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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34화 (34/210)

34화

당연히 이 정보의 출처는 회귀 전 기억이다.

그러니 폴먼 입장에서는 귀신에게 홀린 기분일 터였다.

가족에게도 알려 준 적 없는 걸 내가 바로 집어냈으니까.

워낙 충격이 컸는지 폴먼은 ‘어떻게, 어떻게?’ 하는 소리만 주워섬기기에 바빴다.

나는 그를 비웃으며 한 마디만을 던져 주었다.

“내 집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야. 정말로 내가 몰랐으리라 생각하나?”

“헉?!”

진짜 귀신을 본 것처럼 놀라는 폴먼에게 쐐기를 박았다.

“그동안 나름대로 자비를 베풀어 네가 회개하기를 기다렸지만, 소용없었던 거지.”

폴먼의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아, 아가, 아니, 비 전하! 저는!”

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귀가 더러워지는 기분이군.”

그러자 용병들이 폴먼의 입을 막았다.

“읍! 으읍!”

그사이, 내 명령에 따라 폴먼의 방을 뒤진 이들이 궤짝을 들고 내려왔다.

그 안에는 온갖 귀금속과 보석, 돈이 가득했다.

나는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렇게 많이 빼돌린 거야?’

어디에 숨겨 뒀는지는 회귀 전 지나가듯 들은 정보로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얼마나 빼돌렸는지 내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소란을 따라, 그리고 용병들에게 몰이 당하듯 끌려 나온 델핀저의 고용인들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하나하나 노려보았다.

몰려든 고용인 중에는 키엘른 대공가의 사람들도 있었다.

숫자는 적었지만 루드비히의 측근들로, 가장 높은 이들은 지금 2층에서 루드비히 곁에 있을 거다.

남은 건 쭉정이들뿐. 하지만 이 쭉정이들조차 델핀저 내에서 자기들이 윗사람인 척 위세를 부렸다.

나는 이들은 아예 논외로 제쳐 놓았다.

“어차피 대공저로 돌아갈 이들이니.”

이 말에 키엘른 대공저의 고용인들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이들은 없는 사람인 척 무시하고 델핀저의 고용인과 가신들 사이에서 기억하는 얼굴들을 하나씩 집어내기 시작했다.

“너, 너, 너, 저기, 저자. 그리고 저기 구석에 숨은 자도.”

용병들 손에 그들은 우르르 잡혀 와 내 앞에 무릎 꿇려졌다.

내가 집어낸 자들은 전부 에반젤린에게 붙어 날 배신한 자들이었다.

정확히는 그런 이 중에서도 유달리 적극적이었다는 소리다.

나를 괴롭히거나, 대놓고 뒤통수를 치거나, 무언가 일을 벌여서 내 기억에 남은 자들.

이들이 전부일 리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순식간에 굵직굵직한 에반젤린의 사람들을 골라내자, 다들 경악한 듯했다.

그들은 조금 전 폴먼이 중얼거리던 말을 비슷하게 반복했다.

“어, 어떻게?”

“저는 아닙니다!”

“갑자기 왜 이러시는 겁니까? 아가씨?”

“저는 충심을 다해 섬긴 죄밖에 없……!”

아우성치며 죄를 부정하는 자들과 두려움에 질려 몸을 사리는 이들.

냉정하게 명령했다.

“전부 따로 구속해 둬. 심문은 천천히 해도 되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폴먼만 델핀 가의 재산을 빼돌렸을 리 없다. 저들 역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자기 몫을 챙기고 있었을 거다.

그러니 저들의 방을 살짝 터는 것만으로도 황사처럼 먼지가 풀풀 풍길 거다.

에반젤린에게 오염된 자들을 쫓아내는 데에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다들 입은 옷 하나 빼고 빈손으로 내쫓아 버릴 예정이니까.

난장판이 벌어졌다.

나는 고용인들을 제압하는 검은 용병단의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용병들 뒤에서 조용히 내가 하는 양을 관찰하고 있는, 나와 같은 시선을 유지하는 유일한 남자.

아르파드.

아니, 지금은 용병왕 제랄드.

그는 내가 어떻게 델핀저를 장악하는지 관찰하고 있었다.

‘아마 이것도 그 시험 중 하나로 생각하겠지.’

진짜 재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때, 조금 수척해진 애니가 달려 나왔다.

집에 돌아와 본 이들 중 유일하게 반가운 얼굴이다.

“애니!”

“아가, 아니! 비 전하!”

애니는 환해진 얼굴로 내 앞으로 와서 근사하게 무릎을 굽혀 절했다.

정말로 황태자비의 앞에서 보일 법한 정중한 인사였다.

내가 예의를 차리라고 말한 자 중에는 이걸 지킨 이들이 없었는데.

그럴 필요도 없는 애니가 먼저 예의를 표하고 있었다.

나는 직접 애니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됐어. 이럴 필요 없어. 우리가 이럴 사이는 아니잖아.”

애니는 내 젖형제였고, 저택 안에서 나를 생각해 주는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애니의 두 눈은 분노와 의지로 형형하게 불타고 있었다.

“아니요! 가까운 사이니까 더더욱 지켜야죠!”

애니는 분노와 경멸 어린 시선으로 제압당한 고용인들을 노려보았다.

상황이 바뀐 걸 이제 모를 수 없는 그들은 애니마저 두려워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애니가 내 귀에 몇 가지를 속삭였다.

세 번의 회귀를 거쳤지만, 모든 배신자를 알지는 못한다. 애니는 그걸 훌륭하게 보완해 주었다.

“다 잘 잡아내셨어요. 그런데 저기 저쪽의 하녀 셋이랑 마구간 지기, 저기 요리사 조수도 에반젤린 그 여자에게 알랑거리던 인간이에요.”

나는 애니가 알려 준 이들까지 모조리 제압하도록 시켰다.

아까보다는 작았지만 다시 한번 죽는다는 듯 비명이 울렸다.

“비 전하! 제발 용서해 주세요!”

이젠 얕보며 조롱하듯 아가씨라 부르는 이들은 하나도 없었다.

“저는 시키는 대로 한 게 전부예요!”

“저는 할아버님 대부터 델핀 가를 모셔 왔어요!”

하지만 저들 중 내가 자비를 베풀만한 가치가 있는 자는 없다.

그렇게 쓸어 내고 나니, 델핀저의 고용인 2/3가 제압당한 상태였다.

하지만 남은 이들도 전부 믿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남은 1/3에도 경고를 남겼다.

“내가 죄지은 자를 몰라서 그냥 둔다고 생각하지 마라. 잘못을 벌충할 기회를 주는 것뿐이야.”

한 마디로 이거다.

‘지금부터 서로 잘못을 고발하면서 싸워 봐. 그러면 너는 살려 줄지 누가 알아?’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타인의 잘못을 고발했다고 용서해 줄 생각은 없었다.

채반에 한 번 더 거르려는 것뿐.

그때, 내 예상보다 조금 늦게 지하실로 이어지는 통로에서 용병 두 명의 부축을 받은 반가운 얼굴이 나타났다.

하지만 반가워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오랜만에 재회한 벨테인 경은 그야말로 넝마 같은 꼴이었기 때문이다.

“벨테인 경!”

나는 경악하여 그에게 달려갔다.

얼굴이나 팔다리 등 맨살이 드러난 곳에는 멍이 가득했고, 채찍 자국이 남은 곳도 있었다.

얼굴 절반이 퉁퉁 부어 잘생긴 얼굴을 제대로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다.

그런데도 그는 나를 알아보고 웃었다.

“무사, 하셨군요…….”

그리고 기력이 다했는지 푹 고개가 떨어졌다.

나는 기겁해서 벨테인 경이 죽은 건 아닌지 확인해 봤다. 다행히 숨은 잘 쉬고 있었다. 단순히 기절한 것뿐인 모양이다.

옆에서 애니가 울먹이며 나에게 말했다.

“대공님께서 그동안 지하실에 가두고 얼마나 모진 학대를 했는지 몰라요!”

나는 경악했다.

고개를 돌려 구경꾼처럼 서 있는 아르파드를 노려봤다.

분명히 아르파드에게 부탁했었다.

델핀저 내부에서 애니와 벨테인 경의 사정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그리고 큰 문제는 없다는 말을 들었다.

덕분에 조금 안심하고 있었는데.

나는 눈빛만으로 아르파드를 노려보며 물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벨테인 경이 이 꼴인 걸 왜 나에게 안 알려 준 거예요?!’

알아들은 듯한 아르파드는 얄밉게도 어깨를 으쓱했다.

‘살아 있잖아. 그래서 그대로 알려 준 것뿐이야.’

분통이 치밀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르파드와 싸울 때가 아니었다.

나는 용병단에 명령을 내렸다.

“벨테인 경을 당장 의사에게 데려가서 치료해!”

용병들은 의뢰주인 내 명령에 착실하게 따랐다.

아마 아르파드(제랄드)가 그렇게 명령했겠지. 그런데 벨테인 경이 이 꼴인 건 숨겼다고?

으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그러자 내내 벽에 붙은 장식품처럼 서 있던 아르파드가 내 곁으로 소리도 없이 다가왔다.

그리고 내 턱을 살짝 건드리며 어이없는 소리를 했다.

옆에는 들리지 않을 아주 작은 소리로.

“조심해. 예쁜 입술 다치겠어.”

나는 그의 손을 탁 소리 나게 쳐 냈다. 그리고 속삭임으로 말싸움을 시작했다.

“헛소리하지 마요.”

“나는 그대 앞에서 늘 진심만 말했는데.”

“돌아가면 가만히 안 놔둘 거예요. 분명히 벨테인 경에 대한 정보를…….”

“그건 그냥 그대의 부탁이었어. 내가 들어줄 의무가 있는 계약이 아니었지.”

“…!”

아르파드는 소리를 더욱 낮추어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니까 말하지 않았나. 남편에게 정부의 안위를 알아봐 달라고 하는 건 그대가 너무한 일이라고.”

“벨테인 경의… 명예를 모욕하지 마세요.”

아르파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애타는 표정으로 달려와 챙기고 있으면서, 아니라고 해도 별로 설득력 없는 거 아나?”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으나, 아르파드의 표정은 진심으로 불쾌해 보였다.

하지만 화가 난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금만 늦게 알았으면 벨테인 경이 죽을 수도 있었어!’

내가 이번 생에서 어떻게든 지키고 싶은 두 사람 중 한 명이 그다.

어떻게 본다면 내 삶보다 그들을 지키는 게 더 중요했다.

애니와 벨테인 경은 이미 나를 지키기 위해 세 번의 삶을 모두 희생한 이들이니까.

그러니 나는 이번 일을 절대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멋대로 생각해요. 하지만 그따위 오해 때문에 벨테인 경이 잘못되면 당신도 가만히 안 둘 거예요.”

“…….”

나는 아르파드가 더 빈정거리거나 조롱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표정을 잔뜩 구긴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가 더 싸울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 소란이 벌어졌는데도 내내 보이지 않던 루드비히가 고주망태가 된 상태로 2층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힐리아?”

루드비히의 손엔 반쯤 빈 술병이 들려 있었다.

그는 눈을 비비며 나를 몇 번이나 유심히 보더니, 마침내 어이없는 결론을 내렸다.

환하게 웃으며 외친 것이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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