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그 때문에 황제가 부른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아르파드에게 부탁했다.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
“선황후 폐하의 유품 가지고 있죠? 좀 빌려줬으면 해요.”
아르파드가 좀 예민하게 굴지 않을까 살짝 걱정했다.
전 황후는 황제만이 아니라 아르파드에게도 약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외로 아르파드는 선선히 본인이 소장하고 있던 모친의 유품을 빌려주었다.
나에게 어울릴 만한 것을 직접 골라 주기도 했다.
“그것보단 이쪽이 더 낫겠군. 그대의 머리 색, 눈 색과 잘 어울려.”
내 머리에 자수정 티아라를 대어 보더니 저렇게 말하고.
세트인 목걸이는 아르파드가 직접 걸어주기까지 했다.
“잘 어울려. 내 예상보다 훨씬 더.”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가늘게 접은 아르파드는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래서 나는 순수한 호의로 이렇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뭘?”
“잘 쓰고 무사히 돌려줄 테니까요.”
그러자 아르파드는 또 미묘한 표정을 했다.
기분 좋게 깨문 밤 속에 벌레가 있는 걸 본 듯한 표정.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
“네? 하지만 중요한 유품이잖아요?”
“그렇지. …하지만 그대가 이걸 돌려줘 버리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엥?”
“며느리에게 보석과 드레스를 물려주는 건 흔한 일이지. 하지만 아내가 남편에게 시어머니의 유품을 되돌려 주는 건 흔한 일이 아니야.”
“아…….”
맞는 말이긴 했다.
그런 건 보통 이혼할 때나 밟는 절차 중 하나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태평하게 대꾸했다.
“그건 그렇네요. 알았어요. 잘 빌려서 쓰다가, 이혼할 때 곱게 돌려드리고 갈게요.”
* * *
아르파드는 이 이상한 여자가 아까 한 말을 다시 떠올렸다.
이혼할 때 보석과 드레스를 돌려주고 가겠다는 말.
그의 모친이 남긴 유품인 드레스와 보석을 장식한 채, 여자는 거울 속에서 웃고 있었다.
목걸이를 직접 걸어 주느라 아르파드는 그녀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직접 눈을 맞춘 것이 아니라, 거울 속으로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녀는 아르파드를 훔쳐보고 있었고.
아르파드 역시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여자야.’
그녀의 모든 것이 전부 거슬렸다.
말투, 숨결, 버릇, 머리카락 한 올까지 전부.
하나하나가 손톱 밑을 찌르는 가시처럼 신경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아르파드는 스스로 질문했다.
‘내가 왜 이러는 거지?’
그리고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너무 의심스러워서 경계할 수밖에 없긴 해.’
게다가 도저히 루드비히의 것이 되게 놔둘 수 없을 정도로 위협적이다.
아르파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다. 그것뿐이다.
어차피 이제 그의 손아귀에 놓인 여자였다.
가까이 두고 관찰하다 보면, 저 이상하고 거슬리는 것들의 원인을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러고 나면 다시 흥미를 잃게 되리라. 그가 대부분 사람에게 그랬듯이.
별궁에서 김이 새게도 여자는 졸속으로 치른 결혼식 이후 거의 잠만 잤다.
조금 깨어 있던 시간 동안 그에게 했던 말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황제 폐하께 이 결혼을 인정받아 줄 테니까.”
“어떻게?”
“그건, 비─밀.”
“…….”
여자는, 힐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찡긋했더랬다.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여자다.
아르파드는 평소와 달리 자주 입가에 피어나려는 웃음을 지그시 눌렀다.
그리고 그녀를 에스코트해 알현실로 들어서며 생각했다.
‘그럼 어디 한번, 솜씨를 보도록 할까.’
이제, 그가 무리해서 치른 약탈혼에 대한 대가를, 이 여자가 치러야 할 때였다.
* * *
알현실로 들어서는 우리를, 정확히는 나를 보고 황제의 시선이 지진이 난 듯 떨렸다.
난 그걸 보고 속으로 쾌재를 울렸다.
‘역시! 동요할 줄 알았어.’
나는 황제의 가장 큰 약점이 죽은 황후, 아르파드의 모친이라는 걸 잘 안다.
‘왜냐하면 본인에게 직접 들었거든!’
지난 세 번의 전생 중, 나는 유폐되어 있던 도중 은퇴하고 죽음만을 기다리던 황제와 친밀하게 지냈던 적이 있었으니까.
그때 황제 본인에게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지금 옥좌 위에 앉은 황제는 더없이 위엄 있고 힘이 넘쳐 보였다.
얼굴의 상처마저도 그의 강인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일 정도니까.
백발에 완전히 늙어 버린 얼굴을 하고 있던 이와는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같은 사람이지.’
그리고 나는 이미 그의 진심을 알았다.
그러니 이렇게 배짱 있게 나설 수도 있었다.
“델핀의 딸이자, 황태자 아르파드의 처가 감히 위대한 아르타누스의 현신이자 대리인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대로 치마를 펼치고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그에 대한 대답은 냉담했다.
“…나는 며느리를 맞은 적이 없다만.”
예상한 대로였다. 덕분에 나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고.
아르파드는… 아주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래. 내가 어떻게 황제를 설득할지 궁금하다 이거지. 아예 즐기는 거 같은데?’
졸지에 혼자 재주넘는 곰이 된 기분이다.
어쨌든 아르파드에게는 신경을 끄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건 황제니까.
황제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분명히 델핀 공녀 그대는 내가 직접 조카와 중매를 서지 않았나? 예물까지 주고, 결혼식 당일에 축하까지 해 주러 직접 델핀저까지 방문을 했었지…….”
덤덤하던 황제는 곧 고개를 모로 꼬더니 분노를 터뜨렸다.
“이는 곧 그대와 아르파드가 황제의 권위를 무시한 것과 무엇이 다른가?!”
쿵! 우직!
놀랍게도 황제가 옥좌 팔걸이를 내려치자, 끄트머리가 박살이 났다.
역시 용의 혈통은 힘도 남다른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황제는 그걸 알아보았다. 본인의 예상과 다른 반응이었는지 황제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그 순간, 나는 대답을 내놓았다.
“아니요. 폐하. 저도 황태자 전하도 절대 폐하의 권위를 무시한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면 황태자가 진짜로 미쳐서 일을 벌이기라도 한 것인가?!”
황제는 나와 아르파드를 번갈아 보면서 다시 한번 강조했다.
“숨김없이 사실대로 말하라, 델핀 공녀. 이번 약탈혼이 그대의 뜻과 상관없이 벌어진 일이라면, 나는 그대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게 도울 것이다.”
그러니까, 나를 다시 루드비히 옆에 꽂아 주겠다는 소리다.
그렇게 되면, 아르파드는 일방적인 범죄자가 되거나 광증 환자로 낙인찍히겠지.
아르파드는 실제로 그만한 위험을 감수하고 내 의뢰를 받아들인 것이다.
“루드비히 역시 약혼녀를 믿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노라 말했다.”
그리고, 이 역겨운 말을 들은 나는 너무 놀라서 그만…….
“욱!”
구역질하고 말았다.
“……?”
“……?”
똑 닮은 부자가 의문 부호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현기증이 나는 척하며 아르파드에게 바짝 기댔다.
“오랜 여정으로 피로가 쌓이다 보니 현기증이… 그만.”
“…….”
“…….”
황제도 황태자도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래도 어쩔 거야. 내가 그렇다는데. 나는 가녀린 레이디고, 쉴 시간도 없이 부른 건 황제 당신이잖아! 난 죄 없어!
잠시 침묵이 지나간 뒤.
황제는 헛기침한 뒤 다시 나에게 질문했다.
“이 약탈혼이 그대의 의사와 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면, 내 결혼을 무효화시켜 줄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 나는 구역질이나 다른 실수 없이 똑바로 대답했다.
“지금의 저는 결혼 무효화를 원치 않습니다.”
“그건 약탈혼이 벌어질 당시에는 그대는 원치 않았다는 말로 들리는데?”
아니다. 아주 원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그렇지 않아야 했다.
그래서 나는 아주 애매하게 뭉개고 넘어갔다.
“중요한 건 지금이겠지요. 폐하.”
뺨을 붉히며 덧붙였다.
“그리고 이미 저와 아르파드 전하의 성혼은 이루어진 상태랍니다.”
황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시종장에게 건넨 결혼 서약서를 확인하더니 더 심각해졌다.
“이미 혼인 성사를 치르고 신전의 공증까지 받았어?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아르파드?!”
순간적으로 황제는 사고 친 아들을 닦달하는 드라마 속 재벌 집 회장님 같아 보였다.
황제의 분노 가득한 노호가 알현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딴 짓일 벌인 것이냐! 말을 해 봐!”
그러나 아르파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한 것은 나였다.
붉어진 뺨을 손등으로 가린 채, 나는 수줍다는 듯 웃었다.
“당연히 사랑 때문이지요.”
아무 말에 황제와 아르파드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황제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방금 뭐라 했나, 공녀?”
“전하께서 저에게 한눈에 반해 약탈혼을 저지르고 마셨답니다.”
옆에서 아르파드의 입이 떡 벌어졌다.
“…….”
“…….”
어찌나 황당했는지.
옥좌 팔걸이에서 손가락이 미끄러지는 걸 황제는 미처 의식도 하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하려던 말을 계속했다.
황제가 완전히 방심한 게 분명한 지금을 놓칠 수는 없었다.
“마치 이스트리드 공주를 처음 만난 아르타누스 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요.”
“……!”
과연 여기서는 황제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아르타누스는 제국의 시조인 드래곤.
이스트리드 공주는 드래곤에게 약탈혼 당해 초대 황제를 낳은 여인이자, 제국의 이름이 된 사람.
나는 이 말로 황제 앞에서 선언한 셈이다.
‘우리의 약탈혼은 드래곤과 공주의 약탈혼을 재현한 것이다.’ 라고.
적어도 그렇게 프레임을 잡을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라는 게, 공식적인 저희 입장이랍니다.”
“공식적 입장?”
“네.”
“앞으로는 모든 공적인 자리에서는 그렇게 말할 예정이에요.”
경악과 어처구니없음으로 가득 찼던 황제의 표정이 제법 진지해졌다.
“실제는 변명과는 다르다는 소리겠군?”
“당연하지요, 폐하.”
나는 일부러 말을 멈췄다가, 오히려 내 쪽에서 황제에게 질문을 던졌다.
더없이 대담한 질문을.
“폐하께서는 정말로 루드비히가 다음 황제 자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