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하녀 에시아는 내 명으로 다시 아르파드에게 돌려보내졌다.
내가 황태자에게 돌아가라 말한 이후 몇 시간 동안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지만, 받아 주지 않았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세요, 비 전하.”
“그것도 황태자 전하의 뜻이니?”
“……!”
“…절대 아닙니다!”
안색이 하얗게 질린 에시아는 본인이 어떻게든 용서를 받겠다고 벌이는 행위가 내 심기를 더 상하게 한다는 걸 뒤늦게 눈치챈 모양이다.
결국 내 지적에 에시아는 다시 한번 머리 숙여 사죄한 뒤 내 부근에서 보이지 않았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너무나도 짧았습니다.”
이후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아마도 에시아는 황태자궁 궁인들 내부에서 지위가 꽤 되는 인물인 모양이다.
에시아는 내가 아니라 아르파드를 더 중요시하다 내쳐졌고, 아르파드는 그에 대해 뭐라 말하지 않았다.
이건 황태자궁 궁인들에게 이 사실을 주지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아르파드는 내 주인이 아니다.’
그리고.
‘적어도 나를 직접 시중드는 이들은 내 명을 최우선으로 하는 이들이어야 한다.’
아랫사람에게 뒤통수를 한두 번 맞아 본 게 아니다.
아직 내 사람이 생기기 전인데, 벌써 내 주변 모든 이가 아르파드의 명령을 우선시해서는 곤란했다.
* * *
“그냥 두실 겁니까?”
아르파드는 비서관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냥 두지 말아야 한다는 거지?”
율켄은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상아의 침실 방향을 보며 대답했다.
“그야 대놓고 전하의 사람을 쫓아내고 반기를 든 셈 아닙니까. 그런…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아르파드는 율켄이 ‘그런 사람’이라고 하려다가 자신의 눈빛을 보고 재빠르게 ‘그런 분’으로 말을 바꾼 걸 알고 있었다.
그는 피식 웃고는 의심이 넘치는 측근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측근 하나 제대로 못 만들면, 자기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리 없지. 그 정도로 작은 그릇이면 황태자비답다 볼 수 없어.”
아르파드는 집무실 테이블 위에 놓인 진주 목걸이를 보며 중얼거렸다.
“…황후 자리에도 말이지.”
“…….”
비서관의 얼굴에는 여전히 근심과 의심이 한가득이었다.
결정적인 사건 없이, 율켄의 눈에 씌운 의심 깍지를 벗길 순 없을 거다.
‘그리고 그건… 본인의 힘으로 해내야 의미가 있지.’
그가 도와서는 의미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적어도 측근을 장악하는 일을 도와 달라 말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1단계는 합격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2단계는 시작도 안 했고, 2단계만으로 끝나지도 않을 테지만.’
과연 나의 사랑스러운 아내는 ‘시험’을 전부 통과할 수 있을까?
그래서 황후의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인지를 스스로 증명해 낼 수 있는지 정말로 궁금했다.
* * *
그리고 에시아를 돌려보낸 다음 날.
나는 황당하고 화가 나는 소식, 그러나 예상한 대답을 듣게 되었다.
창백하고 당황한 표정의 궁인은 내 눈치를 열심히 살피며 소식을 전했다.
바로 델핀저의 집사가 보낸 내 명령에 대한 대답을.
“뭐? 내가 보내라 명한 두 사람을 보낼 수 없다 했다고?”
“예, 비 전하.”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밀었다.
‘예상한 대로긴 해. 하지만……!’
아직도 루드비히가 델핀저에 죽치고 앉아 있는 시점에서, 집사가 순순히 내 명령에 따를 거란 기대는 안 했다.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항명이 벌어져야 내가 분노해서 움직일 명분이 생긴다.
이렇게 되길 바라고, 계산해서 명령한 거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분노가 안 날 순 없었다.
화장대 위에 올린 손이 부르르 떨렸고, 낌새를 눈치챈 궁인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저희의 능력이 부족하여!”
어제 에시아를 돌려보낸 보람이 있었다.
적어도 내 앞에서 대놓고 명령을 거부하거나, 기분을 살피지 않는 일은 없겠지.
하지만 궁인들이나 다른 귀족들도 아니고, 델핀저의 고용인들이 나를 무시했다.
사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델핀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는 나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라도 델핀가의 고용인들은 내 명령을 우선해야 해.’
하지만 그러지 않은 것이다.
바로 루드비히의 눈치를 봤기 때문이다.
델핀저의 집사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내드릴 수 없습니다.”
“뭐라고요? 이건 비 전하께서 명하신 일입니다.”
“루드비히 대공 전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셔서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러곤 궁인들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을 닫아 버렸다는 것이다.
나는 참지 못하고 응접실의 테이블을 내리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이 역시 보여 주기 위한 퍼포먼스였다.
내가 이렇게까지 분노했고, 또 행동할 만하다는 걸.
델핀저의 정리는 최대한 빨리해야 했다.
아직도 루드비히가 델핀저에서 버티고 있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리고 루드비히를 쫓아내는 김에 에반젤린의 방도 빼 버려야지!’
에반젤린은 델핀저에 자주 드나들었다. 가장 좋은 손님방을 아예 제 것처럼 쓸 정도로.
당연히 저택 내에 에반젤린의 끄나풀도 많았다.
아마도 델핀저의 상황이 알려지면, 내가 비난받을 가능성이 컸다.
‘자기 집안 하나 제대로 단속 못 하면서 황태자비 자리를 어떻게 감당하겠냐고 하겠지.’
피라냐처럼 물어뜯으려 들 것이 눈에 선했다.
그러니 내가 선수를 쳐야 했다.
나는 그대로 몸을 일으키며 궁인들에게 명령했다.
“옷을 갈아입고 단장을 새로 해야겠어. 황태자 전하를 뵈러 가야겠다.”
* * *
힐리아가 화사하게 꾸미고 아르파드의 집무실을 방문했을 때.
당연히 율켄은 의심 깍지를 두 눈에 낀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게다가 율켄은 이미 델핀저에서 힐리아에게 온 대답을 알고 있었다.
힐리아의 곁에 있는 이들은 아직 전부 아르파드의 사람들이다.
당연히 관련된 보고가 전부 올라왔고, 그건 율켄의 손을 거쳤다.
아르파드 역시 알고 있었다.
‘설마 우리 전하께 자기 집안일을 처리해 달라고 쪼르르 달려온 건가?’
방금 그 소식을 듣자마자 예쁘게 꾸미고 바로 아르파드에게 달려왔다.
당연히 제3자로서는 이렇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어디 전하께 델핀저의 일을 대신 처리해 달라고 매달리기만 해 봐. 참지 않고 말할 거다.’
율켄은 아르파드의 앞에서도 하고 싶은 말을 참지 않는 인간이다.
하물며 힐리아의 앞에서야 말할 것도 없었다.
그가 잔뜩 벼르고 있는데, 힐리아의 옅은 분홍빛 입술이 열렸다.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서 왔어요. 전하.”
“무엇이오?”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율켄이 막 도끼눈을 뜨고 입을 열려던 참이었다.
힐리아는 미안하고 수줍은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밤은 전하께서 외로이 홀로 주무셔야 할 듯해서, 미리 말씀을 드리려고 왔어요.”
“…?”
아르파드마저 잠시 고개를 갸웃할 정도였다.
그는 빠르게 당혹감을 수습하고 대답했다.
“그야 나로서는 너무 아쉽긴 하지만, 무슨 일이 있기에 그러는 거지?”
“친정에 다녀와야 해서요.”
“친정? 델핀저 말인가?”
“예. 잠시 집안 단속을 하고 오려고요.”
힐리아는 아르파드의 테이블 위에 굴러다니고 있는 아그리피나의 눈물을 보더니 살짝 웃었다.
“제 선물을 이리 소중히 여기고 늘 옆에서 떼어 놓지 않아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아르파드는 계약금이 사랑의 선물로 뒤바뀌는 순간을 보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야 이건 그대에게 처음으로 받은 물건이니까. 늘 옆에 두고 보고 싶을 수밖에.”
“제가 그 진주를 드렸던 날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네요.”
모르는 이가 들으면 영락없는 신혼부부의 애정 어린 대화다.
하지만 속에 든 내용은 전혀 달랐다.
‘계약금 잘 가지고 있네요? 내게 고용된 거 잊지 않았죠, 용병왕님?’
‘어떻게 잊겠나. 너무 황당한 경험이라 잊고 싶어도 불가능해.’
힐리아는 환하게 웃으며 다가가, 아르파드의 귓가에 속삭였다. 율켄도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아르파드의 붉은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커졌다.
그때, 마치 기습하듯 힐리아가 아르파드의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귀엣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키스하기 위해 접근한 것처럼.
힐리아가 수줍은 듯 뺨을 붉힌 채 도망치듯 집무실을 나가는 걸 보며 율켄은 입을 떡 벌렸다.
‘뭐지? 방금? 진짜 연애결혼인 건가? 설마? 그럴 리가 없는데? 하지만 델핀저 일 도와 달라고 하고 간 것도 아니고……?’
혼란 상태에 빠진 비서관을 두고, 아르파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디 가십니까, 전하?”
“내가 네게 일일이 행방을 보고하고 다녀야 하나?”
“…!”
잠시 넋을 빼고 있던 율켄은 제 실수를 깨달았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주인에게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실언했습니다.”
아르파드는 어떤 대답도 없이 자리를 떴다.
애초에 주인은 가장 가까운 수하인 그에게도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르파드가 힐리아의 뒤를 따르듯 사라져 버린 뒤.
뒤늦게 율켄은 이런 생각에 미쳤다.
‘설마… 델핀 공녀를 따라가신 건 아니겠지?’
에이, 아닐 거다.
설마하니 진짜 연애결혼이라, 순식간에 팔불출이 된 황태자가 아내의 집안 단속까지 도우러 간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오싹해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율켄은 조금 전 자신이 본 대화를 떠올렸다.
그 닭살 날리는 부부의 대화를.
‘아니…겠지? 그렇겠지?’
이런 의심 자체가, 힐리아가 오기 전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 * *
나는 델핀저로 가기 위해 황태자비의 인장이 새겨진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거기서 미리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던 사람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내가 기다리던 사람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