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집사 폴먼은 당황했다.
‘힐리아 아가씨가 왜 갑자기? 설마 어제 궁인을 그냥 돌려보냈다고 화를 내려고 왔나?’
그는 정상적인 생각을 스스로 부정했다.
‘에이, 아가씨가 그럴 리 없어. 그럴 깜냥이 될 리가……!’
그는 루드비히의 추천에 힘입어 집사로 발탁되었지만, 힐리아가 태어나기 전부터 델핀저에서 일해 왔다.
당연히 힐리아의 성격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물론, 그 알맹이가 3회차 회귀를 겪으며 산전수전 다 겪어서 완전히 변했다는 것은 전혀 몰랐다.
그가 아는 힐리아 아가씨는 심약하고 약혼자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믿는 바보 같은 소녀였다.
그 약혼자가 내연녀를 자신의 집에 데리고 들어와도 아무것도 모르고 순하게 웃던.
당연히 델핀저 내의 가신들과 고용인 내에는 은연중에 힐리아를 얕보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게다가 최근 델핀저 내부, 그리고 밖에서는 이런 소문이 돌았다.
‘황제 폐하께서 중매 서신 혼인이 아들 때문에 무산된 것에 루드비히 대공에게 크게 미안해하신다.’
‘그래서 상응하는 대가를 주실 예정이라는데, 아마도 그게 델핀 공작가가 될 확률이 높다.’
이런 소문이었다. 당연히 황후와 에반젤린이 주도해서 퍼뜨린 것이었다.
루드비히를 내세워 어떻게든 델핀 공작가를 집어삼키기 위해서.
이미 루드비히를 주인으로 모셔 온 델핀저의 가신들과 고용인들은 이 소문이 신빙성 있다고 받아들였다.
그러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게 더 정확했다.
자신들이 그동안 루드비히에게 공을 들인 것이 소용없어지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힐리아가 직접 보낸 궁인을 루드비히가 막았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돌려보내는 말도 안 되는 짓이 가능했다.
집사는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힐리아가 왜 갑자기 나타난 것일까?
집사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상황을 왜곡해서 해석하기 시작했다.
‘아! 황제 폐하께서 델핀 가를 루드비히 대공 전하께 넘기라고 하셨구나! 그걸 전하러 오신 게 틀림없어!’
힐리아가 들으면 어이가 없어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루드비히와 에반젤린에게만 충성해 온 그에겐 아주 자연스러운 생각으로 느껴졌다.
집사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힐리아를 맞이하러 나갔다.
문이 열리고, 힐리아는 검은 망토를 두른 건장한 사내들을 우르르 대동하고 들어섰다.
시커먼 로브들을 배경 삼아 홀로 서 있어서일까.
힐리아는 밤에 혼자 뜬 달처럼 빛나 보였다.
집사마저 잠시 말문이 막힌 채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였다.
집사는 힐리아가 아름답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같은 사람이 맞는지 눈을 의심할 정도로, 지금의 힐리아는 달라 보였다.
가장 투명한 수정을 깎아서, 그 위에 수줍은 봄의 꽃잎을 흩뿌려 놓은 듯했다.
순백의 수정과 벚꽃 잎 사이에서 빛이 산란하며 새로운 색을 만들어 내는 듯했다.
이런 미사여구가 전혀 과하지 않게 느껴질 만큼, 지금의 힐리아는 아름답고 당당하게 빛나고 있었다.
몸 깊은 곳에서부터 빛이 흘러나와 반짝거리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다.
특히나 완전히 달라진 것은 사람을 압도하는 기세와 위엄이었다.
예쁘지만 그 이상으로 약하고 쉬워 보이던 사람인데, 그 짧은 기간 동안 왜 이렇게까지 달라진 건지 알 수 없었다.
집사는 거의 압도되어 힐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중 나온 하녀에게 겉옷을 맡긴 힐리아는 눈을 깜빡거리며 집사를 바라보았다.
홀린 듯 시선을 빼앗겼던 집사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성급하게 힐리아가 온 이유를 결론 내려 말했다.
“대공 전하께선 2층에 계십니다.”
힐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왜 루드비히를 찾을 거라 생각하지?”
얼음 조각이 씹히는 듯 차가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집사는 목소리에 가시처럼 낀 불쾌감과 분노를 미처 읽지 못했다.
“그야 아가씨께서 대공 전하께 사죄할 일이 있지 않으십니까?”
“내가? 사죄?”
“예, 물론 연약하신 아가씨께서 저항하실 순 없었겠지만, 그래도 대공 전하의 심정을 먼저 헤아려 주셔야죠.”
그는 저도 모르게 힐리아를 나무라듯 말하고 있었다.
“만인이 보는 앞에서 신부를 빼앗기시지 않았습니까. 남자에게 그보다 모욕적이고 끔찍한 일은 없습니다.”
집사는 힐리아가 루드비히의 자존심을 짓밟은 것처럼 말했다.
“매일 같이 아가씨를 부르며 울부짖으시고, 술이 없으면 제대로 주무시지도 못합니다!”
집사 폴먼은 자신이 모욕이라도 당한 양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어유. 저 같은 놈이라도 그런 짓을 당하면 살기 싫을 텐데, 대공 전하처럼 고귀한 분이…….”
집사의 설명은 몇 마디 더 이어졌다.
루드비히가 사람들 눈앞에 나서는 것마저 두려워하더라.
지인들도 찾아오지 않고, 그나마 들러서 위로하는 것도 착한 에반젤린 뿐이다.
누가 들으면 델핀저의 집사가 아니라, 루드비히의 집사인 줄 알 것 같았다.
계속 이어지는 루드비히가 그야말로 폐인이 돼 있다는 말들.
그 묘사가 고막을 울리고 뇌리에 틀어박힌 순간, 힐리아는 도저히 표정 변화를 참지 못했다.
그래서 손을 들어 입을 살짝 가렸다. 표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입꼬리가 춤추듯 올라가는 걸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지난 세 번의 회귀 동안 노력했던, 그리고 이번 삶에서 발버둥 친 이유였으니까.
‘루드비히의 자존심이 박살 나다니 통쾌해 죽겠네!’
물론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자신은 그의 모든 걸 빼앗고 부숴 버릴 참이었다.
그런데 제3자의 입으로 저 말을 듣자 통쾌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복수의 희열이 찌릿하게 척추를 울렸다.
‘짜릿해. 새로워. 역시 복수의 맛, 최고야!’
이를 전혀 모르는 집사는 힐리아의 반응이 죄책감이라고만 생각했다.
“오죽이나 슬프고 또 모욕적이셨겠습니까. 아가씨께서라도 사과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오신 것 아닙니까?”
힐리아의 두 눈이 보라색 불꽃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 * *
집사와 대면했을 때 이미 내 지시를 들은 검은 용병단이 저택 전체를 에워싼 상태였다.
뒤늦게 뒤뚱거리며 나타난 집사 폴먼은 저택이 제압된 것을 미처 몰랐다.
그래서인지 내 앞에서 어이없는 말만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루드비히에게 사과하라는 등의 개소리 말이다.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옆에 선 용병들에게 명령했다.
“꿇려.”
“……?”
폴먼이 내 말뜻을 이해하는 것보다, 용병이 내 명령을 이행하는 게 더 빨랐다.
퍽!
오금을 걷어차인 폴먼은 짓밟힌 개구리처럼 엎어졌다.
“끄억!”
폴먼은 당혹감 가득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게,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아가씨?!”
집사가 무례하게 굴 것을 예상 못 한 건 아니었다.
이자는 루드비히와 에반젤린의 개였으니까.
회귀 전에 얼마나 나를 무시하고, 또 조롱하고 괴롭혔는지 모른다.
“아니, 식사는 충분히 넉넉히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더 드시다간 돼지가 돼 버리실 겁니다. 에반젤린 님의 반이라도 따라가셔야 대공님의 애정을 되찾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마님을 도와드리는 겁니다.”
“옷과 장신구가 사라지다니요? 설마 그 예쁘고 착하신 에반젤린 아가씨께서 훔쳐 가셨겠어요? 마님께서 착각하신 거지요.”
그리고 내가 질투 때문에 에반젤린을 독살하려 했고.
불륜을 저지르며 루드비히를 죽이려 했다는 증언까지 했다.
내 회귀 전 죽음에 일조한 인간이었다.
“선대부터 델핀 공작가를 섬겨 온 제가 직접 봤습니다. 저 여자는 악독한 죄인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전에 이자에게 당한 그 어떤 모욕과 배반보다 방금 들은 말이 가장 끔찍하고 화가 났다.
‘루드비히에게 사과하라고?’
그 말을 내뱉은 순간, 이자의 끝은 이미 결론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 폴먼의 앞에 섰다.
그리고 물었다.
“네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아나?”
“잘못이라니요?”
진심으로 어리둥절해 보였다.
헛웃음이 터졌다.
“게다가 이자들은 뭡니까? 보니까 기사도 아닌 것 같은데… 뭐야! 놓아라! 이놈들! 감히 델핀 공작가의 집사인 이 몸을……!”
폴먼은 버둥거리며 용병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으나 소용없었다.
“기사들! 기사들은 어디 있는 겁니까?! 왜 이자들을 막지 않았……?”
나는 폴먼을 비웃었다.
“델핀가의 기사들이 내 앞을 막아서지 않았다고 화를 내는 거냐?”
“……!”
폴먼은 뒤늦게 자신이 얼마나 어이없는 소리를 했는지 깨달은 듯했다.
하지만 더 놀랍고 어이없는 건 실제로 몇몇 기사가 저항을 시도했었다는 거다.
내가 용병들의 앞에 서 있는데도 말이다.
“아무리 아가씨께서 함께 계신다지만, 천한 용병 놈들 따위를……!”
솔직히 아르파드 앞에서 이런 꼴을 보이고 있자니 매우 쪽팔렸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나는 냉혹하게 명령했다.
“제압해.”
“명령대로.”
당연히 아르파드와 최정예 용병들은 기사들을 손쉽게 꺾었다.
벨테인 경을 제외하고 그나마 수준 있는 기사는 진작 그만두었다.
실력은 모자라도 눈치가 있는 이들은 알아서 굽혔다.
루드비히에게 충성하는 이들을 제압하는데 손을 보탰던 것이다.
“아가, 아니, 비 전하!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지나치게 얍삽해서 짜증 나는 놈들이었다.
어쨌건 생각보다 싱겁고 폭력적인 과정을 거쳐, 이미 저택 외부를 지키던 병력은 전부 내 손에 떨어진 상황.
집사는 이를 전혀 몰랐다.
‘그러니 저렇게 뻣뻣하고 되바라지게 굴 수 있었겠지.’
내 지시에 용병은 폴먼을 바닥에 납작하게 눌렀다.
나는 구두 끝으로 폴먼의 턱을 들어 나를 올려다보게 했다. 붉어진 얼굴이 굴욕감으로 물들었다.
폴먼은 겨우 내 말을 경청할 준비가 된 것 같았다. 이제야.
“네가 한 말은 다 틀렸고, 하나같이 전부 잘못뿐이야. 폴먼.”
“무, 무슨……!”
“우선, 호칭부터 틀렸어. 아가씨가 아니라, ‘황태자비 전하’다.”
물론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전이지만, 지금 내세워야 하는 건 가장 높은 지위였다.
이런 속물은 그럴수록 더 빠르게 제 주제를 깨달을 테니까.
“두 번째. 황태자비이자 집안의 주인인 나를 보고도 마땅한 예의를 다하지 않았지.”
그렇다. 폴먼이 나를 보자마자 한 말이 기본적인 인사도 아니고, 루드비히가 어디 있는지를 알려 준 거였다.
그것도 빨리 가서 사과하라고.
‘대체 날 얼마나 무시하고 있었던 거지?’
알고 있었음에도 새삼스럽게 분노가 치솟았다.
‘진짜 날 멍청한 호구로 보고 있었구나.’
예정된 결혼이 파투 났으니, 적어도 가신과 고용인들이 나와 루드비히 사이에서 줄타기라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이들을 너무 똑똑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들에게 나는 아직도 속여 먹고, 이용하기 딱 좋은 ‘멍청한 힐리아 아가씨’일 뿐.
이런 자들은 피부로 직접 느끼기 전까지는 바뀐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
폴먼은 본보기로 아주 적절했다.
“세 번째. 내가 궁인을 보내 내린 명령을 무시해서 직접 발걸음 하게 만들었지.”
최대한 딱딱하고 냉혹하게 말하려 노력한 것이 효과를 좀 보이는 듯했다.
폴먼이 뒤늦게 상황을 조금 파악한 듯했던 것이다.
굴욕감과 분노가 먼저이던 얼굴에 처음으로 두려움이 드러났다.
“그, 어, 제가 조금 실수를 했습니다. 아가씨. 아니지. 비 전하. 그, 하지만 어제 내리신 명령은 제가 아니라 대공 전하께 여쭤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무슨 권한이 있겠습니까.”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쫓아내기도 전에 자기가 알아서 집사 자리를 버릴 줄은 몰랐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쫓아내다니! 아니, 그전에 집사 자리를 버리다니요!”
나는 그를 버러지 보듯 깔보며 내뱉었다.
“델핀 가의 내부 일을 처리하는 데에 외부인의 허락을 받는 자가 집사라 할 수 있나?”
“그, 그건……!”
할 말이 없는 모양이다.
애초에 루드비히가 델핀저에서 권한을 휘두를 수 있었던 건 그가 내 약혼자였기 때문이다.
결혼이 깨진 지금, 그에겐 어떤 권리도 없었다.
나는 제압당한 집사를 내버려 두고 용병들에게 명했다.
“저택 내부를 완전히 제압하도록.”
그리고 집사를 똑바로 노려보며 용병들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집사의 침실로 가서 침대 아래 타일을 전부 부숴라. 거기 있는 걸 모두 가져와.”
버르적거리던 폴먼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당황해서 소리를 지르던 그는 혀를 잘못 깨물면서도 곧 입을 다물었다.
“어, 꺽! 어떻게……?”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뒤져서 가져오라 말한 게 폴먼이 그동안 빼돌린 비자금과 비리 내역이 적힌 장부였기 때문이다.
‘거기 그게 있는 걸 어떻게 안 거야?!’
공포에 질린 폴먼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싸늘하게 웃어 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