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황궁 특유의 커다란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모를 수 없다.
“잘 가. 원작의 여주인공 씨.”
무언가 새카만 연기 같은 것이 가슴 속을 채우는 느낌이다.
나는 새삼스레 세 번째 삶에서의 죽음을 떠올렸다.
단두대의 칼날이 내 목을 내려친 직후.
내 피를 뒤집어쓴 채, 저 여자는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었다.
“…아?”
“…….”
“힐리아.”
그때의 고통과 분노를 떠올려서일까.
나는 순간적으로 아르파드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가 어깨를 잡아 흔든 뒤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괜찮나?”
어느새 아르파드의 얼굴이 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숨결이 뺨에 닿을 정도로.
너무 가까워서 에반젤린에 대한 강렬한 분노마저 잠시 잊혔다.
마치, 늪 속에 빠져 있던 나를 그가 한 손으로 끌어올린 느낌이다.
덕분에 아르파드가 왜 나를 걱정하는 건지 좀 늦게 이해할 수 있었다.
“손이 차가워.”
어느새 내 손을 아르파드의 손이 맞잡고 있었다.
“그리고 식은땀이 너무 심해.”
그리고 내 이마에 그의 이마가 닿아 있었다. 아르파드가 낮게 중얼거렸다.
“몸이 안 좋은 건, 아닌 듯한데…….”
“괜, 찮아요.”
그저 잠시 감정이 너무 격해졌던 것뿐이니까.
하지만 아르파드는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냐. 몸이 아주 안 좋은 것 같아.”
“네? 아니라고 분명히……!”
하지만 막무가내를 인간의 형태로 깎아 놓은 듯한 남자는 나를 안은 채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눈앞이 흔들렸다.
“꺅!”
놀랍게도 그는 바닥에 내려서면서도 나를 공주님처럼 안아 든 자세를 유지하는 묘기를 부렸다.
‘드래곤의 혈통이 신체 능력에도 영향을 준다는 거야 들었지만… 대단하네.’
그는 나를 공주님 안기로 번쩍 들어 올린 채, 황태자 궁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내 신부는 몸이 너무 약해서, 더는 말을 태우기가 걱정되는군.”
그는 주변에 들으란 듯 말했다.
그때 나는 아르파드의 어깨너머로 보고 말았다.
조금 전보다 몇 배로 맹렬하게 타오르는 에반젤린의 눈빛을.
그녀는 분명히 분노하고 있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기묘한 희열이 내 머리를 집어삼켰다.
나도 모르게 아르파드의 목을 감싸 안으며 보란 듯 매달렸다.
그렇게, 우리의 황궁 입성은 마치 사방에 과시하듯이 이루어졌다.
아르파드의 명마만이 순하게 우리 뒤를 따르고 있었다.
* * *
뚜둑!
섬세한 꽃무늬가 새겨진 흰 대리석 난간 위에 피가 튀었다.
에반젤린이 자랑하는 고운 손톱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픔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그 정도로 방금 벌어진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아르파드와 힐리아가 입궁했다는 소리를 듣고 달려왔더니.
둘이 과시하듯 말 한 필에 타고 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는 것도 기가 찼는데.
아예 공주님 안기를 해서 그대로 황태자 궁까지 걸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방금 힐리아 저게 날 노려본 거 아냐?’
그것만이 아니었다. 마치 자랑하는 것처럼 웃기까지 했다.
마치, 에반젤린의 마음을 다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조차 자신이 아르파드가 여자를 안고 오는 것을 보고 이렇게까지 상처받을 줄 몰랐는데.
그런데, 다 읽고 있다는 것처럼.
‘기껏해야 책 속 캐릭터 주제에!’
딸의 상태를 모르는 황후 이자벨은 낮게 혀를 찼다.
“발악을 하는구나. 그렇다 한들 황제께 인정받을 수는 없을 터인데.”
이미 저들에 대한 악의적이고 흉한 소문은 수도 안을 대여섯 바퀴는 다 돈 뒤였다.
궁인들 역시 앞다투어 관련된 소문을 입에 올리고 있었다.
“저 두 사람, 원래부터 불륜 관계였대요.”
“어쩜. 저는 힐리아 공녀가 황태자 전하와 대공 전하 양쪽을 모두 유혹했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세상에. 그게 사실이면 정말 희대의 요부 아닌가요?”
“아무리 그래도 사촌 동생의 아내를 약탈혼 하다니 황태자께서 진짜 완전히 미치신 걸까요? 무서워요.”
온갖 부정적인 소문이 두 사람을 가운데 두고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동시에 루드비히를 동정하는 말들도 많았다.
“황태자의 광증에 신부를 빼앗기다니 너무 가여워라.”
“그런 일을 당하고도 황태자 전하도 델핀 공녀도 원망하지 않겠다고 하셨다면서요.”
“너무 착하셔서 어쩐대요.”
루드비히가 알았다면 수치심과 분노를 느낄 만한 소문이었다.
하지만 황후는 그런 것 따윈 알 바 아니었다.
그녀는 코웃음 치며 평했다.
“루드비히가 신부를 되찾아 오는 것이 가장 나은 구도였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구나.”
황후는 고개를 돌리며 딸을 보았다.
“나중에 델핀 가를 루드비히가 집어삼킨 뒤에 저 여자를 쫓아낼 좋은 약점이 생겼다고 생각하는 게… 에바?”
“…….”
황후는 혀를 차며 딸의 피 묻은 손톱을 감싸 안았다.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게냐? 그 어리석은 마음을?”
“하지만 어머니…….”
“포기하라 하지 않았니. 아르파드는 절대 루드비히처럼 꼭두각시가 돼 주지 않을 거다.”
황후는 딸이 오랫동안 아르파드를 마음에 둔 걸 알았다.
딸을 계속 설득해 온 것도 황후였던 것이다.
어머니의 재촉에 에반젤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네, 알아요. 어머니.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에반젤린은 조금 전에 본 광경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아르파드가 아무리 곧 죽을 사람이고, 그를 가질 수 없다 해도 말이다.
‘그 옆에 딴 여자가 있는 걸 내가 왜 그냥 넘겨야 하지? 이렇게 화가 나고 마음이 아픈데?’
에반젤린 안의 빙의자는 늘 생각해 왔다.
진짜 여주인공은 자신이라고.
책 속의 캐릭터에 불과한 것들을 왜 진짜 사람처럼 대해야 한단 말인가?
‘죽여 버리겠어! 계획이고 뭐고, 절대 가만히 안 놔두겠어!’
에반젤린의 초록색 눈동자는 음험한 살기로 불타올랐다.
* * *
놀랍게도 아르파드는 진짜로 황태자 궁까지 나를 안고 갔다.
그런데도 호흡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대단한 체력이야.’
사흘 내내 함께 말을 타고 달리면서 이미 뼈저리게 깨달았지만 말이다.
황태자 궁에서는 시종장을 비롯한 궁인들이 당황한 상태로 우리를 맞이했다.
“전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저희가 소문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설마, 그분은……?”
다들 경악과 호기심, 의심이 적당히 뒤엉킨 시선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아르파드는 아랫사람들의 혼란을 무시하고 지극히 평온하게 대꾸했다.
“황태자비다.”
참고로 나는 여전히 아르파드에게 안긴 채였다.
좀 민망해서, 아르파드에게 속삭였다.
“이제 슬슬 내려줘도 되지 않아요?”
“왜 내리고 싶지? 내가 안고 있는 게 싫은가?”
매끈한 미간에 주름이 갔다. 어째 또 불쾌해 보인다.
왜지? 진짜 기분을 종잡을 수가 없는 남자였다.
“그건 아니지만, 주변 보기 부끄럽다고요.”
“왜 부끄럽지? 내가 부끄러운가?”
그렇다고 하면 진지하게 화낼 것 같다.
“…그건 아니고요. 남들 다 보는 데서 안겨 있으려면 당연히 부끄럽다고요.”
“난 안 부끄러운데.”
아르파드는 아주 당당했다.
“내가 부끄러우니까 내려줘요!”
“싫어.”
“왜요? 어째서? 나도 발 있어요! 잘 걷는다고!”
“그대가 자꾸 내려 달라고 하니까 하기 싫어.”
청개구리냐!
어이가 없어서 힘으로 내려오려고 꿈틀거려 봤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결국 힘에서 밀렸기 때문에 계속 안겨 있어야만 했다.
한술 더 떠서 아르파드는 나를 안은 그대로 궁인들을 힐난하는 기행을 저질렀다.
“지금 뭣들 하는 거지?”
“예, 예? 전하?”
“너희 안주인에게 제대로 예의도 표하지 않는 건가?”
나는 경악했다.
‘아니, 예의든 인사든 나를 내려줘야 할 거 아냐! 다들 그거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고!’
하지만 아르파드는 미친놈이었다. 미친놈이라는 건 상식이나 이성이 통하지 않는 놈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런 미친놈을 오래 모셔온 황태자 궁의 궁인들은 납작 기는데 익숙했다.
그들은 주르륵 무릎을 굽혀 가며 내게 인사했다.
“황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비전하께 아르타누스의 영광이 늘 함께하시길.”
덕분에 나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남자의 품에 안긴 채 궁인들에게 인사받기.
특별한 경험일 수밖에.
‘아마 역대 황태자비 중에 이렇게 인사받은 건 나뿐일 거다!’
이런 속내를 감춘 채 나는 점잖게 대답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울고 싶다. 쪽도 너무 팔린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르파드의 아주 넓은 어깨에 얼굴을 묻는 척 가렸다.
그걸 궁인들과 아르파드는 이상하게 해석한 듯했다.
“황태자비가 많이 피로한 모양이다.”
“궁의를 부를까요?”
“혹시 모르니 대기시켜 두도록.”
필요 없어!
“혹시 몰라 그동안 미리 상아의 침실을 치워 두었습니다.”
“잘했군.”
상아의 침실은 황태자비의 침실이다.
내가 지난 세 번의 삶 동안 한 번도 써 보지 못한 방이기도 했다.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그리고, 아르파드는 상아의 침실까지 나를 안고 갔다.
‘그래, 네 체력 진짜 좋다!’
침실 안에 들어와서야, 드디어 아르파드는 나를 내려주었는데.
발이 바닥에 닿았다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는 나를 깃털처럼 침대 위에 앉혔다.
아르파드와 나의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