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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36화 (36/210)

36화

아르파드는 비릿하게 웃으며, 칼자루를 힐리아의 손에 쥐여 주며 물었다.

“어찌할까요, 주인님?”

주인님, 이라는 단어가 이상할 정도로 기묘하게 들렸다.

나를 비웃는 듯, 등줄기를 오싹하게 만든다.

고용인들만큼이나 나도 놀랐다.

‘혀를 자르라고? 진짜 심각한 황족 모독죄도 그렇게 처리 안 한 지 100년이 넘었잖아!’

지금 내가 그렇게 해 버렸다간, 문제가 생길 여지가 컸다.

특히 지금 난 정식 황태자비로 인정도 못 받은 상태다.

그런 내가 황족 모독죄로 아랫사람의 혀를 자른다?

당연히 내 자격 문제를 두고 시비가 일어날 게 뻔했다.

아마 에반젤린이 신나서 이렇게 주장하겠지.

‘자비를 베풀기는커녕 이렇게 잔인한 여자를 황태자비가 되게 놔둘 순 없어요!’

황후와 에반젤린 파들은 신나서 고개를 끄덕일 거고 말이다.

황제의 인정이 걸린 아르타누스 홀의 연회를 앞두고 그런 악수를 둘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내가 저자를 자비롭게 봐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특히나, 아르파드(제랄드)가 대놓고 강한 처벌을 주장하면서 말이다.

벌써 다들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다들 내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 궁금해하며 재는 것이다.

그들이 아는 마음 약한 ‘힐리아 아가씨’라면, 절대 혀를 자르는 잔인한 처벌은 못 내릴 터다.

델핀저의 고용인들에게는 내 눈치를 보거나 비위를 맞춰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아예 없었다.

그래서 아직도 그들의 눈빛과 표정은 한마음으로 말하고 있었다.

‘설마 그 마음 약한 힐리아가 그렇게 잔인한 일을 할 수 있을 리 없어.’

지금 내가 아르파드(제랄드)의 말을 거절하면 다들 이렇게 생각할 게 뻔했다.

‘아, 역시 마음 약한 힐리아가 맞구나!’

안 그래도 나를 얕보는 데에 익숙해진 자들이다.

고삐가 풀리는 건 순식간일 거다.

지금 내가 저들에게 얻어 낸 공포는 순간에 불과했다. 지난 몇 년간 쌓인 얕봄과 방심이 다시 고개를 들 거다.

아르파드가 굳이 ‘혀를 자른다’는 과격한 표현을 쓴 건 선택지를 좁히기 위해서다.

‘하나, 진짜 혀를 자르게 해서 공포와 원성을 사거나.’

‘둘, 거절해서 다시 얕보이거나.’

이 둘 중 내가 어느 쪽을 선택하는지 시험하고 있는 거다.

‘무슨 시험 못 해서 죽은 귀신이라도 들렸나? 아니면 그게 황족들 피에 새겨져 있는 거야?’

덕분에 나만 곤란해진 상황.

그리고 나는 결론을 내렸다.

* * *

“…….”

싸한 침묵이 델핀저 안을 맴돌았다.

힐리아의 판단은 옳았다.

아르파드만이 아니라, 고용인 대부분이 힐리아의 판단을 보고 그녀를 다시 가늠하려 하고 있었다.

‘어떤 대답을 할지에 따라 공포로 짓누르거나, 다시 무시당하거나 둘 중 하나지.’

사실 아르파드 본인에게 이런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혀를 자르고, 그런 선택지를 내민 놈의 목도 자른다.’

당연했다. 자신을 조종하려 드는 자를 남겨 둘 생각이 없으니까.

그렇게 본다면, 아르파드의 입장에서는 지금 힐리아를 살려 둔 것이 정말 특별한 대우였다.

‘그걸 생각하면 이 정도 시험은 당연하지.’

아르파드는 뻔뻔하게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흥미가 머리카락 끝까지 치솟는 걸 느꼈다.

이 놀랍고 이상한 여자는 대체 어떤 결론을 내릴까.

그래서 그를 실망시킬까, 아니면 놀라게 할까.

그때, 잠시 이어진 침묵을 깨고 분홍빛 입술이 움직였다.

“제랄드.”

보랏빛 눈동자가 아르파드를 빤히 바라본다.

“예, 주인님.”

아르파드는 조금 상기된 기분으로 ‘주인님’이라는 말도 안 되는 단어를 다시 입에 담았다.

뭐, 사실 말이 안 되는 건 아니긴 했다.

황태자 아르파드에겐 있을 수 없는 단어지만.

용병왕 제랄드에겐 달랐으니까.

‘고용주도 주인님이 맞으니까.’

힐리아는 가차 없이 명령했다. 그의 ‘주인님’답게.

“저자를 끌고 따라와. 피를 보기엔 장소가 좋지 않군.”

“…예.”

루드비히의 시종이 경악해서 비명을 질렀다.

“히익! 그만! 안 됩니다! 저는 대공 전하의 사람입니다! 절 처벌하시면……!”

제랄드는 시종의 혀를 잡아 그가 더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힐리아가 안내하는 홀 옆의 방으로 시종을 끌고 따라 들어갔다.

힐리아가 방 안에 들어오도록 허락한 것은 시종과 제랄드 뿐이었다.

제랄드는 약간은 흥미가 식은 눈빛으로 힐리아가 내릴 명령을 기다렸다.

‘이제 떨면서 혀를 자르라고 시키려나.’

선택지를 둘로 줄여서 고르라고 해 놓고, 막상 힐리아가 정말 둘 중 하나를 고르자 흥이 식었다.

그는 새삼 깨달았다.

‘내가 꽤 큰 기대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군.’

남이 주는 선택지 안에서만 움직이는 자는, 자신과 동등한 파트너가 될 자격이 없었다.

이번 일 하나로 모든 걸 결정할 생각은 없었지만, 힐리아가 기준 하나를 넘지 못한 건 분명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힐리아는 제랄드에게 저자의 혀를 자르라 명하지 않았다.

다른 명령을 했다.

“저 의자를 여기 놔둬요.”

“…뭐?”

전혀 예상 못 한 일이었기에 아르파드는 잠시 용병왕 연기도 잊어버리고 대답했다.

힐리아가 입꼬리를 날카롭게 끌어올리며 물었다.

“어머, 용병왕 제랄드는 고용주에게 써야 하는 말도 제대로 모르는 모양이죠?”

대놓고 비웃는 표정에 아르파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자신의 실수가 맞았다.

그는 순순히 사과하며, 시종이나 할 법한 일을 직접 했다.

“죄송합니다.”

힐리아의 명령대로 의자를 지정한 장소에 놨다.

그리고 대체 뭘 하는지 지켜보기 시작했다.

시종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사이, 힐리아는 의자 위에 올라가더니 벽에 장식된 물건 중 하나를 집어 내렸다.

이곳은 손님용 대기실.

벽에는 델핀 공작저의 역사와 위엄을 상징하는 것들이 많이 걸려 있었다.

방패와 검, 도끼 등 위협적인 것도 있었고.

아름다운 장식품으로만 보이는 것도 있었다.

힐리아가 꺼내서 바닥에 ‘콩!’ 하고 내려놓은 건 장식품으로 보이는 거였다.

새를 조각한 크리스털 장식품.

그녀는 그걸 쥐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더니, 아르파드에게 다시 명령했다.

“저자를 제압하고 혀를 내밀게 해요.”

그러자 시종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서 도망치려 들었다.

“으아악! 살려 줘! 대공 전하!!!”

제랄드는 틈을 놓치지 않고, 발을 걸어 시종이 바닥을 구르게 했다.

시종은 넘어지면서 테이블에 얼굴을 박았다.

“끄악!!!”

코를 감싸 쥐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비명을 지르는데 피가 줄줄 흘렀다.

아마 밖에서 듣기엔 지금 혀를 잘랐다고 착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큰 비명이었다.

제랄드는 피를 뿌리며 바닥을 구르는 시종의 목덜미를 질질 끌어와 바닥에 내던졌다.

그리고 배 터진 개구리 같은 소리를 내며 엎어진 시종의 손등에 칼날을 박아 넣어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퍽!

“아아악!!!”

섬뜩한 비명이 울렸다.

제랄드는 힐리아를 흘끔 올려다봤다.

하지만 귀하게 자란 공녀님답지 않게, 그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역시 이상하단 말이지.’

일반적인 레이디라면 기절하거나 최소한 움찔거리긴 해야 한다.

하지만 이 여자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런 평을 하면서 그는 용병으로서 고용주의 말에 충실히 따랐다.

바닥에 고정해 놓은 시종의 턱을 잡아 올린 뒤 혀를 손가락으로 잡아당겼다.

그리고 물었다.

“자를까요?”

힐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

가면 속에 숨겨진 아르파드의 붉은 눈동자에 조금 전보다 더한 실망이 어렸다.

‘못 하겠다는 건가?’

하지만 막상 그가 행하는 폭력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던 여자다. 어쩐지 일관성이 없는 느낌이다.

그때, 아르파드의 섣부른 판단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힐리아가 움직였다.

벽에서 끄집어 내린 장식품을 시종의 혀에 대고 몇 마디 시동어를 중얼거렸다.

그러자, 힐리아의 손에 들린 크리스털 새 조각이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피처럼 붉은색으로.

시종이 기겁하여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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