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등 뒤에서 알현실 문이 닫히자마자,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아…….”
조금만 더 긴장이 풀렸다면 그대로 주저앉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황제의 눈과 귀가 있을 게 틀림없는 곳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최대한 꼿꼿하고 당당한 자세를 유지하려 애쓰면서, 나는 얌전히 아르파드를 기다렸다.
‘어차피 지금 나 혼자 걸어서 황태자궁으로 가려다간 쓰러질지도 몰라.’
크고 튼튼한 지팡이(?) 아르파드가 내겐 필수였다.
게다가 공식적으로 사랑에 눈먼 잉꼬부부 역할을 해야 하니.
찰싹 붙어서 움직이는 편이 낫기도 했다.
게다가 내 입으로 아르파드에게 약속했다.
“저는 밖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아무리 나라도 방금 한 약속을 어기긴 그랬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건 언제나 뜻대로 만은 되지 않는 법이다.
모든 돌발 상황을 내가 직접 통제할 수 없으니까.
예를 들어, 전남편 겸 전 약혼자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경우라던가…….
“힐리아!”
늘 맵시 있고 우아하게 꾸미고 다니는 게 자랑이던 루드비히가 엉망인 꼴로 내 앞에 나타났다.
“…루드비히?”
이 인간이 왜 갑자기 여기서 튀어나와?
그런데 그의 꼴이 참 볼 만했다. 여러모로 처음 보는 꼴.
늘 단정하게 빗어 기름으로 넘기던 머리는 완전히 산발이 되어 먼지에 찌들어 있었고.
옷 역시 먼지 구덩이에 10번은 굴리고 찢어 놓은 꼴이었다.
‘아, 내가 뿌린 미끼를 쫓아갔다가 아닌 걸 알고 돌아온 거구나.’
그걸 생각하면 도리어 빠른 도착이라고 봐야 하겠다.
미끼를 다섯 일행쯤 뿌렸는데, 한두 개만 확인해 본 모양이지.
그는 놀랍게도 조금 반가운 표정으로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다시 한번 내 이름을 부르면서.
“힐리아! 드디어 찾았다!”
내가 뭐라 대답할지 잠시 망설이는 사이, 그는 벌써 내 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재빠르게 손을 뻗어 내 손목을 잡으려 했다.
“이제 안심해도 돼. 돌아가자, 힐리아.”
그 순간.
세 번 나를 배신하고 죽였던 그에 대한 기억이 벼락처럼 머리에 내리꽂혔다.
나를 조롱하고 혐오하며 내려보던 루드비히의 얼굴.
“이제 네 쓸모는 끝났다는 소리야, 힐리아.”
“난 처음부터 단 한 순간도 너를 사랑한 적 없어.”
“지금 네가 얼마나 추한지 알아? 얌전히 죽어 버리도록 해.”
지독한 역겨움이 목구멍에서 치솟았고.
나는 루드비히의 손길을 그대로 쳐 냈다.
탁!
그러자 그는 당황한 듯했다.
“왜 그래, 힐리아?”
나는 말 없이 두어 걸음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등이 벽에 닿았다.
루드비히는 내가 보인 거부감과 혐오감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듯했다.
“아, 너무 충격이 심해서 그렇구나. 이제 내가 왔으니까 걱정하지 마.”
개소리.
하지만 루드비히가 짖는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지금 내 몰골 보이지? 내가 널 찾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안 보여?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지.”
내 귀로 듣기에도 얼음장처럼 차가운 대답이 목구멍을 비집고 나왔다.
“싫어.”
“…뭐?”
그는 내 거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했다. 그리고 반말 역시.
제대로 못 알아듣는 듯한 그에게 다시 한번 못 박았다.
“내가 너와 함께 돌아갈 일은 없다고 했어.”
내뱉고 나니 아주 조금이지만 가슴이 시원해졌다.
여전히 루드비히는 자신이 뭘 들은 건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뒤이어 나는 그가 한 말실수도 정정해 주었다.
“그 우리 집이라는 건 델핀 공작저를 말하는 거겠지?”
그는 아예 아버지의 방을 차지하고 지냈고.
에반젤린은 객실 중 가장 좋은 곳을 제 방처럼 썼으니까.
사실상 델핀 공작저가 그들의 신혼집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건, 자조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이제 너는 델핀저에서 지낼 자격이 없으니 빨리 짐 싸서 나가.”
루드비히는 거의 폭언을 들은 듯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하지만 곧 표정을 수습하고 최대한 다정한 척, 나를 달래려 들었다.
“힐리아. 역시 충격이 너무 심해서 정신을 놓은 모양이네. 내가 우리 집 말고 어디로 가라는 거야.”
“그야 생쥐 구멍처럼 작고 초라한 키엘른 대공저로 돌아가라는 소리지.”
나는 기억 속에서 나를 조롱하던 루드비히처럼 웃었다.
그 순간.
루드비히는 내 팔을 거칠게 잡아챈 다음 외쳤다.
“봐주는 것도 정도가 있어! 적당히 하지 못해!!”
그 순간.
닫혀 있던 알현실의 문이 열리고, 장신의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남자의 붉은 눈이 나와 루드비히를 향한다.
비인간적인 세로 동공이 좁아지더니, 보는 이의 등골이 오싹해지는 얼음장 같은 살기가 풍겼다.
나는 도움을 청하기 위해 그를 불렀다.
“아르파드!!”
내 부름에 응하듯, 아르파드의 신형이 사라졌다.
“……?”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정도로 빠르게 움직인 게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는 어느새 나와 루드비히의 바로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내 손목을 잡아챈 루드비히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이게 무슨 짓이지? 루드비히?”
“너야말로, 아르파드!!!”
루드비히는 이를 갈며 증오심과 열등감 가득한 어투로 부르짖었다.
“네가 내 아내를 납치한 죄는 황제 폐하께서 물어 주실 거다. 나는 힐리아를 데려가겠어!”
아르파드의 입가에 날카로운 미소가 걸렸다.
보는 이를 찔러 죽일 듯한 미소였다.
“네 아내? 여기 네 아내가 어디 있지?”
“이 자식이! 네가 무슨 짓을 했어도 힐리아는 내 아내야! 황제 폐하께서 그리 정해 주셨단 말이다!”
그 순간.
루드비히의 손목을 쥔 아르파드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우드득!
기이한 소리가 들렸다. 사람 뼈가 부서지는 듯한.
그와 함께 루드비히는 꼴사나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아르파드가 거칠게 잡아당기자 나를 잡고 있던 루드비히의 손이 떨어져 나왔다.
그는 그대로 제 사촌을 쓰레기처럼 바닥으로 내던졌다.
“끄억!”
루드비히는 꼴사납게 바닥을 나뒹굴며 기묘한 방향으로 비틀린 제 손목을 부여잡았다.
처절한 비명이 울렸고.
나는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놀라서라거나 겁을 먹어서는 절대 아니었다.
‘웃는 걸 보이면 안 돼.’
루드비히가 지독한 꼴로 나뒹구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르파드는 그걸 알아본 모양이다.
화가 난 듯했던 표정이 살짝 풀렸다.
그는 두 팔로 나를 안아 올리며 귓가에 속삭였다.
“다리라도 하나 더 부러뜨려 줄까?”
“됐어요. 여긴 어전이라고요.”
쳇,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부러진 손목을 잡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루드비히는 악을 썼다.
“폐하께서, 폐하께서 네놈을 그냥 놔두지 않으실 거다! 이렇게 무도한 미친놈을 누가……!”
아르파드는 나를 안아 올린 채, 루드비히를 비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폐하께서 한 달 뒤 아르타누스 홀을 나와 아내의 피로연장으로 내주셨다.”
정확히는 한 달 하고 엿새 뒤지만, 그게 그거긴 했다.
“뭐?”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루드비히의 두 눈이 경악으로 홉떠졌다.
그가 유일한 동아줄처럼 매달리던 황제가 우리를 인정했다는 말이다.
“그럴, 그럴 리 없어! 폐하께서 그러실 리!”
“폐하께선 내 아내가 꽤 마음에 드신 모양이야. 그래서인지 친히 아르타누스 홀을 허가해 주셨다.”
그리고 선심 쓰듯 한마디를 던졌다.
“내 아내가 허락한다면 너에게도 초대장을 보내 주도록 하지.”
“아르파드으─!!”
루드비히의 처절한 발악을 조롱하며, 아르파드는 나를 안은 채 그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복도의 끝 즈음에서, 또 한 명의 눈에 익은 사람과 마주칠 수 있었다.
거기 서 있는 것은 불타는 듯한 초록빛 눈동자를 치켜뜬 에반젤린이었다.
그녀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물었다.
“오라버니, 방금 하신 말씀이 사실이신가요?”
그녀는 루드비히만이 아니라 아르파드 역시 오라버니라 불렀다.
어쨌건 황후의 딸이니, 두 사람에 오라버니라 부르는 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의붓 여동생뻘이 되긴 하니까.’
하지만 나와 아르파드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절대 오빠와 그 아내를 보는 눈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와 루드비히가 함께 있는 걸 볼 때보다 더욱 이글거리고 있었다.
명백한 질투로.
‘뭐야, 아까도 그렇고 얘 루드비히랑 쿵짝 맞는 거 아니었어?’
그녀는 다시 물었다.
“황제 폐하께서 피로연을 위해 아르타누스 홀을 허락하셨다고요?”
장갑을 낀 두 손이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