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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19화 (19/210)

19화

사실 아르파드의 감정을 읽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황태자였고, 숨 쉬는 것처럼 정치적인 행동을 익혀 왔으니까.

하지만 어째선지 내 앞에서는 종종 감정 숨기는 법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별궁에서 며칠 둘만 있었다고 나름대로 친밀감이 생긴 건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쁘진 않다.

아르파드가 사랑하는 여자가 생겨서 이혼을 요구할 때까지 우리는 공동운명체니까.

부부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하지만 사실은 고객과 용병의 관계지만.

여하튼 지금 그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기분 좋은데 그걸 티 내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정말이지,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종잡기 힘든 남자였다.

하긴 미친 사람을 정상인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어.

이해할 수 있으면 그 사람도 미쳤단 소린데.

나는 이런저런 태클을 속으로 삼키면서, 아르파드에게 다가가 한 가지를 요청했다.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

“갑자기 왜?”

나는 윙크하며 속삭였다.

“폐하를 알현할 때 필요한 게 있어서 그래요.”

* * *

지금 황궁에서 단연 화제의 중심은 황태자 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며칠 전 벌어진 300년 만의 약탈혼 당사자가 아닌가.

그들이 백주에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함께 입궁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서는 다들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

“루드비히 대공 전하만 불쌍하시게 됐지. 신부는 뺏겼지, 명예는 땅에 떨어졌지…….”

“정말 너무해.”

하지만 이를 두고 누구도 황태자 앞에서 대놓고 거론할 순 없었다.

다들 자기 목숨은 아까웠으니까.

뒤에서 소리 낮추어 씹어 대는 것이 전부.

이는 아르파드가 열 살도 안 된 어린 시절, 광증의 전조를 보인 이후 쭉 지속된 현상이었다.

몇몇 광신적인 충신 외에는, 누구도 그를 대놓고 적대시하지 못했다.

광증 발발로 인한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현 황후조차 황태자의 광증 발작 때 크게 다쳐 팔을 쓰는데 불편한 상황이다.

하지만 이를 두고 황태자를 처벌하진 못했다.

광증의 전조가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드래곤의 혈통이 진한 황족이라는 증거다.

아르타누스의 축복을 한몸에 받았다는 증명.

인간의 것을 벗어난 세로로 긴 동공을 가진 아르파드의 눈동자가 바로 그것이다.

용의 눈을 갖춘 자.

이스트리드 황실에서 용의 혈통은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황제조차 아르파드를 황태자위에서 쉽사리 폐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아르파드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폭탄 취급을 받곤 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니 건드리지 말자, 그를 대하는 모든 이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유일한 혈육인 황제마저도.

아르파드가 소문 분분한 아내와 함께 황태자 궁을 나섰을 때.

두려움과 호기심 가득한 시선이 사방에서 모였다.

하지만 누구도 쉽사리 나서거나 말을 거는 이는 없었다.

그저 불길한 것을 보듯 멀리서 관찰할 뿐.

“…….”

“…….”

침묵의 가시가 가는 길마다 뿌려져 있는 듯했다.

힐리아는 쓴웃음을 감춘 채, 그 불편한 침묵의 가시를 지르밟았다.

‘맘대로 떠들라지. 그게 내 목숨을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고.’

따가운 시선이 아르파드의 옆에서 걷는 힐리아에게 꽂혔다.

만일 시선이 화살이었다면 힐리아는 순식간에 화살 꽂이가 되어 버렸으리라.

그 따갑고 불편한 관심을 그녀는 코웃음 치며 무시했다.

덕분에 침묵 속에 홀로 생글생글 웃는 힐리아는 누구보다도 돋보이고 빛났다.

루드비히와 에반젤린이라는 스트레스의 근원에서 멀어진 덕분에 힐리아의 피부는 그야말로 깐 달걀 같았다.

윤이 나는 피부에는 모공 하나 보이지 않았고, 벚꽃색 홍조가 양 뺨을 아주 옅게 물들이고 있었다.

커다란 눈이 깜빡거릴 때마다, 긴 분홍빛 속눈썹이 짙은 제비꽃 색 눈동자를 숨겼다가 내어놓곤 했다.

수줍은 산호색 입술은 살짝 긴장한 듯 웃고 있었고.

청순하게 흐드러진 벚꽃잎 색 고수머리는 더없이 달콤해 보였다.

자수정과 투명한 수정, 핑크 다이아몬드와 라벤더 다이아몬드로 아칸서스(Acanthus) 꽃 모양을 엮은 티아라를 머리에 장식해서 분홍빛 머리카락을 유달리 돋보이게 했다.

우유색의 얇은 비단과 벚꽃색 레이스를 겹겹이 쌓아, 풍성한 거품처럼 겹친 드레스는 그녀의 청순한 이미지를 더욱 살려주었다.

자수정을 기조로 한 진한 색의 티아라를 강조해 주는 듯도 했다.

마침, 봄이라 아르파드와 힐리아가 지나는 황궁 중앙 정원에는 벚꽃이 만개해 있었다.

때맞춰 바람이 불자,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무수한 꽃잎이 쏟아져 내렸다.

자연마저 이 두 사람을 축복하는 것처럼.

누군가가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꼭… 벚꽃의 요정 같긴 하네.”

말해 놓고 본인이 더 놀랐다. 말하려고 한 게 아니었던 데다, 다들 입을 다물고 있어 소리가 너무 컸다.

사방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요정 어쩌고 한 사람은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대놓고 동의하거나 찬동하는 사람은 없었으나, 모두 속으로는 비슷한 생각을 했다.

‘왜 황태자 전하가 약탈혼까지 하셨나 했는데, 알겠네.’

‘감탄스러울 정도긴 해.’

‘저런 신부를 빼앗겼으니 루드비히 대공이 미칠 만도 하군.’

‘게다가 델핀 공작가까지 지참금으로 가진 신부니…….’

모두가 힐리아의 4회차 인생 중 최고로 힘주어 꾸민 외모에 압도된 사이.

힐리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가 아르파드의 팔짱을 끼며 몸을 기댔다. 더없이 다정하고 자연스럽게.

동시에 사방에서 경악을 참지 못한 소리가 들려왔다.

“헉!”

“겁도 없이!”

“아무리 약탈혼한 신부라지만, 저걸 황태자 전하가 봐주실까?”

“절대 용납 안 하실 분인데…….”

주위에 신경을 끈 힐리아는 들으란 듯 입을 열었다. 불안하고 걱정되어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가련하게 울린다.

“폐하께서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시면 어쩌죠?”

그리고 구경꾼들을 더더욱 큰 경악으로 몰아넣는 일이 벌어졌다.

아르파드가 아주 다정하게 대답했던 것이다.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시오.”

이번에는 경악의 한숨 소리가 더욱 커졌다.

“커헉!”

“전하께서 웃고 계셔! 세상에! 나 이런 광경 처음 봐!”

“저렇게 다정하게 웃으시니까… 너무 멋지시다. 나에게도 웃어 주셨으면…이 아니라!”

아르파드의 미모와 지위를 생각하면 달려드는 여자들이 많아야 정상이다.

하지만 누구도 함부로 엄두를 못 냈는데, 당연히 그를 둘러싼 흉흉한 소문과 본인의 날카로운 기세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새신부에게 다정하게 웃어 주는 모습을 보자, 흉흉한 소문이니 광증이 하는 것도 잊힐 지경이었다.

군중은 새삼스럽게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얼마나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남자인지.

이는 그전에 아르파드에게 욕심을 낸 적 없는 사람들조차 그 옆에 선 힐리아를 질시하게 했다.

‘운도 좋아. 약탈혼 당했어도 상대가 저렇다면야…….’

‘하지만 황태자의 광증은 유명하잖아? 그 때문에 저 여자도 언제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어.’

‘아니, 그 전에 황제께서 과연 인정하실까?’

이게 현재 가장 뜨거운 감자였다.

아르파드의 약탈혼.

그리고 황제가 이를 인정할 것인지, 아닌지.

그 결정을 위해 황제가 황태자와 힐리아를 불러들였다는 것 역시 모두가 알고 있었다.

대다수가 호기심을 품고서, 일부는 홀린 듯 응원하면서, 또한 많은 이가 부정적인 시선으로 본궁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 * *

나는 긴장감을 숨긴 채, 아르파드에게 기대다시피 해서 본궁까지 걸어갔다.

아무리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사방에서 부정적인 시선이 숨 막힐 듯 쏟아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를 걸어가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나마 아르파드가 아무렇지 않은 듯해서 기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제 본궁 안으로 들어와 복도를 지나, 황제 알현을 위한 대기 공간에 도착했다.

시종장이 먼저 황제를 만나러 들어간 뒤에는 단둘만 남았다.

“휴…….”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풀려 했는데.

“……?”

뭐야, 왜 안 풀려?

의아해하며 올려다보자, 아르파드가 진지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계속 유지하고 있어야 해.”

“이제 보는 사람도…….”

아르파드의 소곤거림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아니. 있어. 황제의 눈들이 우리를 살피고 있으니까.”

“…….”

맞는 말이다.

황제는 제 아들마저 의심하고, 자기 자신까지 의심하는 사람이다.

그에게 우리 결혼을 인정받으려면, 한시도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된다.

“알았어요.”

내 팔을 단단히 잡은 아르파드의 손에 유달리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혹시 사이 나쁜 부친을 만나게 되어서 긴장한 걸까?’

실제로 지난 삶에서 미쳐 버린 아르파드를 죽이는 게 황제이기도 했고.

두 사람의 사이는 칼날 위에 선 듯 위태로워 보였으니까.

나는 슬쩍 웃으면서 아르파드에게 속삭였다.

“걱정돼요? 걱정하지 말고 나만 믿어요.”

아르파드의 얼굴이 황당하다는 듯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 시종장이 문을 열고 나와 우리에게 말했다.

“두 분 드시라는 명이십니다.”

더는 잡담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우리는 보란 듯 팔짱을 낀 그대로 알현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우리를 본 황제의, 정확히는 나를 본 황제의 눈가가 미미하지만 분명히 떨렸다.

그 이유를,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야 지금 내가 입은 드레스와 티아라, 목걸이는 전부 죽은 황후의 유품이니까!’

그리고 황제의 가장 큰 약점이 바로 선황후라는 걸, 난 잘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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