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용의 축복?
그런 게 있을 리 있나.
당연히 황제를 설득하고 명분을 만들기 위해 지어 낸 말이다.
하지만 나는 별걱정이 없었다.
내가 황제 앞에서 한 말 중에 중요한 진실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르파드를 광증으로부터 구해 줄 수 있어. 이건 사실이야.’
그러니까 나는 당당하다!
나를 바라보는 황제와 아르파드의 시선이 거의 태워 버릴 것처럼 뜨거웠다.
한참 동안 알현실 안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
“…….”
꽤 이어진 침묵을 깬 것은 이번에도 황제였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걸 믿으라고 한 말인가?”
“저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답니다, 폐하.”
당연히 입술에 침을 잘 바르는 걸 잊지 않았다.
황제는 혀를 찼다.
“신물이나 사제의 입회하에 그게 진실이라고 신성언을 통한 서약을 할 수 있겠는가? 목숨을 걸고?”
당연히 안 된다. 새빨간 거짓말이니까.
하지만 나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대답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답니다. 아르타누스께서 제게 약속을 해 주셨으니까요.”
“약속?”
“예. 직접 증거를 보여 주겠다 하셨습니다.”
거짓말쟁이를 보는 듯하던 황제의 얼굴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내가 하도 당당하게 말하니 진짜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모양이다.
“…무슨 증거를?”
좋아. 황제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온 이상 반 이상 성공이나 다름없다.
나는 태연하고 대담하게 한 가지를 더 요구했다.
“정확히 한 달 하고 이레 뒤 아르타누스 홀을 저와 황태자 전하의 결혼식 피로연을 위해 내어 주십시오.”
“…뭐?”
황제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다시 물었다.
“아르타누스 홀? 거기가 어딘지 알고 하는 소리인가?”
“제국인이라면 모를 수 있겠습니까. 폐하의 대관식이 열린 홀이지요.”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아르타누스 홀은 황제의 대관식 때에만 사용하는 홀이다.
시조인 드래곤의 이름을 붙여 놓은 걸 보면 알겠지만,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홀이기도 했다.
거기를 아무리 황태자라 해도 결혼식 피로연장으로 내놓으라?
말이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세 번이나 회귀한 건 말이 되나?’
그리고 그 정도가 아니면, 황제에게 이 결혼을 허락받았다는 걸 대대적으로 공표하기 어려웠다.
물론 그것만은 아니고, 피로연에서 보여 줄 예정인 퍼포먼스를 위해서 제일 좋은 곳이 그 홀인 이유도 있었다.
‘다른 곳에서도 가능하긴 하지만, 상징성도 의미도 거기가 최고야.’
감아쥔 손아귀 사이에 식은땀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하지만 표정이나 태도에 내가 이렇게 긴장했음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척, 내가 한 말이 전부 사실인 척했다.
한참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던 황제는 손을 까딱였다.
“가까이 와 봐라.”
이건 예상 못 해서 하마터면 비틀거릴 뻔했다.
다행히 평정을 유지한 채, 나는 천천히 옥좌의 계단을 올라가 황제의 바로 앞에 섰다.
그러자 강력한 마력이 나와 황제를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이건……?”
“가벼운 결계다. 안의 소리가 밖으로 새는 걸 막는 것뿐이다.”
아, 아르파드가 들을 수 없는 대화를 하려는 모양이다.
이걸 눈치챘는지 아래쪽에서 아르파드가 불만스럽게 팔짱을 끼는 게 보였다.
그때, 황제의 심란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대체 무슨 생각인 게냐?”
“저는 다른 꿍꿍이가 없습니다. 그저 말씀드린 대로 위대한 드래곤의 뜻에 따른 것뿐입니다.”
“…….”
황제의 붉은 눈은 피가 이어진 사람들답게 아들과 꼭 닮았다.
의심과 불신으로 쪄 들어 있다는 소리다.
“내가 그런 말을 믿을 것이라 보느냐?”
“믿으시든 믿지 않으시든 결과는 바뀌지 않으니까요.”
내가 아르파드의 광증을 막아 줄 수 있다는 가장 중요한 점은 말이다.
덕분에 내 목소리에서는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그걸 느꼈는지 황제는 더더욱 혼란스러운 표정이다.
피로와 불안, 의심으로 흔들리는 황제의 붉은 눈 속에서 나는 한 가지 이질적인 감정을 알아보았다.
‘…희망.’
나는 황제가 희망을 잡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다.
그의 본심을 아니까.
“나는 끝내 그 아이에게 제대로 된 아비 역할을 한 번도 하지 못했구나.”
회한 어린 말을 하던 황제의 표정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이 말을 할 수 있었다. 누구도 알지 못했을, 황제의 진심을 지적했다.
“폐하. 폐하께서는 아르파드 전하를 하나뿐인 아들로서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하고 계시지요.”
황제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갑자기 무슨 말이냐?”
황제의 목소리는 평온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떨림을 감추진 못했다.
방심하고 있다가 정곡을 찔린 사람의 반응이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물었다.
“폐하께서 사실 누구보다 아들을 구하고 싶으시다는 걸, 전 잘 알고 있어요.”
그의 피를 토하는 듯하던 외침을 기억하니까.
“하나뿐인 아들을 죽이고 싶을 아비가 세상에 있겠는가!”
나는 감히 손을 뻗었다.
갖은 흉터로 거친 황제의 손을 가만히 잡은 채,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제게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그러면 폐하의 귀한 아드님을 구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이겠어요.”
* * *
황제 발터 이스트리드는 말문이 막히는 걸 느꼈다.
아내의 죽음 이후 한 번도 드러낸 적 없는 가장 은밀한 속마음이 파헤쳐진다.
그것도 제대로 대화해 보는 것은 처음인 어린 여인에 의해.
가늘고 여린 손으로 황제의 주름진 손을 마주 잡은 채.
힐리아는 환하게 웃었다.
마치 먹구름 틈새로 비쳐드는 햇살을 연상시키는 미소였다.
죽은 아내가 떠오르는 미소였다. 그리고 그는 실로 오랜만에, 황제로서가 아니라 그저 한 인간으로 돌아갔다.
발터 이스트리드라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13년 전 아내가 죽은 이후 처음으로 희망을 품어 보고 싶어졌다.
아내의 유언이 생생하게 다시 한번 뇌리에서 재생된다.
“…발터. 제발 그 아이만은, 우리 아들만은… 나와 같은 운명을 맞지 않도록…….”
발터 이스트리드는 알고 있었다. 자신은 황제다. 언제 어디서라도 황제로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하지만 벌써 13년을 황제로서만 살아왔다. 아버지로서의 자신을 죽인 채. 그건 너무나도 힘들고 잔인한 일이었다.
하나뿐인 아들을 의심하고 견제하면서도, 정말 아들마저 잃을까 두려워해 온 고통스러운 세월.
이것이 비이성적이고 충동적이라는 건 알았다. 그럼에도 그는 이 충동에 몸을 맡기지 않을 수 없었다.
“제발 그 애를 구해 줘요…….”
어쩌면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등을 밀어주길 기다린 건지도 몰랐다.
핑계가 필요했던 걸지도.
결국 황제는 아니, 한 인간 발터 이스트리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게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그러면 폐하의 귀한 아드님을 구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이겠어요.”
‘저 말은, 내가 너무나도 간절히 바라왔던 욕망을 건드리고 있구나.’
거부하기에는 지독하게 희망적인 말이었다.
그가 너무나도 간절히 바라왔던 바로 그 말.
한참의 침묵 끝에 황제는 결계를 풀고 대답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좋다. 한 달 후쯤에 아르타누스 홀을 열어 주겠다. 그곳에서 네가 네 말을 증명한다면, 이 결혼을 인정해 주마.”
항복이었다.
힐리아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 * *
‘해냈다!’
내 계획의 가장 어려운 부분 첫 번째 단계가 약탈혼 실행이라면.
두 번째는 단연 황제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두 번째가 더 힘들지 않을까 했는데…….’
다행히 해냈다.
사실상 황제가 아르타누스 홀을 내준 것만으로도 우리 결혼을 허락했다고 여겨질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내가 ‘증명’해 내면 누구도 태클을 걸 수 없게 되리라.
약 한 달 후의 증명이 바로 세 번째 단계였다.
‘꼭 해내고 말겠어!’
긴장이 풀리려고 하니까 다리가 더욱 후들거린다.
나는 아르파드에게 더욱 기댔다. 아르파드는 자연스럽게 나를 부축하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황제와 무슨 대화를 나눈 거지?”
그의 목소리에는 불쾌감과 의심이 덕지덕지 묻어났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 결계를 치고, 비밀 대화를 나눈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그러는 본인도 결계로 나와의 대화가 안 들리게 하는 주제에.’
사실 알현실에 들어설 때부터 아르파드는 계속 이랬다.
나에게 무언가를 속삭일 때마다.
내 대답을 들을 때마다.
‘이런 점도 꼭 닮은 부자란 말이야.’
물론 황제는 티를 안 내도 아들을 사랑하고 아껴도, 아들은 남과 대화할 때는 맘껏 ‘황제’ 운운하고 있지만 말이다.
나는 씩 웃으면서 대꾸했다.
“비밀이에요.”
“…….”
아르파드의 매끈한 미간이 불만스럽게 꿈틀거렸다.
“자세한 추궁은 황태자 궁으로 돌아가서 하지.”
어쩐지 각오하라는 선전포고로 들리는 건 내 오해인 걸까?
어쨌든 우리가 막 물러나려는 찰나였다.
황제가 뜻밖에 명령을 내렸다.
“…잠시 아르파드만 남거라.”
“저 말입니까?”
아르파드는 꽤 당황한 표정을 했다.
“그래. 네 처는 잠시 밖에서 기다리게 해라.”
“…!”
조금 전까지 나를 계속 ‘델핀 공녀’라 부르던 황제다.
‘아르파드의 처’라는 표현은 처음 쓴 거다.
‘좋았어!’
나는 때를 놓칠세라, 아르파드의 등을 밀었다.
“저는 밖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대화하고 오세요.”
다리가 후들거리던 것도 잊고 씩씩하게 걸어 나갈 수 있었다.
쿵!
등 뒤로 알현실의 문이 닫혔다.
* * *
알현실에 단둘이 남은 뒤로 잠시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늘 그랬다. 부자간이지만 단둘이 있던 적이 거의 없었다.
부황이 먼저 그를 불러 이렇게 남긴 것도 10여 년만이다.
어린 시절에야 단란한 가족이었지만…….
이제는 너무 오래된 기억이다.
‘이제 와서 부자(父子) 흉내라도 내고 싶어진 건가.’
아르파드는 비뚜름한 미소를 지은 채 용건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황제는 아들에게 물었다.
“너는 저 아이의 말을 믿느냐? 그래서 약탈혼이라는 미친 짓을 저지른 게냐?”
역시 부황은 조금 전 힐리아가 한 허황된 말을 믿는 건 아닌 모양이다.
그렇다면 힐리아는 어떻게 아르타누스 홀을 받아 낸 걸까.
역시 그가 듣지 못한 둘의 대화에 은밀한 거래라도 있었던 걸까.
새삼스레 불쾌감을 느끼면서 아르파드는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못 믿으면서 그런 얼토당토않은 짓을 벌여?”
아르파드는 힐리아를 만난 그날 밤을 떠올렸다.
굳은 표정으로 지하 묘지까지 그를 찾아온 여자를.
그녀가 그에게 던진, 절대 거부할 수 없는 협박이자 의뢰를.
“저는 전하가 미치지 않은 채 무사히 황위에 오르게 해 드릴 수 있어요.”
그 말을 떠올리며, 아르파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처음 만난 순간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는 뒷말을 강조하기 위해 잠시 뜸을 들였다.
“이 여자 곁에 있으면 적어도 미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라고.”
“…….”
“그래서 무리수를 쓴 겁니다.”
황제는 아들에게 더는 어떤 말도, 질문도 하지 않았고 그대로 돌려보냈다.
아르파드는 약간 들뜬 기분으로 알현실의 문을 열었다.
이 앞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여자를 떠올리며.
그런데 막상 문이 열렸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는 장면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아르파드!”
힐리아의 손목을 틀어잡은 루드비히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