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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29화 (29/210)

29화

가스팔은 종종 말하곤 했다.

“아마 동화나 전설 속에 나오는 공주를 납치하는 드래곤의 이야기는 신부의 존재 때문에 나온 걸 거야.”

“황족의 광증이 드래곤의 혈통을 이기지 못하고 오는 거라면, 거기에 너보다 더 효율적인 해결책은 없어.”

마탑주 가스팔은 끔찍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다면, 바로 그가 천재라는 거였다.

그렇지 못하다면 마탑주의 자리에 오를 수 없었고, 또한 빙의자 에반젤린의 선택을 받지도 못했을 테니.

그래서 나는 지하 묘지로 아르파드를 찾아갔을 때, 내 피에 대한 그의 반응부터 살폈다.

광증이 진행되어 있다면, 아르파드는 내 피에 대한 유혹을 거부할 수 없었을 테니.

하지만 그는 내 피를 보고도 미친 듯 달려들지 않았다.

이후 안심하고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나에게 위험한 존재라는 걸 알면서도 그에게 먼저 다가간 이유는 간단했다.

‘그만큼 내 존재가 아르파드에게 유용할 거라는 걸 아니까.’

동시에 그를 경계하고 믿지 못하는 이유도 같았다.

‘너무 유용해서, 나에게 아르파드가 위험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생각도 있었다.

‘이대로 루드비히와 에반젤린에게 이용만 당할 바에야, 차라리 아르파드에게 피 빨려 죽고 말지!’

그러면 적어도 아르파드는 광증에서 벗어날 거고, 그러면 루드비히에게 아주 큰 엿을 먹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건 다른 길이 없을 때의 이야기다.

나는 어지간하면 살고 싶었고, 그러니 아르파드가 신부의 존재에 대해 모른 채 광증만 치유될 수 있길 바랐다.

하지만 아르파드 본인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알 수 없었다.

‘제일 편하고 빠른 방법이 내 피를 쪽쪽 빨아먹는 거니까.’

물론 그것만은 아니긴 하지만…….

‘그, 민망한 방법도 있을 거고…….’

어쨌든 어떤 방법을 쓰든, 내 안위를 지키고 싶었다.

또 상황에 대한 주도권을 내가 가지고 싶었다.

그러니 어지간한 일이 있지 않은 한, 아르파드에게 내가 먼저 ‘신부’라는 말은 할 생각이 없었다.

* * *

그렇다. 그랬는데…….

이 흉흉한 눈빛을 앞에 두고 있자니 내 선택이 틀렸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르파드의 번들거리는 붉은 눈을 마주 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도 아르파드의 광증이 진행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는 없으니까.’

잠시 얼어붙어 있다가 나는 애써 몸을 움직였다.

아르파드의 눈앞에서 손을 휘휘 저으며 물었다.

“저기요? 제정신이신 것 맞나요?”

바로 앞에서 휘적거렸는데도 아르파드의 시선은 집요하게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르파드 이스트리드 씨?”

“…이젠 호칭도 제대로 안 부르는 건가?”

“아, 다행이다.”

“뭐가 다행이지?”

“혹시 광증이 올라오셨나 했잖아요. 아니라서 다행이에요.”

아르파드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다시 물었다.

“왜 대답을 피하지?”

“네? 무슨 대답요?”

“조금 전에 내가 물었잖아? 내가 그런 존재를 사랑해야 할지, 증오해야 할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걸 왜 저한테 물으세요?”

“뭐?”

“그런 존재를 사랑할지 증오할지 결정하는 건 전하 본인이시잖아요.”

내 말이 맞잖아. 본인 감정을 왜 나한테 물어.

“오히려 반대네요. 그래서 사랑하고 싶으세요, 증오하고 싶으세요?”

이건 좀 많이 궁금했다.

내가 눈을 반짝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니, 아르파드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매번 잘도 빠져나가는군.”

나를 무시하고 침대로 걸어가는 아르파드에게 따라붙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아니, 그건 대답이 아니잖아요. 대답해 줘요. 사랑하고 싶어요, 증오하고 싶어요?”

진짜 진지하게 궁금해서였다.

‘그 존재’가 바로 나이고, 아르파드는 그걸 모르면서도 나에게 저런 질문을 했다.

내가 계속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부분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하필이면 ‘사랑’ 뒤에 ‘증오’를 같이 붙인 이유가 궁금했다.

“보통 그런 존재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사랑하게 되지 않아요? 아르타누스가 이스트리드 공주를 사랑한 것처럼?”

내 말에 아르파드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보통 거기에 증오 같은 말을 붙이진 않지 않아요?”

그는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증오하고 싶어질 것 같아서 그래.”

“…!”

조금, 아니, 꽤 놀랐다. 심장이 갈비뼈 아래로 내려앉는 듯한 느낌.

다행히 아르파드는 뒤로 돌아서 있었기에 내 표정이나 심정을 들킬 일은 없었다.

“만나면 사랑할 수밖에 없다니. 결국 내 감정조차 뜻대로 할 수 없다는 소리 아닌가? 그런 짓을 당하면 증오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군.”

하긴, 그 다운 반응이었다.

이미 아르파드는 내 앞에서 몇 번 말한 적 있었다.

그는 자신을 조종하려 드는 사람을 싫어한다고.

그 때문에 부친조차 경멸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르파드다.

나는 조금 전 심장이 내려앉은 적 없다는 듯 활달하게 대꾸했다.

“정말 다행이네요.”

아르파드가 뒤돌아서더니 물었다.

“무엇이?”

“내가 그런 존재는 아니니까, 당신이 날 증오할 필요까진 없을 테니까요.”

내 말에 대해 아르파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 무어라 묻지도 않았다.

그저 먼저 침대에 늘어서 나른하게 누운 채 나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내 침대니까 비키거나 나가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우리는 공식적으로 혼인 성사를 올린 부부였다.

게다가 첫눈에 반해 약탈혼을 벌일 정도로 세기의 사랑을 하는 사이.

시간이 좀 흐른 뒤도 아니고, 벌써 침실을 따로 쓰면 오히려 뒷말이 돌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약탈혼이 그냥 퍼포먼스 아닌가.’ 같은 의심들.

나는 고개를 쳐들고 당당하게 아르파드와 한 침대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에게 등을 돌리고 아주 푹 잠든 척을 했다.

등 뒤에서 아르파드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린 듯했지만, 무시했다.

그러니까, 하룻밤 내내.

* * *

“으으… 역시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이야…….”

결국 잠을 완전히 설쳐 버렸다.

내 단장을 도와주던 황태자궁의 하녀들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예? 저희가 무언가 실수라도……?”

“아냐. 그냥 지난밤에…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러자 하녀들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한 눈치 없는 하녀가 과잉 충성을 했다.

“설마 전하의 잠자리를 방해한 자들이 있었나요? 말씀해 주세요. 혼쭐을 내겠습니다!”

“…….”

다른 선임 하녀들이 눈짓했지만, 진짜 눈새인 건지 전혀 모른다.

그렇다고 일일이 변명하기도 귀찮았다.

“그런 거 아니니까 괜찮아.”

그와 동시에 선임 중 하나가 눈새 하녀를 데려갔다.

소리를 낮추었지만, 주의 주는 소리가 다 들렸다.

“두 분의 금실이 좋아서 황태자비께서 피로해 하시는 거잖니! 그렇게 눈치가 없어서 어떡하니!”

“헉! 죄송해서 어떡해요!”

전혀 아니지만 끼어들어서 아니라고 말하기도 그랬다.

‘뭐, 좀 민망하지만… 소문이 그렇게 나면 나쁠 건 없으니까…….’

나는 먼 산을 보며 아무것도 못 들은 척을 했다.

하녀들은 최선을 다해 나를 꾸며 주고 있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잔 덕분에 생긴 다크서클을 열심히 가려 주느라 고생이란 소리다.

내게 배속된 하녀 중 가장 눈에 띄는 아이가 바로, 지금 다크서클을 분으로 가리는 중인 에시아다.

그녀는 꽤 손이 야무지고 행동이 빠릿빠릿해서 마음에 들었다.

나는 단장이 다 끝나고 주변의 보는 눈, 듣는 귀가 적을 때 조심해서 물었다.

“아, 황태자 전하께서 델핀저 소식을 너에게 들으라 하시던데.”

“아, 맞습니다. 지금 보고드릴까요?”

“응. 부탁해.”

그렇다. 이 하녀는 아르파드의 직접 명령을 받는 측근 중 한 명이었다.

직접 정보를 수집할 정도로 윗선은 아니지만, 그걸 나에게 전달할 정도는 되는 모양이다.

“하녀인 애니라는 분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으시다 합니다. 워낙 지금 델핀저 상황이 어수선하니까, 따로 끼어들어 괴롭히는 사람이 있을 리도 없고요.”

“다행이네. 그런데 애니가 그렇다는 건, 벨테인 경은 다르다는 거야?”

“예. 아직 델핀저에 루드비히 대공께서 계시니까요.”

그 작자는 저번에 아르파드에게 그 망신을 당하고도, 아직 델핀저에서 나가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지난 3년간 자기 집처럼 지냈으니, 진짜 자기 거라고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루드비히가 벨테인 경을 괴롭히고 있다는 거야?”

“지하 감옥에 가뒀다는군요.”

남의 집을 차지하고 앉아, 남의 기사를 괴롭히다니.

어이가 없지만 루드비히라면 그러고도 남을 놈이라는 게 문제였다.

“혹시 심하게 폭행을 당하거나 다친 건 아니지?”

“그런 건 아니라고 합니다.”

“결혼식 날 부상당한 건 제대로 치료받았을까?”

“…그것까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전하.”

하긴, 이것만 해도 내 예상보다 상세히 알아낸 것이긴 했다.

‘역시 아르파드의 정보력이 괜찮네.’

그가 괜히 용병왕 부업까지 뛰고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도 언제까지 계속 아르파드의 능력과 조직에만 매달릴 수는 없다.

‘내 사람과 내 조직을 만들어야 해.’

이건 시간이 걸릴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에시아에게 명령했다.

“내 이름으로 델핀저에 사람을 보내서 하녀 애니와 벨테인 경을 데려오도록 해.”

특히나 두 사람은 걱정되어서 견딜 수 없었다.

벨테인 경은 부상도 당했고, 지하실에 갇혀 있다지 않나. 그냥 둘 수 없었다.

공작저 전체를 탈탈 털어야 할 테지만, 그 전에 일단 두 사람만이라도 빼내야 했다.

그러자 에시아는 잠시 곤란한 표정을 하더니 물었다.

“황태자 전하께 허락받은 내용이신지요?”

“…!”

나는 얼굴을 굳히고 에시아를 돌아보았다. 누가 봐도 지금 내가 분노했다는 걸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러자 에시아는 놀라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비 전하.”

“너는 어디 소속이지?”

“황태자 전하께서 비 전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황태자 전하의 사람이라는 소리군.”

“그건…….”

이건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다. 에시아도 나도.

아르파드에게 부탁한 정보를 에시아가 전해 주는 걸 봐도 확실했다.

그녀가 아르파드의 사람이라는 건.

하지만 에시아가 내 명령에 황태자의 허가 여부를 묻고 있는 건 다른 문제였다.

나는 냉정하게 대꾸했다.

“돌아가도록 해.”

“…예?”

“네 주인께 돌아가라는 소리다. 내 사가(私家)의 사람을 어찌할지조차 황태자 전하께 허락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으니.”

그러자 에시아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제 실수를 깨달은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부디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하지만 나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다른 하녀들은 긴장한 채 내 단장을 마저 끝냈다.

그때까지 에시아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였다.

나는 에시아를 아예 못 본 척했다.

그리고 다른 하녀에게 일러 델핀저에 애니와 벨테인을 데려오라는 명을 전달했다.

굳이 하녀와 줄다리기를 하려는 건 아니었다.

내 주변이 전부 아르파드의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고, 당연하지만.

이렇게 사소한 일까지 방해받아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게다가 나에게 닥친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은, 따로 있었다.

‘한 달 뒤 아르타누스 홀의 연회!’

그 연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되지 못하면, 나는 황태자비로 제대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그리고 연회를 앞두고 직면한 가장 큰 장애는 바로 황후와 에반젤린의 계략이었다.

‘두 사람은 황도 사교계에 선전포고를 이미 날렸어. 아르타누스 홀의 연회에 참석할 경우 사교계 추방을 각오하라고.’

이것부터 박살 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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