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아르파드는 우아한 손짓으로 자신의 날카로운 턱선을 매만졌다.
그의 표정을 보고 감정을 가늠하는 건 부친인 황제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지만.
지금은 조금 경우가 달랐다. 본인도 제 감정을 잘 몰랐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그 감정의 원인을 모른다는 게 더 정확했다.
기분은 너무나도 확실했으니까.
‘거슬려.’
그렇다. 먹던 생선 가시가 목구멍을 찌를 때를 닮은 애매한 불쾌감.
그리고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긴 했지만, 짐작이 아예 안 가는 건 아니다.
그의 기분이 이렇게 저조해진 시기가 명확했기 때문이다.
“사실 저는 미래를 살다가 비참하게 죽어서 회귀한 사람이라는 거요?”
비밀을 캐내려는 아르파드의 노력에 대한 그 여자의 대답은 저런 헛소리였다.
놀리는 것 같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런 말 뒤에 숨어 가며 사실을 말하지 않으려는 게 불쾌했다.
거슬렸다.
‘비밀이 너무 많은 여자야.’
사실 아르파드는 그런 사람을 싫어했다.
누구든 자신에게 숨기는 게 많은 사람을 좋아하겠느냐마는, 아르파드의 경우엔 ‘싫어한다’의 표현이 과격했다.
‘그런데도 왜 죽이고 싶은 생각이 안 드는지 이상하군.’
아르파드에게 ‘싫어한다’ 혹은 ‘의심한다’는 바로 ‘죽인다’와 연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안 그래도 신경 쓰고 주의할 것이 많다 보니, 사소한 곳에까지 주의를 할애하기 싫었던 것이다.
‘언제 미쳐 죽을지 모르는데, 굳이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하나?’
그래서 지금까지 거슬리게 하는 것들은 보통은 죽여서 없앴다.
물론 남들이 보는 앞에서 칼을 휘둘렀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랬다간 광증이 재발했다는 소리만 듣게 될 테니까.
사고나 그를 향한 암살 시도 등의 기회를 이용해 적절히 처리했을 뿐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혹은 놀랍지 않게도, 상아의 방에 앉혀 놓은 여자에게는 ‘죽여서 거슬림을 해결한다’는 해결 방법이 내키지 않았다.
그 당사자에게 말로 농락당했다고 본인이 느끼고 있음에도.
아르파드의 미간이 다시 구겨졌다. 저도 모르게 진심을 가득 담아 중얼거리게 된다.
“진짜 거슬리는군…….”
그러자 집무실에서 아르파드에게 상황을 보고 중인 비서관 율켄이 조금 소리를 높였다.
“무엇이 거슬리시다는 겁니까, 전하?”
“글쎄.”
당연히 아르파드는 율켄에게 친절한 대답을 주지 않았다. 율켄 본인도 기대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율켄은 아르파드를 따르는 이들 중 손꼽히게 혀가 날카로운 이였다.
“뭐가 거슬리는지 말하기 싫으신 그것 때문에, 제 보고를 귓등으로도 안 듣고 계신 모양이군요.”
아르파드가 그제야 고개를 살짝 돌렸다.
“어디까지 보고했지?”
“어디까지 들으셨습니까?”
아르파드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걸 보고, 율켄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하나도 안 들으셨다는 거군요.”
“다시 말해.”
“언제나 드리는 말씀이지만, 제 목 건강은 좀 신경 써 주시면 좋겠습니다만.”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신하의 핀잔을 아르파드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율켄은 다시 처음부터 보고 내용을 읊어야 했다.
그 첫머리는 바로 얼마 전부터 세간의 화제인 여성이었다.
“전하께서 명하신 대로 델핀 공녀 주변에 충분히 믿을 만한 사람들을 심어 두었습니다.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보고되고 있습니다.”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온 시종이 그에게 작은 쪽지를 건넸고.
율켄은 방금 추가된 정보를 첨언했다.
“델핀 공녀께서 황후궁에서 쫓겨난 부인 하나를 응접실로 불러들이셨다는군요. 아, 그리고 황후궁에서 한 달 뒤 아르타누스 홀의 연회에 귀부인들이 참석하는 걸 막았다고 합니다.”
“또 가당찮은 짓을 벌이는군.”
원수나 다름없는 계모의 흉계를 한마디로 정리해 버리고서, 아르파드는 비서에게 시선을 돌렸다.
율켄의 은테 안경 위로 아르파드의 붉은색 눈이 비쳤다.
“그런데 호칭이 틀리지 않았나?”
비서관은 주군이 무엇을 지적하는지 알았다.
그리고 저 말은 곧 ‘알아서 제대로 정정해라’에 가깝다는 것도.
하지만 그런 말 한마디에 바로 고개를 숙이는 성품이었으면, 그가 황태자궁에 붙어 있지도 못했을 거다.
율켄은 대범하게 대답했다.
“아직 황제 폐하께서 정식으로 황태자비 책봉 칙서를 내리지 않으셨잖습니까.”
“그렇더라도 이미 혼인 성사를 올린 내 아내야.”
율켄의 표정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존재를 보는 것처럼 구겨졌다.
“전하, 설마 진짜로 대로변에서 한눈에 반해서 약탈혼하신 겁니까?”
“정말 그렇다면?”
율켄은 가슴 속에 늘 품고 다니던 것을 꺼내 들었다.
“바로 사직하겠습니다. 정말이라면 전하의 광증이 재발한 게 틀림없으니까요!”
아르파드는 비서가 내민 사직서를 마력의 불꽃으로 불태워 버렸다.
“앗! 내 사직서!”
“어차피 또 가지고 있잖아.”
“그건 그렇지만요.”
아르파드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성격 나쁘고 유능한 비서관의 취미가 사직서 쓰기라는 걸.
그리고 율켄이 사직서를 내밀었다는 건 이런 의미였다.
‘님, 제정신이신가요?’
그 정도로 이번 약탈혼이 미친 짓으로 보이긴 하는 모양이다.
아르파드의 신하 입장에서는 더더욱.
“안 그래도 전하께서 언제 미칠지 다들 내기라도 하고 싶어 하는 상황인데 말입니다. 혹시 미친다는 쪽에 비밀리에 돈 거셨습니까?”
“적당히 해. 혀를 잘라 버리기 전에.”
“혀는 안 된다니까요! 그냥 그전에 목을 쳐 주시죠!”
아마 힐리아가 보았다면 주군이 미치면 아랫사람도 미칠 수밖에 없는 건가, 할 상황이었다.
아르파드의 약탈혼 시작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된 이유나 설명을 듣지 못했지만.
그 과정에서 귀찮은 뒤처리와 아르파드가 요구한 것들을 전부 해낸 당사자 율켄이었다.
그러니 율켄 입장에서는 이런 느낌이었다.
‘이 정도 불평할 자격은 되지 않습니까!’
아르파드도 그걸 아니까 협박 정도에서 끝난 것이다.
율켄은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그런데 대체 델핀 공녀께서는 무슨 마법을 부리신 겁니까? 황제 폐하께 아르타누스 홀을 받아 내시다니요.”
“나도 몰라.”
“저에게는 좀 얘기해 주셔도 되지 않습니까?”
아르파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진짜 몰라. 황제랑 결계 치고 둘이서만 쑥덕쑥덕하더니, 갑자기 아르타누스 홀이 떡하니 떨어지더군.”
“…?”
율켄은 다시 아르파드가 광증에 걸리지 않았나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오래 그를 모셔 온 측근답게 곧 진짜라는 걸 깨닫고 경악했다.
표정을 보고 안 것은 아니고, 아르파드의 화법과 말버릇을 잘 알기에 가능한 것이다.
“정말입니까?”
“그래.”
율켄은 고민에 빠졌다.
“전하의 말만 들으면 그분이 황제 폐하를 세뇌라도 한 것 같은데요?”
“…불가능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웃기군.”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아르파드 본인부터가 세뇌된 듯한 느낌이다.
그게 아니면 율켄이 사직서를 내밀 정도로 미친 짓이라 평하는 약탈혼을 실행할 리 없긴 했다.
“뭐, 정확한 건 앞으로 모시고, 지켜보면서 판단하면 되겠죠.”
저 ‘모시면서’가 곧 ‘감시하면서’라는 걸 주종 모두 알고 있었다.
“델핀 공녀라 부르는 것도 그때까지 계속할 거란 소린가?”
율켄은 씩 웃었다.
그가 모두가 두려워하는 아르파드를 스스로 선택해 주인으로 모신 것처럼, 그가 힐리아를 황태자비로 받아들이는 건 누구도 강제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르파드는 율켄의 그런 성격을 잘 알았다.
하지만 굳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내 앞에서는 델핀 공녀라는 말은 자제해라. 거슬린다.”
그렇다. 거슬렸다.
거슬리는 말을 지껄이는 입은 망설이지 않고 벨 수 있다.
측근인 율켄이라도 예외는 아니다. 그게 바로 아르파드의 성격이다.
주인이 진심임을 눈치챈 율켄은 재빠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 상아 침실의 주인이라 칭하지요. 이 정도는 괜찮으시겠지요?”
율켄은 의외라 생각하면서도 주인이 바라는 바를 맞춰 주었다.
물론 그러면서도 끝까지 ‘황태자비’ 소리는 하지 않았다.
“알아서 하도록.”
“예, 전하.”
율켄은 의아한 눈으로 언제나 인간답지 않은 주인의 기색을 살폈다.
‘평소의 전하시라면 절대 안 할 일들만 계속하시는군. 황제 폐하도 그렇고.’
그리고 그 모든 놀라운 사건의 중심에는 한 여자가 있었다.
‘힐리아 델핀 공녀.’
아르파드의 명에 따라 공녀가 아닌 다른 호칭을 입에 올렸지만.
속마음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그가 힐리아를 ‘비 전하’라 부르는 것은 진심으로 그녀를 안주인으로 인정한 뒤의 일이 될 터였다.
그전까지는 최대한 의심하고, 감시하고, 시험할 생각이었다.
그게 바로 율켄이 황태자궁에 있는 이유였으니까.
* * *
“어흐흑! 그래서 제가 그런 의미로 드린 말씀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필레른 자작 부인이라는 여자는 계속 내 앞에서 울고불고했다.
부정적인 말, 그것도 타인이 울고 짜는 걸 듣는 게 기분 좋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 울음 속에 좋은 정보가 들어 있으면 참을 만해지는 법이다.
황후궁에서 쫓겨나고 괜히 황태자궁을 기웃거리던 한 여자를 낚은 내 판단은 옳았다.
덕분에 황후와 에반젤린의 대응을 확인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저는, 저는 이제 어쩌면 좋을지… 어흑흑!”
필레른 자작 부인은 내 앞에서 계속 깨진 독처럼 눈물을 쏟아 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손수건과 길게 내린 앞머리 사이로 날카로운 눈빛이 나를 관찰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이 여자의 얼굴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내 친구가 되고 싶다고 접근해서,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한 것이 바로 이 사람이었다.
이디스 필레른.
필레른 자작 부인.
‘이번에도 이 사람은 나를 배신하려고 다가왔구나. 그것도 지난번보다 너무 빨라.’
그만큼 황후와 에반젤린이 나를 경계하고 있다는 소리일 터였다.
‘그리고 이미 알고 있는데 넘어가는 것처럼 멍청한 짓도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