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그걸 보면서 아르파드가 뭘 했냐고?
당연히 신이 나서는 장단을 잘 맞춰 주었다.
“우리 주인님께서 너무 자비로우셔서 걱정입니다. 이 정도로 용서해 주시다니.”
“목을 잘라도 부족하지 않은 죄인이지만, 적어도 저 혀가 한 번은 쓸모가 있을 수 있으니까.”
“과연 현명하시군요.”
장담하는데 아르파드가 시종의 피를 본 덕분에 내 협박이 효과가 더 좋았을 거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르파드에게 고마워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지금 그는 황태자가 아니라 용병이라고.’
고용주인 나를 위해 해야 할 일을 한 것뿐.
그래, 그것뿐이다.
* * *
아르파드는 고개를 모로 꼬더니 다시 물었다.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거야. 혀를 자르는 저주를 걸 수 있는 마도구라니, 진짠가?”
그는 아리송해 보였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인 상황 조건을 걸어서 거는 저주라…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아르파드의 시선이 집무실 테이블 위에 놓인 크리스털 새 조각에 집중되어 있었다.
나는 씩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야 당연히…….”
“당연히?”
일부러 대답에 시간을 끌었다. 아르파드의 궁금증이 더 무르익도록.
그리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새―빨간 거짓말이죠.”
그러자 아르파드의 눈빛에 미묘하지만 경탄이 어렸다. 동시에 흥미가 치솟는 게 보였다.
나는 크리스털 새를 든 채 시동어를 외웠다.
그러자 크리스털 새가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날개도 뾰롱뾰롱 움직였다.
아주 귀여웠다.
첨언하자면 아까 입 안에서 새 날개가 퍼덕거리자 시종은 더더욱 공포에 질렸었다.
“장난감이에요. 시동어만 말하면 그냥 빛이 나고 날개도 파닥파닥하는.”
흰빛이 예쁘게 깜빡거리는 걸 보여 준 다음, 시동어를 바꿨다.
그러자 유리 새의 색이 이리저리 바뀐다.
파란색, 노란색, 주황색, 보라색, 그리고 마지막은 빨간색.
아까는 일부러 빨간색 빛이 나오는 시동어를 썼다. 빛의 강도도 최고로.
‘그래야 최대한 위협적으로 보일 테니까.’
어린애 장난감이 아니라 가보인 위협적인 마도구라고 오해할 수 있게.
그러니까, 말하자면…….
‘사기를 친 거지.’
아니, 이 경우엔 정의 구현이라는 게 더 맞는 표현이다.
전 약혼자의 집에서 술에 떡이 되어 버티고 있던 망나니 루드비히.
그놈은 그동안 델핀 가의 재산과 땅을 열심히도 빼돌렸다.
그걸 밝혀내는 건 정의 구현 그 자체였다.
나는 킥킥거리며 크리스털 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건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주신 선물이었어요. 어릴 때 제일 좋아했던 장난감이죠.”
장난감치곤 아주 귀한 물건인 것도 맞았다.
그래서 굳이 벽에 장식되어 있었던 것이기도 하고.
아르파드는 긴 손가락으로 제 턱을 매만지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요?”
말이 뾰족하게 나가는 건 역시 지금 내 상황이 좋지 못해서일 거다.
“내가 어머니 유품까지 써서 협박하는 사기꾼이라니까 실망했어요?”
아르파드는 선선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히려 감탄했어.”
아주 긍정적인 의미의 대답이었다.
즐거움과 호감이 뚝뚝 묻어날 정도라 도리어 당황스러웠다.
“그렇게 따지면 나도 이미 어머니의 유품으로 그대와 함께 사기를 친 공범자 아닌가.”
아, 그랬지.
‘황제를 알현하러 갈 때 빌린 옷과 장신구가 선황후의 것이었지.’
이어진 말은 정말로 전혀 예상 못 한 것이었다.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이 나를 감쌌다.
“그리고 아마 그대의 어머니는 도리어 기뻐하실 거라 생각해.”
“…네?”
“방법이 어땠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대가 유리하게 사용했다면, 오히려 기뻐하실걸.”
솔직히 궤변이었다.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그러니 나는 어머니가 뭘 바라실지 모른다.
하지만 아르파드의 저 말은 바보 같게도 꽤 큰 위로가 되었다.
표정을 감추는 걸 잠시 잊고 아르파드를 바라볼 정도로.
그리고 이어진 그의 중얼거림에 내 감동은 파사삭 깨졌다.
“이 나를 협박한 게 그대니, 저런 피라미는 뼛속까지 발라먹어 줘야 그대에게 협박 결혼 당한 내가 안 억울하지.”
“말만 들으면 당신이 약탈혼 당한 줄 알겠어요?”
“실제론 그렇지 않나?”
…뭐래, 이 인간이. 진짜 미쳤나.
* * *
하룻밤 사이에 델핀저가 뒤집혔다.
그리고 이것을 주변 사람들은 아침 일찍부터 알게 되었다.
막 동이 틀 무렵, 황도의 유력한 귀족들의 수도 저택이 모여 있는 곳인 벨마 거리는 일찍부터 북적거렸다.
각 저택의 고용인들이 출근하거나 일을 시작할 시간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델핀저 앞에서 아침에 벌어진 광경은 목격자가 아주 많았다.
“어서, 어서 비키지 모테―!”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날이 밝으려는데도 꼬인 혀가 풀리지 않은 루드비히.
그가 괴성을 내지르며 허름한 옷을 입은 한 용병에게 달려들었다.
용병은 굳건한 벽처럼 앞을 막아섰다.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그저 버텼을 뿐인데, 루드비히는 버티지 못하고 나동그라졌다.
넝마가 되어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꼴이 꽤 우스웠다.
처음에 구경꾼들은 재밌어하며 기웃거리다가 경악했다.
“자, 잠깐 저 주정뱅… 아니, 저분 루드비히 대공님 아니셔?”
“어, 진짜!”
그동안 루드비히가 델핀저에서 살다시피 했기 때문에 얼굴을 아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난데없는 사태에 당황하면서도 호기심에 눈을 부릅뜨고 귀를 기울였다.
“처난 놈이 가미!”
고용인 중 배신자를 걸러 내고, 진술서를 모아 검토하는 동안 루드비히는 작은 방에 갇혀 있었다.
힐리아는 이렇게 명했다.
“가둬 두고, 술은 듬뿍 줘.”
당연히 루드비히의 술버릇을 잘 알기에 한 말이었다.
루드비히의 주사는 술을 계속 마시는 것이었다.
덕분에 힐리아가 델핀 저택 장악을 끝낼 때까지 방해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그동안 루드비히는 술병 속에서 헤엄치느라 바빴으므로.
그리고 날이 밝을 무렵, 힐리아는 간단하게 명령했다.
“방의 문을 열고, 현관까지 열어 둬.”
“직접 내쫓지 않으시고 말입니까?”
“자기 발로 나간 꼴이 되어야 더 모양새가 좋지.”
술에 취해 있던 루드비히는 어젯밤 자신을 모욕한 자들을 찾아 비틀거렸다.
욕설을 내뱉으며 막판엔 거의 네발로 기다시피 델핀저의 정문을 나왔고.
그가 나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등 뒤에서 문이 철컹, 잠겼다.
술에 취한 정신으로 뒤늦게 상황을 눈치챈 루드비히는 추하게 닫힌 문에 매달렸고.
힐리아의 명령을 받은 용병이 그가 들어오지 못하게 지켰다.
루드비히와 함께 지내던 측근들은 델핀저에서 횡령으로 쫓겨난 고용인들과 함께 치안대에 넘겨진 상황이다.
힐리아가 빠르게 검토를 끝낸 고용인들의 진술서는 얼마나 많은 이가 델핀가에 빨대를 꽂고 있었는지 증명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당연히 루드비히 대공의 측근들이 있었다.
그들이 모조리 잡혀가 감옥에 갇혀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누구도 만취해서 주사를 부리는 루드비히를 막지 못했다.
사방에 수군거림이 번지기 시작했다.
“어, 그런데 이미 델핀 공녀와 대공은 파혼한 거 아니었어? 결혼이 파투 났잖아.”
“그렇지. 약탈혼 때문에 난리였잖아.”
“그런데 왜 대공이 델핀저 앞에서 저 난리를… 아, 원통함을 못 이겨서 그런 건가?”
남의 말을 옮기기 좋아하는 이들이 사정을 모르는 이에게 소곤거렸다.
“그건 아닐걸. 어제까지만 해도 대공 전하가 델핀저에서 자기 집처럼 지냈는데.”
“뭐? 이미 결혼은 파투 난 거 아니었어?”
“그렇다니까. 안 그래도 이상하다는 얘기가 많았어.”
“그래서 파혼에 대한 대가로 황제 폐하께서 대공에게 델핀가를 주시려는 게 아닌가 하는 얘기도 있었는데, 아닌가 보네.”
사실 약탈혼으로 신부를 빼앗긴 신랑이라는 건 웃음거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동정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러니 지금 상황도 루드비히가 제대로 처신할 수 있었다면, 동정을 얻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만일 그가 제정신이었다면.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자존심을 버릴 수 있었다면.
하지만 지금의 루드비히는 술에 뇌가 녹아 그런 걸 판단할 여력이 없었다.
그저 추태를 부릴 뿐.
“으아아아, 비키란 마리다!”
몰려든 구경꾼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황족이면서 저렇게 체통을 안 챙기다니…….”
“솔직히 좀…….”
루드비히가 바닥을 뒹굴어 옷이 걸레짝이 된 상태라, 사람들은 뒤늦게 한 가지를 눈치챘다.
“이건 무슨 냄새지?”
“어우, 코가 다 아프네.”
“잠깐 이거, 소변 냄새 아니야?”
“잠깐 저기 봐, 대공님 바지에…….”
손가락을 내민 사람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보고 말았다.
고귀한 드래곤의 피를 이은 황족이 벌인 믿어지지 않는 추태를.
그리고 모두가 깨달았다.
지금 루드비히 대공이 벌인 추태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알려질 거라는 걸.
상황을 모르는 대공의 괴성이 다시 울렸다.
“히리아―! 내 거란 마리다! 히리아!”
그는 어젯밤 힐리아를 향해 달려들 때처럼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이제 루드비히가 벌인 추태에 대한 소문에는 이것도 더해질 것이다.
‘빼앗긴 신부에 대한 미련이 철철 흘러넘치더라’ 라는 정보가.
뒤늦게 델핀저에서 보낸 소식을 듣고 달려온 키엘른 대공저의 가신들이 루드비히를 데려갔으나, 이미 볼 사람은 다 본 상태였다.
* * *
나는 루드비히가 추태를 벌이는 꼴을 2층 창에서 잘 감상했다.
당연히 옆에는 가면을 벗은 상태인 아르파드가 서 있었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물었다.
“자, 의뢰비예요. 루드비히를 매장할 만한 건수를 만들어 드렸어요. 어때요?”
이건 장담할 수 있었다.
아르파드라도 만족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