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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27화 (27/210)

27화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필레른 자작 부인을 달랬다.

“황후 폐하께서도 곧 마음을 푸시고 자작 부인을 다시 받아 주실 거예요.”

“제발 그러시기만을 바랄 뿐이에요. 어흑!”

필레른 자작 부인은 더욱 서럽게 울었다.

이미 겪어 봤기 때문인지 손바닥 보듯 그녀의 행동 패턴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그녀가 가장 바라고 있을 말을 건넸다.

“대신이라고 하기는 부족할지 모르지만, 저라도 괜찮으시면 친구가 되어 드릴게요.”

지난 회차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나라도 괜찮다면 부디 친구가 되어 주지 않을래요?”

“어머, 저야 너무 감사하죠. 대공비 전하.”

이디스 필레른은 이번에도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글썽거렸다.

지난번에 본 표정과 똑같았다.

하지만 나는 잊지 않았다. 저 똑같은 얼굴이, 나중에 내 없는 죄를 지어내 고발하고 어떻게 변했는지.

“설마 당신 같은 멍청이에게 진심으로 다가와 주는 친구가 있을 거라 믿었어요? 역시 에반젤린 님의 말처럼 어리석고 욕심까지 많군요.”

필레른 자작 부인은 에반젤린의 사주를 받고 처음부터 내 옆에 붙은 스파이였다.

‘이번에도 똑같겠지.’

아마도 이 여자가 황후궁에서 쫓겨난 것 자체도 연출된 상황일 확률이 높았다.

너무 보란 듯 쫓아냈는데, 쫓겨난 당사자가 제발 자신을 봐 달라는 듯 황태자궁을 기웃거렸다.

이걸 의심하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나는 순진한 척 웃으며 속내를 숨기고 말했다.

“안 그래도 사교 활동을 하지 않아서 친구가 없었는데, 너무 기뻐요!”

친구는 가까이에. 그리고 적은 더 가까이에 두어야 한다.

특히나 이 적이, 더 큰 적을 잡을 미끼라면 더더욱.

* * *

필레른 자작 부인을 돌려보낸 뒤.

나는 어쩐지 좀 가라앉은 기분으로 상아의 침실로 돌아왔다.

거기에는 의외의 모습으로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이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애초에 상아의 침실에 마음대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나를 빼면 한 명뿐이다.

아르파드.

그리고 그가 의외의 모습이었다고 말한 이유는 간단했다.

진짜 그랬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 멍하니 아르파드의 잘나서 재수 없는 자태를 감상하다가 물었다.

“혹시, 제 취향이 학자라는 루머를 어디서 듣고 오신 건가요?”

그러자 아르파드는 안경을 쓴 눈을 들어, 나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또 무슨 이상한 소리지?”

그렇다. 지금 아르파드는 무려 안경을 쓰고 앉아 두꺼운 양장 책을 읽고 있었다.

학자 취향이거나 안경 쓴 이지적인 남자를 좋아한다면 홀라당 넘어갈 모습이었다.

물론 난 그런 취향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그의 모습이 꽤 신선하다는 건 인정한다.

총총걸음으로 다가가며 대답했다.

“그야 당신이 눈이 나빠서 책 읽을 때 안경을 쓸 필요가 있을 리 없잖아요.”

드래곤의 혈통이라는 건 대단해서, 피가 옅은 편인 루드비히조차 자잘한 병은 걸린 적도 없다 했다.

상처도 엄청나게 빨리 나았고, 크게 사고가 나지 않는 이상 눈이 나빠질 일도 없다.

가장 진한 혈통을 가진 아르파드야 말할 것도 없었다.

“아, 그래서 내가 그대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안경을 쓴 거냐고 비꼰 거군.”

“그야 미남계로 비밀을 캐내시려던 어떤 분을 아니까요.”

아르파드는 딱히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냥 픽 웃더니 안경을 벗어 두며 말했다.

“그보다는 일반인의 시력을 확인해 보려는 것뿐이야. 나는 그런 보통 감각을 잘 모르니까.”

진심 어린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재수 없어!”

“이번에 나는 또 왜 비난당해야 하는 거지?”

“눈이 너무 좋아서, 일반인 시력을 경험해 보고 싶다고 도수 안 맞는 안경을 쓰다니! 그거 가난한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다고 부자가 가난한 사람 집 하루 뺏어 살아보는 느낌이잖아요!”

거기에 나는 한 가지 감상을 덧붙였다.

“부러워!”

“뭐가? 그대도 시력엔 이상 없지 않나?”

그야 지금은 그렇긴 했다.

온몸이 아주 생생하고 시력도 멀쩡했다. 아직 루드비히랑 에반젤린에게 당하기 전이라서.

‘하지만 회귀 전에는 신전에서나 감옥에서 개고생하다가 시력 안 좋아졌을 때 얼마나 불편했다고!’

그래서 회귀 사실을 바로 깨닫게 되는 이유 중에는 깨끗해진 시야도 있을 정도였다.

나는 새삼 다짐했다.

‘이번엔 눈에 좋은 것도 많이 먹고, 몸도 살살 써서 100살까지 건강하게 장수하고 말겠어!’

세 번의 요절 경험이 있다 보니 이건 내 최우선 목표였다.

눈 나쁜 사람의 기분을 아니까, 아르파드의 행동이 더더욱 재수가 없었다.

내 진심 어린 억울함을 느낀 건지, 아르파드는 변명하듯 말했다.

“시력이 좋은 것도 지나치면 안 좋아.”

나는 진심 100%로 외쳤다.

“남자 키는 클수록 좋고, 사람 시력은 좋을수록 좋다고요!”

그러자 가진 자는 기만의 말을 했다.

“꼭 그렇지는 않다니까.”

“그럴 리가!”

“너무 크면 문틀에 머리가 자꾸 부딪쳐서 불편하다고.”

“하지만 황궁 문들은 다 엄청 높고 넓잖아요?”

아르파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평민들이 쓰는 시설은 그다지 높거나 넓지 않지.”

영양 상태 때문에 평민들의 평균 키가 더 작을 테고, 천장을 높이고 문을 크게 내는 것도 돈이 더 들 것이다.

황태자 아르파드라면 별로 안 가 봤을 곳이지만, 용병왕 제랄드는 그런 곳을 많이 다녔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래도 시력이 안 좋아서 더 좋은 점이 있을 리 없어요!”

잘 안 보여서 눈 찌푸렸다가, 왜 늘 인상 쓰고 다니냐고 욕 더 먹으면 얼마나 서러운지 알아?

아르파드는 매끈한 턱을 쓰다듬더니 꽤 진지하게 대꾸했다.

“굳이 보고 싶지 않은 광경들까지 보게 되기도 해서 말이지.”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요?”

“그래. 예를 들어… 여드름 자국 덕지덕지한 사내새끼들의 시커먼 모공 자국이라던가.”

“…!”

“혹은 정원 구석에서 생산적인 일에 여념이 없는 남녀의 모습이라던가.”

“그건… 인정이네요.”

그런 게 보이면, 나라도 눈을 찌르고 싶어질 것 같긴 했다.

아주 사소하고 어이가 없는 대화의 결론이었는데, 놀랍게도 아르파드는 기분이 좀 좋아 보였다.

비틀림이나 날카로움 없는 미소가 그의 입매에 떠올랐다.

“왜 그렇게 웃어요?”

“그대와 말싸움을 해서 이렇게 쉽게 이긴 건 처음인 것 같아서.”

“누가 들으면 내가 늘 억지 부려서 이겨 먹으려 드는 줄 알겠어요.”

“…….”

나는 아르파드의 침묵을 무시하며, 그가 읽고 있던 책을 훑어봤다.

“뭘 보고 있었… 아, 이스트리드 제국 건국사? 이걸 보고 있었어요?”

고급 장정 책이라 붉은 비단 가름끈이 그가 읽던 페이지에 걸려 있었다.

이스트리드 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용이 말하였다. “나의 하나뿐인 꽃이자 신부여. 그대를 본 순간, 나는 그대가 나를 완전하게 해 줄 수 있음을 알았도다. 그렇기에 나는 그대를 얻으라는 본능을 거부할 수가 없었노라.”」

“…….”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책을 다시 덮어서 아르파드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눈을 마주쳤을 때, 눈치챘다.

‘나를 관찰하고 있어?’

그는 지금 분명히 내 반응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조금 전 장난스러운 말을 주고받던 그 남자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날카로운 시선이다.

긴장감이 팽팽해졌다.

그때, 아르파드가 손을 내밀어 내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책을 잡아 다시 펼쳤다.

“어릴 때부터 이 부분을 아주 좋아했거든. 그대가 황제 앞에서 아르타누스와 이스트리드 이야기를 한 걸 듣고 생각나서 보고 있었어.”

“그랬…군요. …왜 그 부분이 좋아요?”

아르파드는 피식 웃더니 약간 먼 곳을 보는 듯한 표정을 했다.

“나에게도 있었으면 했거든. 이런 존재가.”

그의 손끝이 책에 새겨진 글씨를 톡, 하고 건드린다.

“운명의 상대 말이지.”

로맨틱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낭만적인 말을 시처럼 읊는 남자의 눈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나를 완전하게 해 줄 존재…라는 게 있었으면 했으니까.”

아르파드는 좀 더 풀어서 부언했다.

못 알아들은 척하지 못하도록.

“나를 광증에서 건져 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하고 너무나도 간절히 바랐거든.”

인간과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핏빛 눈동자가 위험스레 빛났다.

“그리고 늘 궁금했어. 정말로 그런 존재가 있다면, 나는 아르타누스처럼 그 존재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까?”

긴 동공이 유달리 가늘어졌다.

마치, 바늘처럼. 나를 당장에라도 찌를 듯.

“그 존재가 과연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혹은 너무 늦게 나타났다는 사실에 더없이 증오스러울지도 모르지.”

그래서 그는 어느 쪽인 걸까.

아르파드는 마치 생쥐 앞에 치즈를 놓아주는 뱀처럼 물었다.

“그대는 어떨 것 같나? 내가 그런 존재를 사랑해야 할까, 증오해야 할까?”

온몸의 솜털이 일시에 곤두서는 느낌이다.

나는 이런 의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설마, 벌써 아르파드가 눈치챈 건가?’

무엇을?

‘내가 드래곤의 혈통을 타고 내려오는 광증을 안정시킬 힘을 가진 ‘신부’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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