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Chapter 4. 용의 신부
하지만 찰나 내 몸을 굳게 만든 긴장감은 곧 흔적도 없이 피부 아래로 감춰졌다.
타인 앞에서 감정 하나 제대로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숙하진 않으니까.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아르파드와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꽤 특이한 식성이시네요? 혹시 드래곤의 피 때문에 생긴 광증 중에 그런 것도 있어요?”
그러자 아르파드의 매끈한 미간에 주름이 졌다.
“누굴 식인 취미가 있는 인간으로 모는군.”
“아니라면 정말 다행이고요. 그래도 황제가 될 사람인데, 식인 취미가 있으면 좀 그렇다고요.”
“단순히 황제가 될 사람일 뿐인가?”
“또 뭐가 있어요?”
아르파드는 성큼 다가왔다. 얼마나 가깝게 다가섰느냐면, 내 양쪽 발 사이로 그의 부츠가 코를 들이밀 정도였다.
조금만 더 가까이 왔으면 다리 사이로 밀고 들어왔을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아르파드는 내 귓불에 거의 입술을 대다시피 하고 속삭였다.
“그대의 남편이기도 하지.”
뜨거운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온몸의 근육이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지고, 얼굴에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내가 아르파드의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식인종 취급으로 돌려 버리긴 했지만.
물론 저 말이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는 건 잘 안다.
‘좀… 야한 의미로 말이지.’
하지만 모르는 척하려고 했다.
그랬는데…….
이렇게까지 몸으로 직접 말할 줄은 몰랐다.
아르파드가 작게 속삭였다.
“그대는 왜 자꾸 일부러 말을 못 알아들은 척하는 건지 모르겠어.”
“내가, 뭘 모른 척했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자, 아르파드의 뜨거운 손가락이 내 목덜미를 쓱 훑어 내리더니 속삭였다.
“다 알아들은 주제에…….”
온도가 있다면 뜨겁고, 촉감이 있다면 끈적할 것이고, 향기가 있다면 달콤할 터다.
불쌍한 벌을 꾀어 잡아먹으려는 사냥꾼이 모아 둔 꿀 같은 남자였다.
그의 존재 자체가 그렇지만.
내 긴장감이 최고조로 올라간 순간.
아르파드의 입에서 드디어 본론이 나왔다.
“정말 날 미치지 않게 해 주겠다는 말과 아까 아르타누스의 축복 어쩌고 한 말이 연관 없는 건가?”
“……!”
순간적으로 터질 듯 부풀어 올랐던 긴장감과 열기가 어이없이 푸시시 꺼졌다.
잠시 진지하게 홀릴 뻔했다는 사실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이 남자’ 앞에서 무슨 바보 같고 한가한 생각이람.
‘역시 그냥 내 비밀을 캐내려는 미남계였잖아. 괜히 오버하거나 넘어갔다간 큰일 날 뻔했네.’
그래. 이 남자는 보기는 좋지만 과하게 위험하다고. 벌떼가 도사리고 있는 꿀이 가득한 벌집 같은 인간이다.
나는 평온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황제 폐하께 결혼을 인정받기 위해 지어낸 말이라고요.”
“아르타누스 홀을 받아낸 것까지는 좋아. 그 자체로 황제의 인정으로 받아들여질 테니.”
그는 정말로 미심쩍다는 듯 나를 보며 물었다.
“대체 뭘 어떻게 증명하겠다는 거지?”
역시 추궁하려는 거였네.
미리 준비해 둔 대답이 바로 튀어나왔다.
윙크와 함께.
“그건 비밀이에요.”
“…….”
이번엔 아르파드가 푸시시 할 차례였다.
그는 낮게 한탄했다.
“대체 그대에게 비밀이 아닌 게 있긴 한 건가?”
“당연히 있죠.”
“뭔데?”
이제 아르파드는 불신 가득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저는 미래를 살다가 비참하게 죽어서 회귀한 사람이라는 거요?”
이제 아르파드의 표정에 가득 떠올라 있던 의심은 황당함으로 번져 있었다.
“대답하기 싫다는 말을 그렇게 창의적으로 할 줄은 몰랐군.”
“글쎄요. 뭐, 제가 상상력이 좋긴 해요.”
사람들은 너무 허황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면, 절대 믿지 않는다.
내가 이걸 아는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회귀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말해 본 적이 있어서 그렇지.’
대충 두어 번 정도.
그리고 매번 결과는 좋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번에 나는 아르파드가 믿지 않을 걸 알면서 일부러 말한 거다.
‘절대 못 믿을 이야기를 해서 주의를 돌려 버리기 위해서지.’
그래. 그것뿐이다.
절대로 다른 의도나 부질없는 희망 같은 게 있었던 게 아니었다.
* * *
황제가 힐리아와 아르파드에게 아르타누스 홀을 내주었다는 소식은 빠르게 황궁 안을 돌았다.
“잠깐, 그럼 벌써 폐하께서 인정하신 거예요?”
“어제 입궁 직후 딱 한 번 만나 보시고 말이죠.”
“생각보다 황태자… 아니, 델핀 공녀의 수완이 좋은 거 아니에요?”
“그보단 역시 아들 쪽으로 팔이 굽으신 것 아닐까요?”
“어느 쪽이든 델핀 공녀가 진짜 황태자비가 되는 건가요?”
“정식 국혼식도 없었는데.”
“들어보니까, 이미 따로 혼인 성사를 올리고 왔대요.”
황후궁에서의 티파티를 위해 모여 있던 귀부인들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바빴다.
‘어느 쪽으로 붙어야 하는 거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아르파드 황태자는 언제 광증이 도질지 모르니 불안해.’
‘일단은 상황을 좀 보자. 아르타누스 홀을 맡긴다는 건 의미가 큰 게 맞으니까.’
그들 중 한 명이 눈치 없게 물었다.
“폐하께서 인정하신 것 같은데, 그러면 델핀 공녀라고 부르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이 눈치 없는 질문에 대신 답한 것은 함께 수런거리던 귀부인들이 아니었다.
황후궁이 제 앞마당인 것처럼 나타난 에반젤린이었지.
“그러면 우리가 델핀 공녀를 어찌 불러야 할까요, 부인?”
“아, 루스 후작 영애. 안녕하세요.”
“그보다 먼저 대답을 하셔야죠. 우리가 델핀 공녀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에반젤린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속에서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눈치 없는 부인은 그냥 생각을 입 밖으로 냈다.
“그야 당연히 황태자비 전하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아르파드 황태자 전하와 혼인하셨으니.”
그러자 에반젤린은 말없이 생각 짧은 부인을 노려보다가 곧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흑, 어쩌면 좋아요!”
“가, 갑자기 왜 그러세요, 영애?”
“오라버니가 너무 가엽고 불쌍해서요.”
“…네?”
그때 에반젤린의 뒤를 늘 시녀처럼 따라다니며 돕는 두 영애가 알아서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역시 에반젤린 님은 다정하고 사려도 깊으셔라.”
“맞아요. 지금 가장 고통스럽고 힘든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신부를 약탈당한 루드비히 대공 전하세요.”
“그런데 델핀 공녀를 황태자비라고 부르다니. 루드비히 대공 전하를 얼마나 더 상처 줄 생각인 거죠?”
그러자 에반젤린이 커다란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외쳤다.
“너무해요! 아무리 아첨하고 싶으셨다고 해도, 피해자가 멀쩡히 있는데!”
“맞아요. 에반젤린 님. 게다가 황제 폐하께서 아직 공개적으로 허락을 천명하신 것도 아니잖아요?”
“맞아요. 아르타누스 홀에서 파티를 여는 걸 허락하셨다고 해도, 그게 곧 결혼 허락인 건 아니죠!”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에반젤린과 영애들은 한 눈치 없는 부인을 ‘아첨하려고 피해자를 모독한 속물’로 몰고 갔다.
“아니, 나는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에……!”
에반젤린은 냉혹하게 잘라 말했다.
“어머니께서는 권력에 아첨하려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세요.”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황후궁에 자주 드나드는 이들은 잘 알았다.
‘이건, 앞으로 황후궁 출입을 막겠다는 소리잖아!’
당연히 제국 내 여인들의 가장 높은 자리에 선 것이 황후다.
황후로부터 외면당한 이는 사교계에서 절대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특히나 에반젤린은 현재 사교계 제일의 실세로서, 최고의 꽃이라 불리는 위치였다.
그녀에게 아웃당한 것이다.
“요, 용서해 주세요! 제발 황후 폐하께 직접 말씀드릴 기회를……!”
하지만 에반젤린은 차갑게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황후궁의 하녀들이 다가와 에반젤린에게 아웃당한 부인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아니야! 나는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라니까요!”
발버둥 쳐도 소용없었다.
그 부인은 사정없이 내쳐졌고, 앞으로 두 번 다시 황후궁은 물론이고, 에반젤린의 살롱에도 초대받지 못하리라.
이건 사실상 사교계에서의 추방령이나 마찬가지였다.
에반젤린은 조금 전의 눈물은 거짓이었다는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귀부인들에게 뒤돌았다.
“오늘 어머니께서는 몸이 불편하셔서 제게 대신 손님들을 맞이하라고 명하셨답니다.”
그러자 귀부인들은 잽싸게 에반젤린에게 아첨을 시작했다.
“저희야 황후궁에 발걸음 한 것만으로도 광영인 걸요!”
“맞아요! 그리고 사교계의 금빛 장미라 불리시는 에반젤린 님을 뵐 수 있다니,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에요.”
“루드비히 대공 전하께선 좀 어떠신가요?”
“황후께서 대공 전하를 많이 아끼시잖아요.”
에반젤린은 처연한 표정을 했다.
“오라버니는 마음의 상처가 가장 크신 듯해요. 어머니도 그게 마음 쓰이시는 모양이고요.”
연이어 그녀의 초록색 눈이 번뜩였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차마 아르타누스 홀의 연회에는 참석하기 힘드실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
귀부인들은 이 말에 숨겨진 의미를 이해했다.
‘아르타누스 홀의 파티에 참석하지 말라고 황후가 명령했다는 소리잖아!’
이와 같은 소리 없는 명령이 황도 사교계 곳곳에 내려졌다.
거스르는 자는 곧 사교계에서 추방당하게 될 것이다.
* * *
아르타누스 홀의 연회를 앞두고 황후와 에반젤린의 나에 대한 대책은 빠르게 내 귀에 들어왔다.
‘내 파티를 망치겠다는 소리군.’
당연하지만, 얌전히 당해 줄 리는(생각은) 절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