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루드비히의 개소리에 대한 내 감상은 간단했다.
‘술을 너무 마셔서 진짜 개가 된 건가?’
그리고 나는 바로 반성했다.
‘아, 귀여움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는 댕댕이들에게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사과를.’
썩은 음식 쓰레기, 아니, 핵폐기물 급인 놈과 사랑스럽고 무해한 털 덩어리들을 비교하다니.
아무리 분노로 눈이 멀었어도 사람으로 해야 할 도리를 잊어서는 안 되는데 말이다.
그사이, 루드비히는 갈지자로 걸어 계단을 내려왔다.
용케도, 그리고 아쉽게도 계단을 구르거나 떨어지진 않았다.
불콰해진 얼굴로 그는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뻗어 나를 끌어안으려 했다.
“힐리아! 돌아올 줄 알았어!”
루드비히가 나를 안으려 드는 것에 두 명이 반응했다.
첫 번째는 나, 재빠르게 옆으로 피해 버렸고.
두 번째는, 조금 전까지 나와 대립각을 세우던 아르파드였다.
그는 나보다 빠르게 앞을 막아서더니, 아주 자연스럽게 루드비히의 다리를 걸었다.
덕분에 루드비히는 극히 주정뱅이답게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술병이 바닥에 떨어져 남은 술이 줄줄 흘렀다.
루드비히를 따라 내려온 고용인들이나, 아까 내가 없는 사람처럼 무시한 대공저의 고용인들은 기겁해서 루드비히를 부축하려 했다.
“대공 전하!”
“아이고! 정신 차리세요!”
“지금 힐리아 님께서 저희를……!”
아마 제 주인에게 내가 부당한 일이라도 저질렀다는 식으로 고자질하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자기가 흘린 술 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루드비히는 아랫것들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동영상 찍을 수 있는 장치라도 있으면 좋겠다. 찍어서 뿌려 버리고 싶네.’
아, 그러고 보니 지금 바로 만들어지는 건 아니지만, 녹음과 영상 저장이 가능한 마도구를 개발할 마법사를 알고 있다.
그자를 미리 찾아서 내 사람으로 만들어 두는 것도 잊지 말아야지.
아주 많은 도움이 될 게 분명했으니까.
그 인물은 에반젤린도 ‘원작’의 정보를 통해 확보한 인물이 아니라, 우연히 알게 된 정보를 통해 파악한 것 같았다.
‘그러면 내가 미리 빼돌리기도 매우 쉽지. 지금의 에반젤린은 모를 테니까.’
에반젤린이 원작의 정보를 통해 손에 넣은 인재들을 그대로 전부 가로채기에는 위험성이 컸다.
‘에반젤린이 뭔가 이상하다고 눈치챌 확률이 높아.’
충분한 힘을 기를 때까지, 에반젤린이 내 회귀 사실을 눈치채게 만들 위험은 최소화해야 했다.
어쨌든 그건 한참 후의 일이다.
당면한 일 중 가장 중요한 건, 아르타누스 홀의 연회였고.
그보다 앞서 처리해야 할 일은 바로 지금, 델핀 공작가를 되찾는 일이니까.
그사이, 꼴사납게 넘어져 바닥을 구르던 루드비히가 겨우겨우 일어났다.
대공저의 고용인들을 지팡이 삼아 기대서였다.
그리고 자신의 발을 걸어 넘어뜨린 아르파드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너, 너어! 천한 놈이 감히! 감히 날 넘어뜨려?! 반역이다! 주겨 버리게써!”
혀가 배배 꼬인 발음으로 우기는 루드비히의 꼬락서니는 꽤 볼만했다.
아마 에반젤린이 보더라도 지금 그가 괜한 시비를 건다고 생각할 게 틀림없었다.
나는 화사하게 웃으며 루드비히에게 말했다.
“고귀하신 황족께서 만취해서 무고한 평민을 괴롭히시면 쓰나요. 이 일이 알려지면 황족의 위신이 땅에 떨어질 겁니다.”
루드비히는 다시 반쯤 넋을 놓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멍청한 소리를 중얼거렸다.
“힐리아, 네가 이렇게… 예뻤었나?”
“그럼요. 그걸 이제 아셨나요? 우리 아가, 아니, 비 전하께선 늘 아름다우셨다고요!”
루드비히를 음료 속에 빠진 초파리보다 더 싫어하는 애니가 뾰족뾰족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그러자 루드비히는 자기가 욕을 먹은 줄도 모르고, 멀거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긴 했어. 늘 예뻤지. 사실 에바보다 힐리아 네가…….”
이제 와서 놈이 늘어놓은 칭찬이나 후회의 말 따위는 불쾌감을 더 가중할 뿐이었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이만 나가요.”
다행히 이 말은 알아들은 모양이다.
“나가? 어디로? 여기가 우리 집인데.”
조금 술이 깬 듯한 표정이다.
나는 최대한 차가운 표정으로 또박또박 선언했다.
“우리 집이 아니라, 내 집이죠. 그리고 이제 당신은 여기 있을 이유가 없어요.”
루드비히는 물벼락을 맞은 듯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면서 멍하니 되물었다.
“이유가 없어? 왜? 내가 네 남편인데.”
“나는 이미 황태자 전하와 결혼했어요. 그러니 우리는 남… 아니, 이제 나는 당신의 형수인 셈이군요.”
“형…수?”
루드비히의 표정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폭발해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웃기지 마! 넌 내 거야!!!”
* * *
괴물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힐리아에게 달려들려던 루드비히를 막은 건 이번에도 아르파드였다.
조금 전에는 티 나지 않게 다리를 걸었지만, 지금은 대놓고 힐리아의 앞을 막아섰다.
마치 굳센 벽처럼.
루드비히는 닿지 않는 할리아를 향해 손을 휘저으면서 발악했다.
“비켜!!! 내 여자야! 내 거라고!”
아르파드는 용병왕 제랄드로서의 신분을 꽤 중요하게 여겼다.
특별한 몇몇 상황을 제외하면, 용병으로 활동할 때는 황태자로서의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시도 때도 없이 황태자로서 행동했다간, 용병 제랄드라는 신분을 만든 이유가 사라져 버리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가면을 내던지고 루드비히를 베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진지하게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죽여 버린 다음, 내 아내의 명예를 위해 결투 신청을 했다고 우기면 되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평상시의 아르파드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생각이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아르파드는 이런 기분을 꽤 자주 느꼈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할 리 없는 행동에 대한 충동이 불쑥불쑥 치솟았다.
단 한 명과 관련된 일에서만 늘 그러했다.
그럴 리 없건만 달콤한 꽃향기가 배어나는 듯한 목소리가 그의 가짜 이름을 불렀다.
“제랄드.”
그제야 아르파드는 자신이 잠시 이성을 살짝 놓고 살기를 겉으로 드러냈음을 알았다.
그것만으로 주변은 거의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히, 히이익―!”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악!!”
거품 물고 눈을 까뒤집은 사람도 있었고, 다리가 풀려 주저앉은 이도 있었다.
그리고 루드비히는…….
“이런.”
힐리아는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냄새가…….”
그렇다. 아르파드가 순간적으로 제어하지 못한 살기를 집중적으로 받은 루드비히는 그대로 실금해 버렸다.
사방에서 경악 어린 숨소리와 수군거림이 울렸다.
“세, 세상에!”
“이를 어째!”
“빠, 빨리 가려 드려!”
이는 델핀저와 키엘른저의 고용인, 용병을 가리지 않았다. 워낙 경악스러운 일이었으니까.
그나마 좀 머리가 돌아가는 대공저의 고용인들은 자신들의 외투로 루드비히의 하반신을 가려 주었다.
힐리아는 그러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냉정하게 돌아서며 검은 용병들에게 명령할 뿐이었다.
“손님이 무사히 돌아가실 수 있도록 배웅해 드리도록.”
이 손님이 누구를 말하는 건지 알아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루드비히를 쫓아내라는 말이다.
이 말에 참지 못하고 대공가의 고용인 중 하나가 외쳤다.
“너무하십니다!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그 말에 힐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날카로운 보랏빛 시선이 ‘너무하다’는 말을 꺼낸 루드비히의 시종을 찌를 듯 노려본다.
시종은 순간적으로 겁을 집어먹고 몸을 떨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 놀랐다.
‘내가 왜 저 여자한테 겁을 내야 하지? 아무리 그래도 나는 대공님의 측근이라고!’
지난 3년간 루드비히의 측근으로서 힐리아와 델핀가에 속한 모두를 아랫사람으로 멸시하던 버릇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그는 용기를 그러모아 외쳤다.
“그래도 사람이라면 이렇게 깊이 상처받은 대공 전하를 도둑처럼 내쫓으시면 안 됩니다! 그동안 대공 전하께서 아가씨께 얼마나 잘해 주셨는데요!”
시종의 말은 이상했다.
마치 루드비히가 힐리아에게 은혜를 베풀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힐리아는 고개를 갸웃한 다음, 헛소리를 지껄인 시종에게 다가갔다.
“내가 뭘 너무했다는 거지?”
“대공 전하를 이렇게 냉정하게 쫓아내시려고……!”
“나는 이미 주신과 모신의 앞에서 황태자 전하와 부부가 되었어. 이 사실을 모르는 이가 있나? 그러니 이제 나와 루드비히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지. 그런 내 집에 루드비히가 주인처럼 앉아 있는 건 무례하고 너무한 일이 아닌 건가?”
“그, 그건……!”
“내 측근을 데려오라고 보낸 궁인들이 루드비히가 역정을 냈다며 저택 안으로 들어서지도 못하고 쫓겨났어. 이건 무도한 짓이 아닌가?”
시종은 말문이 막혔다.
그동안 루드비히와 에반젤린이 델핀저 안에서 제멋대로 구는 데 동조하느라, 상식과 일반적인 예의에 대한 감각이 날아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적나라하게 힐리아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자, 새삼 델핀저에서 벌어진 일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실감하게 되었다.
시종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버벅대는 사이.
힐리아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황족 모독죄는 어떻게 다스려야 하지?”
“고귀한 황족을 모독한 자는, 모욕을 가한 신체를 잘라 내게 되어 있습니다.”
냉큼 대답한 건 제랄드(아르파드)였다. 개국 초기에는 진짜 기능하던 법이지만, 지금은 거의 사문화된 것이다.
하지만 시종을 공포로 몰아넣기에는 충분했다.
제랄드(아르파드)는 웃음기를 참지 못하는 어조로 덧붙였다.
“저자는 혀로 감히 비 전하를 모욕했으니, 마땅히 혀를 잘라 처벌해야겠지요.”
“히익!”
사방에 공포 어린 반응이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