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힐리아가 손님용 대기실로 루드비히의 시종을 끌고 들어간 뒤.
밖에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안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마 힐리아의 명령을 받은 애니가 철저하게 문을 지키지 않았다면, 훔쳐보려 드는 이도 있었으리라.
모두의 눈에는 공통된 의문이 떠올라 있었다. 심지어 애니마저 그랬다.
‘과연 정말로 힐리아가 루드비히의 시종 혀를 자를 것인가.’
그때였다.
그들의 의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곧 방에서는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끄아아악!!!”
귀를 기울이고 있던 이들은 동시에 흠칫했다.
게다가 비명은 한 번만 들린 게 아니었다.
누가 들어도 끔찍한 짓을 당하는 중이라는 걸 알 수 있는 처참한 비명이 몇 번이나 울린 뒤.
마침내, 대기실 문이 열리고 하얀 얼굴의 힐리아가 나왔다.
그녀는 여전히 조막만 한 얼굴에 요정 같아 보였다.
방금 사람 혀를 자르게 한 잔인한 사람으로는 안 보였다.
하지만 그 뒤를 따라 나온 용병이 질질 끌고 온 시종의 꼴을 보고, 누구도 그런 생각을 감히 할 수 없게 되었다.
혼비백산한 표정의 시종은 붉게 물든 천을 입에 물고 있었다.
얼굴은 얻어맞은 듯 코피로 엉망이었고,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힐리아는 용병 중 한 명에게 차가운 어조로 명령했다.
“죽으면 안 되니, 의사에게 데려가라.”
얼마나 차가웠는지, 산전수전 다 겪은 용병도 움찔할 정도였다.
시종이 벌벌 떨며 끌려 나간 뒤.
힐리아는 바닥에 꿇려진 고용인들을 덤덤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또 나를 모욕하고 싶거나, 내 명령에 불복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말해.”
그러자 누구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들이 느끼는 공포가 여실히 드러났다.
힐리아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제랄드에게 추가로 명령했다.
“용병단에서 사무를 처리하고 글을 아는 자들을 데려왔죠?”
“예, 주인님.”
힐리아는 미간을 찡그렸다.
어째 저 ‘주인님’이라는 빈정거림에 아르파드가 맛 들인 것 같이 들려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일일이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오늘 밤 안에 저택 정리를 완료해야 해.’
안 그래도 아르타누스 홀의 연회 준비로 바쁜 와중이다.
시간을 낭비할 순 없었다.
‘게다가 이번 일은 당연히 소문날 거야. 그렇다면 일이 빠르고 확실하게 끝날수록 나에 대한 평가는 올라가겠지.’
며칠 만에 저택을 정리해도 충분히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더 빨리 공작가를 정리하고, 루드비히와 에반젤린의 잔당을 뽑아내야 해.’
그래야 이 중요한 시기에 직접 움직인 보람이 있다.
조금 전 아주 강력한 채찍질을 마친 힐리아는 해사하게 웃으며, 고용인들에게 달콤한 당근을 내밀었다.
“용병들에게 진술서를 제출해. 쓸만한 정보를 내게 준 자들은 선처할 수도 있어.”
“…!”
모두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서로를 의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힐리아가 계산하고 바란 그대로였다.
* * *
그리고 몇 시간 뒤.
조금만 더 있으면 동이 틀 시간이었다.
델핀 공작저의 집무실에 단둘이 남았을 때 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아르파드가 먼저 입을 열기 전에 선수를 쳤다.
“자, 이제 마음껏 비웃어요.”
그러자 꽤 놀라운 대답이 나왔다.
“내가 왜 그대를 비웃어야 하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당연하잖아요? 자기 가문 내부 단속도 제대로 못 해서 이 모양 이 꼴인데, 당신이 비웃는 것도 당연해요.”
그러자 놀랍게도 아르파드는 전혀 비웃지 않았다.
문을 잠근 상태였으므로, 그는 가면을 벗어 본래의 얼굴을 드러냈다.
마법으로 검게 변했던 머리카락이 다시 찬란한 금빛으로 돌아오고, 평범한 갈색이던 눈이 붉은색으로 물드는 건 신기했다.
그렇게 다시 재수 없이 잘생긴 얼굴로 돌아온 아르파드는 의외의 말을 했다.
“난 비웃고 있지 않아.”
나는 조금 놀랐다.
당연히 비웃을 줄 알았는데.
알아서 자진 납세한 것이 조금 민망해지는 기분이다.
그리고 조금… 아주 조금 기분이 풀리는 것도 같았다.
“예상외네요. 어쨌든 난 이미 기회를 한 번 줬어요. 이번 일로 비웃으려고 하거나 비꼬려고 하는 건 안 받아 줄 거라고요.”
툴툴대며, 나는 앞에 쌓인 델핀저 내부 비리에 대한 진술서들을 검토했다.
이건 전부 내 지시대로 용병단 인력들이 공식 문서로 작성한 것이다.
황실에라도 언제든 제출할 수 있도록.
전부 용병단의 공증과 증언한 당사자의 서명, 지문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내 앞에 쌓인 진술서의 산은 곧 그동안 내가 얼마나 델핀 가문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는가의 증거였다.
내가 괜히 아르파드 앞에서 선수 쳐서 자학적인 소리를 한 게 아니다.
‘안 빼돌리고 안 뜯어먹는 놈이 바보인 상황이었네!’
진짜 과거의 내가 한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내 지난 생에서의 기억들과 이 진술서들을 교차 검증하면 델핀저의 썩은 부분을 전부 도려낼 수 있었다.
‘그래. 사람을 살리려면 고름을 짜내고, 썩은 상처는 잘라 내야 해!’
지금은 수술할 때였다.
내가 열정적으로 진술서에 늘어선 비리들을 크로스 체크 하고 있는데.
툭, 하고 서류 위를 하얗고 길쭉길쭉한 손가락이 짚었다.
“응?”
의아해서 고개를 들자, 아르파드가 다가와 내가 앉은 집무실 테이블 위로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림자가 내 상체 위로 드리웠다.
아르파드의 붉은 눈동자가 빛났다.
“왜 그래요?”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뭔데요? 아, 말했지만 이번 일로 나 비웃거나 비꼬는 건 이미 기회 다 지나갔어요.”
“안 한다니까.”
그는 낮게 혀를 차더니, 진짜 질문을 던졌다.
“아까 루드비히의 시종에게 쓴 마도구. 정말로 저주를 걸 수 있는 건가?”
아, 진짜 궁금했던 거구나.
나는 시종과 나, 아르파드 셋만이 아는 조금 전 일을 떠올렸다.
* * *
나는 시종의 혀에 대고 마도구를 발동시켰다. 그러자 불길한 붉은빛이 눈부시게 뿜어져 나왔고, 당장에라도 혀가 잘려 나가는 것처럼 시종은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악!!!”
너무 커서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소리였다.
하지만 그자의 혀가 잘리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죽을 것처럼 비명을 지르는 자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안 잘렸어. 안 잘렸다고.”
“아악! 아아아악!! 끄아아악!!!”
귀에 피가 나올 것 같아서 위협적으로 속삭였다.
“더 소리 질러 봐. 진짜 혀를 자를 테니.”
“…합!”
그러자 시종은 입을 다물고,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은 듯했다.
내가 쓴 마도구가 혀를 자른 게 아니라는 걸.
안도하는 한편으로 의문이 시종의 얼굴에 떠오르는 걸 보며 나는 낮은 목소리로 협박했다.
“지금 네 혀를 자르진 않았어. 하지만 방금 내가 쓴 건 델핀 공작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인 마도구야.”
시종의 눈이 불안하게 떨렸다.
나는 해맑게 웃으며 덧붙였다.
“이 마도구로, 네 혀에 저주를 걸었어.”
그러자 시종의 두 눈이 지진 난 것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 * *
그 협박으로 나는 시종의 입을 확실하게 막았다.
“여기서 있었던 일을 한마디라도 발설하면 바로 혀가 잘릴 거야.”
시종은 공포에 질려 눈물을 줄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나가면 너를 치료 명목으로 검은 용병단으로 보낼 거야. 거기서 루드비히가 그동안 델핀 공작가의 재산을 어떻게 빼돌렸는지 네가 아는 대로 전부 적어.”
“…!”
그렇다. 내가 이렇게 귀찮은 짓을 한 이유 중엔 이것도 있었다.
그 시종이 루드비히의 주요 측근으로서 비리를 아주 잘 알고 있다는 점.
“싫으면 거부해도 돼. 혀만 잘리고 끝날 거야. 죽이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마법의 말에 시종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하염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좋아, 증거 하나 확보!’
덕분에 조금 전 검은 용병단에서 보낸 그 시종의 진술서도 내 앞에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