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루드비히와 힐리아 사이의 갈등은, 루드비히의 굴욕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델핀저에서 키엘른 대공저로 고소장을 보내면서 사람들은 모두 알게 되었다.
고소 사유는 델핀 가의 사유 재산에 대한 횡령과 영지 불법 점유였다.
이제 시작일 뿐이지만 증거와 증인, 서류가 완벽하다고 했다.
죄명 중 어느 쪽이든 귀족들이 예민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그 때문에 황족이라는 이유로 관대한 처벌을 기대하기도 힘들었다.
무엇보다 그동안 루드비히의 뒤를 봐주던 황제가 이번에도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아니, 다들 황제가 이번엔 그럴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이미 만취해서 벌인 추태로 그의 평판은 나락으로 추락한 상태.
저런 인간이 황제가 되면 안 된다는 여론이 들불처럼 일었다.
거기에 델핀 공작가의 고소가 더해지자, 사람들은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루드비히가 황위는커녕, 델핀 공작가를 손에 넣는 것도 요원해졌다는 걸.
‘루드비히는 이제 끝났다!’
그리고 다들 이번 일의 배후가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르파드 황태자.’
루드비히가 추태를 부린 것이 지나치게 보는 눈이 많은 장소와 때였다.
거기에 타이밍을 잘 맞추어 바로 고소가 들어갔고, 준비도 완벽했다.
너무나도 짜 맞춘 것처럼 착착 일이 돌아갔다. 누구라도 이번 일에는 배후가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게 힐리아일 거라 생각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을 뿐.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힐리아의 이미지가 그러했다.
그녀에게 루드비히의 몰락을 직접 계획해서 실행에 옮길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 소문을 전해 주며 아르파드는 물었다.
“분하지 않나?”
“뭐가요?”
“이번 일은 전적으로 당신이 한 거잖아. 나는 그냥 손만 보탰지.”
하지만 이번 일로 아르파드는 정적을 쳐 낸 유능하고 무서운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얻었다.
힐리아는 거기에 이용당한 것으로 여겨질 뿐.
사람이라면 분하고 화가 날만도 했다.
하지만 힐리아는 조용히, 아니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오히려 좋아요.”
“…좋다고?”
“아직은 당신의 그림자 뒤에 숨어 있을 시간이 필요해요.”
힐리아는 자신의 이미지를 철저히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러면서도 장담했다.
“어차피 한 달만 지나면 사람들이 얕보고 싶어도, 날 얕볼 수 없게 될 테니까.”
벚꽃 잎을 설탕에 절인 것처럼 달콤한 미소였다. 하지만 그 안에 독이 숨어 있다는 걸 아르파드만은 알았다.
그리고 힐리아는 의외의 말을 했다.
“아, 그리고 아무도 모르지는 않잖아요.”
“응?”
힐리아의 가는 손가락이 대담하게 아르파드를 가리켰다.
“당신은 알잖아.”
“…그렇지.”
힐리아는 해사하게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거면 충분해요.”
너무 맑게 웃는 여자의 미소를 보면서 아르파드는 잠시 고민했다.
‘이 여자가 일부러 이러는 걸까, 아니면 그냥 타고난 걸까.’
어느 쪽이든 좀 두려워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Chapter 6. 전초전
어쨌건, 이번 일로 오랜만에 황도 사교계는 활기를 띠었다.
원래 사람들은 미담을 나눌 때보다 험담을 주고받을 때 더 즐거워하니까.
지난 며칠간 어딜 가든 다들 ‘그 소문’부터 입에 담았다.
“들으셨어요, 루드비히 대공이…….”
“게다가, 델핀저를 아예 자기 것처럼 썼다고 하는군요. 돌려보낸 짐이 마차 다섯 대 분이 넘었대요!”
“세상에. 그런데 그 소문도 들으셨어요? 이번에 델핀저에서 에반젤린 양의 짐도 돌려보냈다던데.”
이 소식에는 다들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공이야 그동안 약혼자로서 델핀저에서 함께 지냈다지만, 에반젤린 양의 짐이요?”
“이상하네요. 보통 다른 사람의 집에 마차로 실어 보낼 정도의 자신의 짐이 쌓여 있나요?”
“설마요. 거기서 생활이라도 하지 않은 이상…….”
그 시점에서 다들 굳이 입에 담지 않았지만,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었다.
‘혹시 루드비히 대공과 에반젤린 양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나?’
‘진짜라면 꽤 큰 스캔들인데?’
‘혹시 대공과 델핀 공녀의 결혼이 파투 난 진짜 이유가……?’
다들 상상력을 발휘해서 흥미 넘치는 화제를 씹어 대던 차였다.
사교계 곳곳에 포진한 에반젤린의 측근 영애들이 열심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에반젤린의 명령에 따라 우선 사건을 분리하려 했다.
“에이, 이 건과 그 건은 별개의 일이죠.”
“맞아요. 루드비히 대공과 에반젤린 양의 일은 다른 사건이에요. 그렇게 보시는 건 억측이죠.”
“아마 황후께서 들으시면 심기가 불편하실걸요?”
황후의 권위까지 가져와 입막음을 시도하며 변명까지 알아서 해 주었다.
“그야 친한 친구 집에 자주 드나들다 보면 짐이 쌓이기도 하는 법이죠.”
“저도 그런걸요! 그만큼 친하단 소리예요.”
“맞아요. 그동안 에반젤린 양이 델핀 공녀를 돌봐 준 건 유명하잖아요?”
그들은 희한한 논리 비약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나저나 델핀 공녀 너무하지 않아요?”
“너무 가혹해요. 그동안 돌봐 준 다정한 친구를 이렇게 모욕적으로 내치다니.”
“자기가 황태자비가 되었다고 생각해서 에반젤린 양을 팽하려는 거예요.”
“너무해! 에반젤린 양이 얼마나 상처받았을까!”
선황후가 죽은 후 황도를 중심으로 한 사교계는 황후 이자벨과 그 딸 에반젤린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전력으로 나서서 여론을 바꾸려 들자 효과가 바로 나타났다.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붙여 가며 그들은 에반젤린을 피해자로, 힐리아를 가해자로 만들려 노력했다.
이 여론전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황후궁에서 열린 살롱에 참여한 에반젤린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사교계의 꽃답게 늘 화려하고 고운 옷만 입었는데 마치 상복과도 같은 진회색의 초라한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
게다가 안색이 파리해서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보였다.
에반젤린의 추종자들이 그녀의 곁으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괜찮으세요, 에반젤린 양?”
“예쁜 얼굴이 반쪽이 되셨어요.”
“얼마나 상심이 크세요?”
에반젤린은 처연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그분께서 아마 뭔가 오해를 하셨나 봐요. 전부 제 탓이죠.”
에반젤린은 힐리아를 ‘그분’이라 칭해서 높이는 척하면서 절대 황태자비라 부르지 않았다.
‘절대, 죽는 한이 있어도 그렇게 안 부를 거야.’
그럴 리는 없지만, 설사 황제가 아르파드와 힐리아의 결혼을 허락한다 해도.
힐리아를 황태자비 전하라 부르며, 그 앞에서 무릎을 굽혀 인사하는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랬다간 자신이 진짜 진 것 같을 거다.
‘기껏해야 소설 캐릭터 따위에게.’
에반젤린은 서글픈 표정으로 가련하고 상처받은 피해자를 계속 연기했다.
“그분과 진정한 우정을 나눴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각한 건 저뿐이었던 모양이에요.”
“아니에요! 에반젤린 양이 아니면 그 사교성 없는 델핀 공녀가 어떻게 사교계에서 자리를 얻을 수 있었겠어요.”
“맞아요! 전부 에반젤린 양 덕분이었는 걸요!”
원래 군중은 대중적인 이미지와 소문에 잘 흔들리는 법이다.
에반젤린은 그걸 잘 이용할 줄 알았다.
결국 참지 못한 척 에반젤린은 수정알 같은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
그리고 이 장면은 삽화로 그려져 바로 다음 날부터 왕도 귀족들의 사교계 모임 소식지에 하나도 남김없이 실렸다.
실물보다 몇 배로 아름답고 가련한 모습으로.
당연히 수도 귀족들 사이에서는 에반젤린에 대한 동정 여론이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에반젤린에게 호의적이었던 사교계 분위기를 다시 휘어잡는 데에는 눈물 한 방울이면 충분했다.
* * *
나는 하룻밤 만에 델핀 공작저를 정리하고 다시 황태자궁으로 돌아왔다.
당연히 그동안 아르파드는 내내 황태자궁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나 혼자 움직여 델핀 공작가를 단속하고, 루드비히를 쫓아낸 다음 두 불륜 남녀의 짐을 싹 돌려보냈다.
일부러 보는 사람이 많을 때 보냈기 때문에 이를 놓고 소문이 안 돌 수 없었다.
그리고 소문이 도는 양상을 확인하자,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였다.
‘에반젤린이 루드비히를 손절했네.’
적어도 당장 본인을 향하는 미심쩍은 시선은 루드비히를 방패 삼아 넘기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보를 앉아서 그냥 듣고 있었다.
“그래서… 에반젤린 양이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황후궁의 살롱에서 눈물까지 보였다고요. 다들 동정하고 있어요.”
그 소식은 나도 이미 들었다. 소식지에 그려진 삽화도 봤고.
‘진짜 가증스러웠지.’
델핀저의 일이 있었던 직후 필레른 자작 부인은 득달같이 달려오더니 매일같이 황태자궁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이 예정된 배신자가 개심했다거나 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상상이 충분히 갔다.
‘어지간히 에반젤린에게 볶인 모양이네.’
아마 내 옆에 붙은 첩자 주제에 델핀저의 일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못 가져왔다고 까인 모양이었다.
“세상에! 전하, 저는 전하의 하나뿐인 친구 아닌가요? 이렇게 중요한 일을 미리 알려 주지 않으시다니 너무 슬퍼요!”
“어쩔 수가 없었어요. 황태자 전하께서 갑자기 명하신 일이라.”
나는 잘못된 정보를 흘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번 일이 내가 아니라 아르파드가 벌인 것이라고 믿도록.’
그래야 이 여자도, 에반젤린도, 황후도 나를 얕볼 테니까.
지금은 아직 본 모습을 보일 때가 아니었다.
필레른 자작 부인은 당치도 않게 나를 설득하려 들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전하. 에반젤린 양에게 화해를 청해 보시는 건 어때요?”
“화해요?”
무슨 죽일 놈의 화해?
그러자 필레른 자작 부인이 손뼉을 짝, 하고 쳤다.
“아, 이건 적절하지 않겠네요.”
그리고 스스로 말을 정정했다. 나쁜 쪽으로.
“전하께서 사과하셔야죠!”
필레른 자작 부인은 활짝 웃었다.
‘뭐래, 이 XXX이?’
찻잔을 쥔 내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