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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41화 (41/210)

41화

나는 잔에 반 이상 남은 보라색 꽃차를 필레른 부인의 얼굴과 가슴팍에 확 뿌려 버렸다.

“어. 머. 손. 이. 미. 끄. 러. 졌. 네. 요?”

“꺄악! 이게 무슨 짓이에요?!”

나는 오호호 웃으며 대답했다.

“개도 안 주워 먹을 소리를 들었더니, 너무 놀라서 손이 떨렸나 봐요.”

“…하세요, 전하?”

“…….”

“제 말 듣고 계신가요, 전하?”

필레른 자작 부인은 조금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뽀송했고, 연회색 드레스에는 어떤 얼룩도 없었다.

그렇다.

필레른 부인 면전에 차를 뿌리진 않았다. 상상일 뿐.

‘사실 진짜 그렇게 해 버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긴 한데…….’

그러면 잠깐은 시원할 거다.

하지만 그걸 위해 섣부르게 행동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웃으며 차를 홀짝 다 마셨다.

솔직히 말하자면, 필레른 부인이 떠드는 소리를 더 듣다간 얼굴에 진짜 부어 버리고 싶어질 것 같아서였다.

‘그래도 차는 맛있네.’

찻잎과 레몬의 상큼함에 꿀을 넣어 달콤함이 절묘했다.

이 차는 요즘 사교계에서 젊은 영애들 사이에 유행이라는 샤링가 꽃잎차였다.

원래 파란색인 차에 레몬을 넣으면 진한 보라색이 되었다.

그 과정이 신기하고 예뻐서 요즘 영애들이나 젊은 귀부인들이 많이 마신다.

미용에 좋다는 소문도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보라색으로 변한 뒤에 천 종류에 찻물이 튀면 염색되어 버려서, 얼룩이 절대 안 지워지는 걸로 유명하지.’

그러니까 이걸 지금 밝은색 옷을 입은 필레른 자작 부인에게 부어 버리면 매우 기겁할 거다.

‘하지만… 참아야 하느니라, 힐리아.’

이 차를 보자 아주 중요하고, 지금 내게 딱 필요한 사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연히 필레른 자작 부인은 아니었다.

나는 필레른 자작 부인이 ‘사과, 사과’ 앵무새처럼 떠드는 걸 대충 무시한 다음 돌려보냈다.

“아아, 제가 요즘 너무 피곤해서 더는 대화가 어려울 것 같군요, 필레른 부인.”

“아, 하지만, 비 전하. 아직 사과하겠다고 확답을 안 주셨……!”

나는 휘청거리는 척을 했다.

그러자 눈치가 귀신 같은 애니가 부축해 주며 중얼거렸다.

“정신 차리세요, 비 전하. 황태자 전하께서도 너무하시지. 조금만 애정을 참으셔야…….”

“그런 소리 하지 마렴, 애니.”

이 말에 필레른 부인은 더 앵무새 짓을 하지 못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아르파드가 밤에 지나치게 뜨겁다는 소문이 과하게 퍼질 것 같은 느낌인데…….’

뭐, 나에겐 나쁠 게 없으니 상관없겠지.

그리고 필레른 부인이 에반젤린에게 고대로 가져다 바치면, 아마 화를 내지 않을까.

‘나는 에반젤린을 열 받게 하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 * *

그리고 힐리아의 희생(?)은 성과를 보였다.

필레른 자작 부인이 황태자궁에 다녀왔다는 소리를 듣고, 에반젤린이 바로 자신의 저택으로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전혀 기대하지 않은 대답만 잔뜩 들어 버렸다.

“나한테 공식으로 사과하겠대? 그게 유리하다고 꼬드기라고 했잖아! 그래야 아르타누스 홀의 연회에 사람들이 코빼기라도 비칠 거라고!”

실제로 필레른 부인은 그 논리로 계속 힐리아를 설득했다.

그리고 당연히 전혀 효과가 없었다.

“저어, 그게… 사과하겠다는 대답을 안 해 주다가… 어젯밤에 황태자 전하께서 너무 괴롭히셔서 피곤하다고 절 쫓아내더라고요.”

필레른 부인은 에반젤린이 아르파드를 좋아한다는 걸 몰랐다.

자신의 탓으로 실패한 게 아니라고 변명하려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도리어 에반젤린의 염장을 질렀다.

‘지금 이게 날 놀리는 건가?!’

에반젤린은 들고 있던 찻잔을 필레른 부인에게 내던졌다.

촥―!

“꺅!”

찻물이 필레른 부인의 얼굴과 상체를 적셨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찻잔이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쨍그랑!

“에, 에, 에반젤린 양! 어떻게 이럴 수가!”

공교롭게도, 에반젤린이 마시던 차도 샤링가 꽃잎차였다.

게다가 필레른 부인이 입은 옷은 여전히 옅은 색이었기 때문에 진한 보라색 얼룩이 남아 버렸다.

“어, 어떡하면 좋아…….”

이건 황궁에 들어갈 때 입었던 만큼, 그녀의 옷 중 가장 비싼 거였다.

필레른 부인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찻물을 닦아 냈다.

이건 우연히도, 조금 전 힐리아가 상상한 것과 아주 비슷한 광경이었다.

물론 가해자가 에반젤린이니 힐리아가 알았다 하더라도 별로 통쾌하진 못했으리라.

울먹거리는 필레른 부인을 에반젤린은 차갑게 노려보며 내쫓았다.

“그 계집애 입에서 나에게 사과하겠다는 소리가 나오기 전까지 얼씬거릴 생각도 하지 마요!”

필레른 자작 부인은 어깨가 축 처진 채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 * *

필레른 부인을 대충 돌려보낸 뒤.

나는 황태자의 비서관 율켄을 불렀다.

지난번에 아르파드 집무실로 찾아갈 때 얼굴을 한 번 본 적 있긴 했지만, 제대로 인사하는 건 처음이다.

“찾으셨습니까.”

“어서 와요, 펠릭스 율켄 비서관.”

율켄은 회귀 전에는 나와 직접 연관이 있던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내적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루드비히나 에반젤린 편이 되지 않을 사람이니까!’

그것만으로도 호감도 만땅이다.

지난 세 번의 생에서도, 율켄 역시 늘 끝이 좋지 못했다.

매번 루드비히를 황태자로 절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가 아르파드의 엄청난 충신이라서…는 아니었다.

“차라리 유능한 미친놈 손에 나라가 망하는 게 낫지! 무능하고 욕심 많은 놈이 위에 앉아서 나라를 천천히 말려 죽이는 꼴은 못 보겠다!”

…라고 외치면서, 단신으로 루드비히 암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놀랍게도 거의 성공할 뻔했다.

결국은 실패해서 목이 잘렸지만.

나는 율켄이 루드비히에 대해 독설을 날리는 걸 직접 들었었다.

바로… 감옥 옆방에서.

율켄은 매일 루드비히와 에반젤린 욕을 창의적으로 해 댔다.

“선황께선 광증이 없으셨다는데, 그게 아닌 거 같단 말이지! 루드비히 같은 무능한 놈을 선택하다니, 그게 광증이지. 다른 게 광증이겠어!”

“불륜으로 생긴 자식이라 생부인 키엘른 대공도 외면한 놈이 황족으로 인정받은 것도 말이 안 되는데, 황제라니!”

“정식 부인 놔두고 내연녀를 황후궁에 앉히다니, 역시 불륜하던 부모의 피를 너무 잘 이어받았나 봐!”

거의 광기까지 느껴지는 온갖 비난과 욕설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옆방에서 그걸 들으면서 나는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하지만…….

‘그 입담에 이미 팬이 돼 버렸는걸!’

그렇다.

너무 소심했던 나는 욕설 섞인 말에 맞장구도 못 쳤지만, 그의 말을 들으며 몰래 통쾌해했다.

그때 율켄은 정말로 매일 욕을 해 댔는데, 목소리가 다 쉴 정도였다.

당연히 위쪽의 미움을 샀기에 식사는커녕 물도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힘이 빠져 어쩔 수 없이 옆방이 조용해지자, 나는 너무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애써 용기를 냈다.

오래된 감옥은 금이 간 곳이 가득했다.

그 사이로 벌레와 쥐들이 오고 갔다.

간수가 안 볼 때를 골라, 나는 그중 꽤 큰 구멍을 통해 내 몫의 흑빵을 몰래 잘게 뜯어 넣어 주었다.

톡톡톡!

벽을 몇 번 두드리자 율켄은 뒤늦게 눈치챈 듯했다.

놀란 듯 다 쉰 목소리가 벽 너머로 들려왔다.

“누군진 모르지만… 쿨럭, 나… 주는 겁니까……?”

“…네. 옆에서 듣고 있는데, 너무 통쾌했거든요.”

율켄은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아서… 그, 그게 응원하고 싶어서요.”

율켄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웃으면서 장난스레 물었다.

)“혹시, 크흡! 내… 팬이라도 되는, 겁니까?”

“네, 맞아요! 응원하고 있어요!”

그리고 난 율켄이 굶어 죽거나 목이 잘리는 것보다, 웃다가 죽는 게 아닐까 걱정해야 했다.

진짜 미친 듯이 웃는 소리가 멀리 있는 다른 방까지 들리는 듯했으니까.

그리고 잠시 뒤, 내가 넘겨준 빵조각이 쓱 사라졌다.

율켄은 조금 힘이 돌아온 듯 이렇게 묻기까지 했다.

“물은, 켁! 없습니까? …목이 메는데.”

우리는 벽 사이 적당한 틈새를 또 찾아냈다.

내가 거기로 물을 흘려주었고, 율켄은 그걸 달게 받아 마셨다.

“아, 먼지랑 곰팡이가… 최고급 차보다 맛있을 줄은 몰랐네요.”

“미, 미안해요. 이것밖에…….”

“…아뇨, 고맙습니다. 덕분에, 힘이 좀 나네요.”

그리고 율켄은 다시 고래고래 욕설을 내뱉었다.

질린 간수들이 달려와서 말렸으나, 지나치게 힘을 얻은 율켄은 절대 그만두지 않았다.

이틀 뒤, 단두대로 끌려가서까지도.

그는 사형장에서도 계속 루드비히와 에반젤린을 욕했다.

“내연녀가 실세라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루드비히는 그냥 바지 황제라고! 나라 꼴이 이래도 되는 거야?”

“그냥 망해라! 망해 버려!”

꽤 떨어진 감옥에서 내가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때를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눈이 반짝거린 모양이다.

“왜… 그러시는지요?”

율켄이 아주 부담스러워하며 앉은 소파에서 엉덩이를 뒤로 뺐기 때문이다.

그 사이, 애니가 가져온 다과가 우리 사이에 차려졌다.

내 특별한 명령 때문에 다과상은 아주 호화찬란했다.

쉰내 나는 흑빵 쪼가리가 아니라, 테이블 다리가 부러질 것처럼 달콤하고 보드라운 디저트가 한가득.

이번엔 곰팡이와 먼지 맛 물이 아니라 최고급 차를 준비했다.

내가 직접 차를 따라 건네자, 율켄은 더더욱 부담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가, 감사, 합니다……?”

“혹시 차가 입에 안 맞으면 말해요. 샴페인도 준비하도록 했으니까.”

“…….”

율켄은 입이 근질거리는 걸 애써 막으려는 듯 차를 마셨다.

나는 제멋대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단속하며 본론을 꺼냈다.

지금은 내 팬심과 추억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으니까.

“한 가지 명할 게 있어서 불렀어요.”

조금 전까지 내 영문 모를 호의에 불안해하던 율켄의 표정이 확 굳었다.

조금 전은 불가해와 부담스러움이었다면, 지금 드러낸 감정은 불쾌감과 경계심이다.

그는 나에게 물었다.

“방금 명하실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까?”

목소리에 가시가 콕콕 박힌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해맑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지금 비서관의 질문은 내가 그대에게 명령할 자격이 없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맞나요?”

회귀 전의 팬심과 호감이야 사실이지만, 지금은 지금이다.

저번에 아르파드의 집무실에서 마주쳤을 때도 그랬지만, 율켄의 얼굴에는 대놓고 쓰여 있었다.

‘나는 당신 못 믿어! 황태자비로 인정 못 해!’

이렇게 말이다.

그리고 율켄은 아르파드의 측근 중에서도 아주 중요한 인재였다.

나는 해사하게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역시 에시아가 그렇게 행동하도록 뒤에서 분위기를 만든 건 당신이군요, 펠릭스 율켄 비서관.”

“…!”

율켄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대충 ‘어떻게 눈치챘지?’ 이런 눈빛이다.

하지만 그는 뻔뻔하게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얼마 전에 무례한 죄로 돌려보내신 하녀라면 새로 교육 중입니다. 그 배후에 제가 있다니요. 너무 과한 해석이십니다.”

그는 방긋방긋 웃으면서 꼬리를 뺐다.

역시 쉽지 않았다.

‘하긴, 그래야 율켄답긴 하지.’

도리어 반가울 지경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율켄의 경계심과 의심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델핀저 내부를 단속했던 것처럼 황태자궁 내부도 최대한 빨리 단속을 끝내야 했다.

‘속전속결로 끝낸다!’

나는 다리를 꼬며 바로 핵심을 쿡 찌르고 들어갔다.

“왜 나에게 ‘비 전하’라는 호칭을 쓰지 않는 거죠?”

나를 아직 황태자비로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많았다.

하지만 황태자궁에 소속된 이들은 다르다.

여기서만은 다들 나를 ‘비 전하’라 불렀다.

단 한 명, 율켄만 제외하고.

나는 빙긋 웃으며 물었다.

“내가 황태자비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죠? 아르파드 전하께 걸림돌이 될 거라고.”

안경 너머로, 율켄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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