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황태자비가 되어 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곧 쫓겨나긴 했지만, 명목상 늘 황태자비 자리까진 갔으니까.
‘물론 진짜 황태자비가 아닌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계약적인 약탈혼 관계 아닌가. 이렇게 표현하니 뭔가 아주 이상했지만, 어쨌건 그게 사실이다.
나와 이혼하기 전에 루드비히가 황태자 위에 오른 적은 두 번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감옥에 있거나 탑에 갇혀 있었기에, 황태자비 대우를 전혀 받지 못했다. 그저 죄인이었을 뿐.
황태자비를 위한 침실엔 당연히 한 걸음도 들어와 보지 못했다.
매번 상아의 침실은 에반젤린의 차지였다.
나와 루드비히의 정식 이혼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말이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본인이 직접 와서 알려줬다.
“오늘 루드비히가 날 상아의 방으로 데려가 줬어. 그리고 이제 그곳이 내 방이 될 거야. 곧 황후 궁도 내 것이 되겠지.”
그러다 보니, 상아의 방은 나에게 아주 상징적인 장소였다.
매번 에반젤린에게 빼앗겼던 모든 것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가문.
내 목숨.
내 사람들.
그리고 남편과 황태자비의 자리.
그래서였다. 나는 꽤 감상에 젖은 채 방 안 곳곳을 둘러보았다.
방 전체가 이름처럼 상아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손끝으로 흰색 작은 테이블을 건드려 보자 놀랍게도 금속이나 석재, 혹은 목재의 차가움이 없었다.
‘설마 이것도 상아로 만든 거야?’
가구까지 진짜 상아로 만들어졌을 줄은 몰랐다.
놀라서 곳곳의 흰색 가구들을 직접 만져 보았다.
‘세상에! 진짜 전부 상아잖아?’
혹시 벽까지 상아를 바르는 사치스러운 짓을 한 건 아니겠지?
나는 약간의 기대와 불안감을 안고서 흰 벽을 매만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벽은 상아색 비단 벽지가 발라진 거였다.
벽에 고정된 촛대는 상아에 금을 입힌 미친 호화로움이었지만 말이다.
그때, 등 뒤에서 내 귓가에 훅 불어오는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왜, 벽도 상아로 치장해 주지 않아 불만인가?”
“히익!”
나는 갓 잡은 생선처럼 퍼덕거렸다.
온몸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갑자기 무슨 짓이야, 이 미친 황태자?
“무슨 헛소리예요?”
“그야 그대가 너무 열정적으로 벽을 더듬고 있어서 말이야. 나는 순간적으로 그대가 내가 아니라 침실 벽과 결혼한 줄 알았어.”
“비꼬지 말아요! 그냥 신기해서 관찰한 것뿐이니까!”
“안 비꽜는데?”
입은 그렇게 말하지만 표정과 어투는 절대 아니었다.
꽈배기보다 배배 꼬여 있는 티가 팍팍 났다.
“뭐에 또 그렇게 뿔이 난 거예요?”
아르파드는 양손 검지를 머리 위에 세워 보이는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짓을 했다.
“내가 아무리 용의 혈통이 짙다지만 뿔까진 안 났는데 말이지.”
“헛소리하지 말고요.”
잠시 투덜거리던 아르파드는 곧 표정을 풀고 내게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렇게 열정적으로 가구와 벽을 쓰다듬는 거야? 남편을 놔두고.”
“말 좀 이상하게 하지 말아 줄래요?”
아르파드는 여전히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다.
나는 평이하게 대꾸했다. 반질반질하고 조금만 만지고 있어도 온기가 도는 상아 장식품을 매만지면서.
“좀 아깝고 미안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뭐가?”
“이렇게 예쁜 방인데, 진짜 주인보다 가짜 주인을 먼저 맞이하게 됐으니까.”
미래에 아르파드가 사랑하게 될 여자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이 예쁜 방의 진짜 주인일 테니 말이다.
나는 그전에 잠시 스쳐 지나가는 손님이고.
대답하고 고개를 돌렸을 때 아주 이상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아르파드의 표정이 굳어 있었던 거다. 매끈한 미간에 주름이 지고, 입꼬리가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누가 봐도 불만스럽고 불쾌한 표정.
갑자기 왜 저래?
어쨌건 나는 하려던 말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하지만?”
내가 안 들어오면 결국 이 방은 아르파드의 연인이 아니라, 에반젤린의 것이 될 거다.
그건 절대 싫었다.
그러니까.
“신세 지는 동안은 내 거니까, 최대한 예뻐해 줘야죠!”
내 말에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르파드의 굳은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리고 내가 전혀 예상 못 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그럼 나는?”
“…네?”
“신세 지는 동안은 나도 예뻐해 줄 건가?”
아니, 왜 황태자비의 방에 딸린 옵션이 본인인 것처럼 말하세요?
“……?”
이 인간이 혹시 벌써 미쳤나.
나는 조심조심 다가가서 아르파드의 이마에 손을 댔다.
다행히 심각한 열기나 한기가 느껴지진 않았다. 아주 평온하다.
내가 갑자기 만지자, 아르파드도 꽤 놀란 듯했다.
영문 모를 소리만 줄줄 늘어놓던 입이 딱 멈추었고.
얄밉게 가느스름해졌던 눈매가 동그래졌다.
‘안 어울리게 왜 귀엽고 난리래.’
나는 이런 헛생각은 옆으로 치워 두고, 진짜 중요한 걸 물었다.
“혹시 광증 올라왔어요?”
“…….”
아르파드는 대놓고 김이 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 * *
한동안 내 방이 될 상아의 방 관찰도 끝났겠다.
아르파드의 헛소리도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스스로 김이 새서 조용해졌으니.
이제 슬슬 좀 쉬면서 정리를 해야 하지 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황궁은 제국 내 권력의 핵심.
당연히 온갖 음모와 사건 사고가 한시도 멈추지 않는 태풍의 눈다웠다.
나와 아르파드의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다음 이벤트가 먼저 우리를 찾아왔다.
본궁의 시종장이 직접 와서 황제의 명을 전했다.
“황제 폐하께서 황태자 전하와 옆에 계신 델핀 공녀님께 함께 들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시종장의 말은 황제의 현재 입장을 간략하게 보여 줬다.
‘역시 아직 황제는 나와 아르파드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은 거야.’
예상한 대로다.
‘입궁하면 이 결혼을 황제로부터 인정받는 게 가장 먼저 해야 할 과제이자, 큰 과제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이건 당연한 현실 인식이었다.
그런데.
그 당연한 사실을 못 받아들이고 급발진하는 인간이 내 옆에 있었다.
“시종장도 나이가 들었군. 호칭이 틀렸어. 델핀 공녀가 아니라 황태자비다.”
으르렁거리는 듯, 낮게 쫙 깔린 목소리가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누구라도 겁먹어서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을 분위기다.
하지만, 황궁에서 잔뼈가 굵은 시종장은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황제 폐하께서 델핀 공녀라 칭하셨습니다. 저는 그저 옮겼을 뿐.”
“세 번 말하게 하지 마라. 황태자비다.”
시종장은 모노클을 고쳐 쓴 다음, 냉정하게 대꾸했다.
“황태자 전하와 델핀 공녀께서는 알현 준비를 하시지요.”
그와 동시에 아르파드의 검집에서 칼이 뽑혀 나왔다.
챙!
‘으아아! 이 미친 인간아! 황제의 시종장 앞에서 칼을 뽑으면 어떡해!’
나는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다행히 거리가 가까웠기에 아르파드와 시종장 사이로 끼어들 수 있었다.
덕분에 시종장의 목을 향해 날아들던 칼날은 중간에 우뚝 멈췄다.
내 코끝에 닿을락 말락 하고 있었다.
‘아, 진짜 내 간 떨어지겠네.’
나는 손을 뻗어 칼날을 잡으려 했다.
그러자 아르파드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칼을 뒤로 물렸다.
일단 아르파드가 기분 내키는 대로 칼춤을 추지는 않겠다는 확신이 들자,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시종장에게 최대한 침착하고 우아해 보이도록 인사를 했다.
“부디 남편의 실수를 잊어 주셨으면 합니다. 눈먼 칼날은 분명히 시종장님을 겨누지 않았으니까요.”
내가 끼어든 덕분에 날 겨눴지.
그러자 시종장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럼에도 그의 대답은 냉랭했다.
“저는 공녀님을 황태자비라 부르는 걸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상관없어요.”
“…예?”
“방금 황태자 전하를 남편이라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황태자비로 인정을 받든 못 받든 제가 아르파드 전하의 아내인 건 사실이니까요.”
“…….”
“그리고 나를 황태자비라 부를 수 없다는 시종장님의 입장도 잘 이해합니다.”
윗사람이 까라면 까야지 어쩌겠어. 게다가 그 윗사람이 황제인데.
신분제 사회 엿이나 먹어라.
나는 이런 생각을 티 내지 않은 채 조용히 선언했다.
“무엇보다, 황제 폐하의 부름에 따르는 것이 먼저겠지요. 그리고 우리가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나면, 시종장께서는 저를 바른 호칭으로 부르실 수 있게 될 거예요.”
내 말을 해석하자면 이 뜻이다.
‘황제도 직접 만나서 대화하고 나면 나를 황태자비로 인정할 테니까 상관없어.’
시종장은 진심으로 놀란 듯했다.
처음으로 순수하게 본인의 감상이 나왔다.
“대담하신 분이시군요. 황태자 전하의 아내께서는.”
한발 물러나 주기까지 했다. 황태자비로 인정은 못 해 줘도, 황태자의 아내로는 불러 주겠다는 거니까.
좋아.
나는 겨우 상황을 수습하고 뒤돌았다.
‘이제 아르파드를 챙겨서 황제를 만나러 가야 하니까.’
그런데, 뒤돌자마자 보인 아르파드의 표정이 좀 미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