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의기양양한 채, 나는 아르파드의 대답을 기다렸다.
내 옆에서 아래쪽 길에서 벌어지는 꼴을 굽어보면서, 아르파드는 내내 미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꽤 만족스러워 보이는 미소다.
루드비히가 밖에서 추태를 부리는 것도.
용병단을 통해 미리 뿌려 둔 바람잡이들이 그의 추태를 널리 퍼뜨리는 것도.
‘이번 일에 대한 소문이 단단히 나면, 루드비히가 황제감이 아니라는 건 다들 알게 될 거야.’
그리고 이건 아르파드가 원하던 바일 터다.
당연히 그는 기뻐해야 했다.
그런데.
아르파드는 어쩐지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분명히 아까 루드비히가 네발로 길 때는 못 참고 웃음까지 터뜨렸잖아.
그런데 지금은 아르파드가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확실한 건 통쾌해하거나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이 아니라는 거다.
‘지금은 또 뭐가 마음에 안 든 건데?’
진짜 종잡기 힘든 인간이다.
그는 턱짓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아주 간절히 부르고 있군.”
“네? 뭘요?”
그때 루드비히가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또 내질렀다.
“히리아―! 어서 나와! 히리아! 힐리아―!”
귀를 기울여서 듣자,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어떤 느낌인가?”
“뭐가요?”
아까부터 왜 뜬금없는 말만 해 대는 건지 모르겠다.
“전 약혼자가 오매불망 그대의 이름만 부르고 있는데 조금도 흔들리지 않나?”
이 순간, 나는 겨우 아르파드의 표정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지금… 매우 불쾌해하고 있었다.
나는 곧 한 가지를 깨달았다.
‘아, 하긴. 루드비히의 추태가 좀 심하긴 하지.’
나도 그가 실금하는 건 예상 못 했다.
하지만 루드비히가 실금한 건 전부 아르파드 때문이다.
그러니까 누가 어제 그렇게 과한 살기를 풍기랬나.
아무리 정적이라도 아르파드는 자긍심과 자존심이 아주 높은 듯 보였다.
지금 루드비히가 이족 보행을 포기하고 있는 건 같은 황족으로서 부끄러울 만했다.
‘황족 전체의 위신은 챙기면서 루드비히를 쳐 내라는 거야? 욕심도 많아라.’
이 사실에 유감을 표하며 뚱하니 대답했다.
“황족의 위신이 실추된 건 아주 유감이에요.”
아르파드는 천천히 고개를 꼬았다.
“대답은 그게 전부인가?”
“무슨 대답이 더 필요하죠? 원하는 대답 있어요?”
아르파드는 실소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가면을 쓰더니, 제랄드의 모습으로 집무실에서 쌩하니 나가 버렸다.
‘별꼴이야, 정말!’
* * *
하늘의 중심에 떠오른 태양이 날카로운 햇살로 눈을 찔렀다.
루드비히는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 속에서 겨우 눈을 떴다.
“으, 끄으, 머리……!”
곁에 하인이 대기 중이었는지 루드비히에게 바로 시원한 물을 가져다주었다.
막 벌컥벌컥 물을 마시고 몸을 일으키던 그는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뭐야? 여긴 어디지?”
익숙한 델핀저 공작의 침실이 아니었다.
그러자 하인의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공저입니다. 전하.”
그제야 루드비히는 잘 아는 장소라는 걸 깨달았다.
대공저도 자주 오가긴 했지만, 주로 생활하지 않았더니 알아보는 게 늦었다.
루드비히는 깨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중얼거렸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질문과 동시에 분노로 뾰족하게 솟아오른 대답이 돌아왔다.
“이제야 눈을 떴네. 잘 잤어?”
다정하게 들릴 수 있는 내용이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그의 연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하지만 목소리는 얼음보다 차갑고 짜증으로 잔뜩 곤두서 있었다.
루드비히는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에바? 당신이 왜 여기에?”
잠시 루드비히를 노려보던 에반젤린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루드비히의 뺨을 올려붙였다.
짜악―!
살이 찢어지지 않을까 싶은 소리가 울리고, 루드비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에반젤린을 올려다보았다.
“너, 너, 감히!”
늘 루드비히가 진짜 화를 내려 하면 애교를 부리고 화제를 돌리던 에반젤린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거의 벌레 보듯 루드비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억 안 나? 네가 아침에 무슨 짓을 했는지?”
“내가 뭘 어쨌다고……!”
버럭 화를 내려던 루드비히의 안색이 곧 사색이 되었다.
목구멍 안쪽에서 올라오는 쓴 물을 따라, 어렴풋한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지난밤 힐리아가 델핀저로 찾아왔다.
그리고, 그리고…….
“히리아―! 내 거란 마리다! 히리아!”
짐승처럼 거리에서 네발로 기던 자신의 꼴.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이 그 꼴을 구경하는 모습.
기사도 아니고 천한 용병들 따위가 자신의 앞을 막아서던 광경까지.
루드비히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현실이 아닐 거야. 그렇지, 어?”
뺨 맞은 분노마저 잊고, 루드비히는 에반젤린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에반젤린은 경멸 어린 시선과 함께 사형 선고에 가까운 결론을 내려 주었다.
“아니, 전부 사실이야. 당신이 취해서 저지른 추태가 이미 수도를 한 바퀴 돌고도 남았다고.”
“아, 안 돼! 그럴 리가! 안 돼!”
루드비히는 죽어 가는 짐승처럼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두 사람의 수모는 아직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이었다.
에반젤린이 분노한 한편으로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지 머리를 굴리고 있던 차였다.
‘그냥 루드비히를 손절할까? 이건 너무 치명적이야.’
안 그래도 루드비히는 정통성이 너무 떨어지는 방계 황족이었다.
차라리 공포를 사는 건 괜찮다. 지배자의 입장에선 그게 낫다. 실제로 아르파드도 그런 타입이니.
그런데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소문이 덧붙는다? 최악이었다.
이걸 지우고 그를 황좌에 올리는 건 정말 어려웠다.
아무리 자신이 빙의자라 하더라도.
안 그래도 힐리아가 아르파드의 곁에 선 것을 본 후로 속이 쓰리던 차다.
그 와중에 이런 사건까지 벌어지고 나니, 정말 엮이고 싶지 않았다.
전에도 그랬지만, 갈수록 아르파드의 아름답고 늠름한 모습과 비교가 안 될 수 없었다.
‘아르파드는 술 따위에 취해 이딴 추태를 부린 적은 없단 말이다!’
그럼에도 아직 에반젤린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원작 남주인공이야.’
그녀는 여주인공의 자리를 자기 자신으로 바꿀 생각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변수가 많아지고 계산하기 어려운 상황이 마구 벌어진다.
마치, 지금처럼.
‘그런데 남주와 여주를 모두 바꾸는 게 과연 가능할까?’
그걸 생각하면 루드비히를 완전히 버리는 건 너무 위험한 짓일지도 몰랐다.
“지금 당신에 대해 소문이 어떻게 난 줄 알아?”
“어, 어, 어떻게?”
“전 약혼자의 집에 끈질기게 붙어 있다가, 술에 취해 실금까지 하면서 그 여자 이름을 부르며 매달린 개망나니가 되어 있다고!”
에반젤린이 루드비히를 비난하고 몰아붙이면서도,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루드비히가 원작의 남주인공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루드비히는 거의 넋을 놓은 상태로 에반젤린에게 매달렸다.
“나, 나 좀 살려 줘. 에바!”
그는 추하고 비굴하게 애걸했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 이걸 아시면 난 끝이야!”
머리를 감싸 쥐고 비명을 지르던 루드비히는 숙취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 비틀거렸다.
그러다가 에반젤린의 드레스를 잡고 구역질하기 시작했다.
“제발 나 좀! 우웨에에엑!”
“꺄아아악!!!”
두 남녀의 비명이 키엘른 대공저를 뒤흔들었다.
끔찍한 오늘이 이제 시작이라는 걸 두 남녀는 곧 깨닫게 되었다.
같은 날 오후 무렵, 델핀저에서 보낸 거대한 짐 마차가 키엘른 대공저 앞을 가득 메웠기 때문이다.
대공가의 고용인은 당황해서 물었다.
“이게 다 뭐요?”
“델핀 공작저에 남아 있던 대공 전하의 짐입니다.”
“뭐라고?”
“이제 혼사가 파기되었으니, 댁으로 돌려보내 드리라는 비 전하의 배려이십니다.”
그리고 대공저 3층 창문으로 그걸 보던 에반젤린은 퍼뜩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잠깐. 델핀저에는 내 짐도 많은데? 설마?’
그녀는 대공저에 들어올 때처럼 뒷문으로 나가서 자신의 집인 루스 후작저로 달려갔다.
그리고 키엘른 대공저의 앞에서와 비슷한 광경을 목격하고 넘어갈 뻔했다.
“아, 마침 후작 영애께서 오셨군요. 델핀저에 두셨던 영애의 짐을 하나도 빠짐없이 보내셨습니다. 여기, 수령장에 서명해 주십시오.”
에반젤린은 희게 질린 얼굴로 주변을 보았다.
사방에 호기심 가득한 시선이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귀를 쫑긋거리며 지금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아마 이 상황까지도 오늘 안에 황도 사교계는 물론이고, 평민들 사이에까지 소문이 다 돌 게 분명했다.
‘말도 안 돼! 내가 이런 망신을……!’
눈앞이 아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