켄이 용병왕 제랄드가 사실 아르파드라는 걸 몰라서 벌어진 오해였다.
그 때문에 율켄 입장에서 델핀저의 일은 힐리아 본인의 힘만으로 해결한 것으로 보였다.
‘용병왕 제랄드는 버릇없게도 황태자궁의 접근도 전부 무시하는 놈인데 말이야. 대체 어떻게 고용한 거지?’
당연히 외부에서도 율켄처럼 보고 있었다. 힐리아가 예상한 대로.
델핀저의 일 이후 솔직히 율켄은 힐리아를 조금 재평가했다.
이 소식을 미리 듣지 않았다면, 온갖 핑계를 대서 부름을 거절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불려 왔어도 그녀의 말을 제대로 안 듣거나, 명령에 태업하는 것으로 간접적으로 무시했을 거다.
지금 진지하게 경계 중인 것 자체가 율켄 나름대로 그녀를 조금은 인정한 결과였다.
물론 힐리아는 그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었지만.
힐리아는 고개를 들고, 화사하게 웃으며 물었다.
“내기, 할래요, 말래요?”
율켄은 잠시 멍하니 힐리아의 미모를 감상하며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턱을 치켜든 각도에서도 아름다워 보이긴 정말 어려운데, 미모 하나는 진짜…….’
그리고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게 아니지!’
율켄이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을 했는지 모르는 힐리아는 서류를 잡아당기려 했다.
“뭐, 싫으면 어쩔 수 없죠.”
하지만 서류가 움직이지 않았다.
반대편을 율켄이 잡고 있었던 것이다.
“내기를 안 하겠다고는 말 안 했습니다.”
‘어쨌건 100만 카스텔이라니. 그만한 공돈이 굴러들어오는 걸 마다할 필요는 없지.’
게다가 힐리아는 델핀 가문까지 걸고, 내기에 걸린 돈을 지급해 줄 수 있다고 보증했다.
율켄 입장에서는 승리가 확보된 내기로만 보였다.
‘내가 한번 보고 바로 ‘비 전하’라 부를 서류라니, 그런 게 있을 리 없지!’
율켄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힐리아는 유쾌하게 웃으며, 순순히 서류를 당기던 손을 놔주었다.
그 웃음에 율켄은 다시 한번 넋을 빼놓고 힐리아를 보고만 있을 뻔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찾은 상태로 율켄은 서류에 눈을 가져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율켄의 두 눈이 뒤통수를 때리면 튕겨 나갈까 걱정될 정도로 부릅떠졌다.
“이, 이건……!”
힐리아는 벚꽃 잎에 어린 봄 햇살처럼 투명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자세한 증거는 비서관이 직접 찾아내야 해요. 그들이 전부라는 보장도 없고요.”
“하지만, 이건……!”
율켄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종이가 파사삭 구겨졌다.
힐리아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물었다.
“하지만 쓸모가 있겠죠?”
대답을 알고 묻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힐리아가 원하던 대답이 율켄의 입에서 나왔다.
“물론입니다, 비 전하!”
약탈혼이 성립된 이후, 아르파드의 측근 중 가장 능력 있는 펠릭스 율켄의 입에서 처음으로 ‘비 전하’ 라는 호칭이 나온 순간이었다.
힐리아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좋아. 이걸로 황태자궁 내부 정리도 끝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