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Chapter 3. 황태자비는 처음이라
루드비히는 황실 기사단을 이끌며 환희에 젖어 있었다.
방계에 불과한 그가 황실 기사단을 선두에서 이끄는 건 여러모로 상징적인 일이었다.
마치, 진짜 황태자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지난 일주일 내내 그를 미치게 했던 남녀를 쫓아가는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절대 가만히 두지 않겠어, 아르파드!’
그는 모든 면에서 뛰어난 사촌 형에게 큰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촌 형에게 결혼식 날 제 신부를 약탈당했다.
이건 루드비히의 높지만 유리처럼 약한 자존심을 박살 내기에 충분했다.
등 뒤에 최정예 기사단을 이끄는 지금은 상처받은 자존심을 치유할 좋은 기회였다.
‘이번에 순수한 피해자는 나다! 내 손에 죽어도 아르파드는 할 말이 없어!’
그는 열등감과 살의를 가득 품은 채, 에반젤린이 가져온 정보를 따라 뒤쫓았다.
한참을 달린 끝에 마침내 저 멀리 길게 꼬리를 끄는 먼지구름이 보였다.
아르파드 일행은 뻔뻔하게도 대륙에서 가장 큰 곡창인 아르타누아 평야의 대로를 지나고 있었다.
그것도 느긋하게.
신부를 약탈한 무뢰한의 일행이 아니라, 당당한 결혼식 행렬로 보일 지경이다.
루드비히는 기사단의 선두에서 말을 몰아 달렸다.
당연히 굽이굽이 휘어진 가도를 그대로 따라가진 않았다. 시간 낭비였으니까.
두두두─!!
말발굽이 갓 싹이 튼 아르타누아 평야의 밀밭을 짓밟으며 내달렸다.
루드비히가 이끄는 기사단이 지나간 곳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다.
하지만 루드비히도, 기사 중에도 이를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루드비히는 힐리아 일행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몇 안 되는 마차의 호위 병력은 황실 기사단을 막지 못했다.
황실 기사단이 황가의 문장이 새겨진 백색의 마차 앞을 막아섰고.
어쩔 수 없이 멈춰 선 마차로 다가가, 루드비히는 검을 뽑아 들고 마차 문을 벌컥 열었다.
“잡았다, 힐리아……!”
루드비히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벌어졌다.
* * *
황후궁에서 모친과 마주 앉은 채, 에반젤린은 초조함과 불안감에 입술을 물어뜯었다.
‘루드비히가 잘 해낼까?’
그녀는 자신이 왜 불안한지 잘 알았다.
‘원작’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르파드와 힐리아는 접점이 거의 없는 캐릭터들이었다.
‘약탈혼이라니!’
힐리아는 루드비히와 결혼하여 그에게 델핀 공작가의 모든 걸 넘겨주고 죽어야 했다.
이대로라면 루드비히가 델핀 공작가를 상속받는 것도 불가능하고.
그녀가 루드비히를 차지함으로써 모든 걸 손에 넣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원작을 토대로 세운 그녀의 계획이 크게 틀어져 버린 것이다!
‘게다가 하필이면 왜 아르파드인 거지?’
빙의하기 전 지나가듯 원작을 읽고 욕한 다음 잊어버렸을 때는, 아르파드라는 캐릭터에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등장이 적음에도 독자들 대부분이 왜 그가 남자 주인공이 아니냐고 화를 내는 캐릭터이긴 했다.
하지만 어차피 소설 속 캐릭터 아닌가. 남자 주인공은커녕 서브 남주도 안 되고 죽는 캐릭터에게 그녀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난 여주도 남주도 왜 이렇게 매력이 없냐고 화내면서 봤었으니까…….’
순종적이고 늘 우는 것 외에 할 줄 아는 게 없는 여자 주인공 힐리아는 당연히 마음에 안 들었고.
남자 주인공인 루드비히의 매력도 별로였다.
독자들은 후회물이라는 키워드 하나를 붙잡고 남주가 후회하는 걸 보겠다며 버티곤 했지만, 그녀는 그것도 아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습관처럼 소설을 읽을 때도.
그리고 설마하니 자신이 그 소설 속에 빙의하게 되었을 때도 미처 알지 못했다.
‘아르파드…….’
실제로 이 세계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목소리를 듣고, 향기를 맡아 본 아르파드라는 남자가…….
이토록이나 매혹적일 줄은…….
하지만 빙의자인 그녀에게도 아르파드는 가질 수 없는 책 속의 그림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미쳐서 죽게 될 테니까. 원작에서도 광증을 늦추는 방법은 나왔어도, 없애는 법은 없었어.’
빙의자인 그녀조차 아르파드를 미치지 않게 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걸 알면서까지 그를 원할 순 없었다.
특히나 루드비히가 원작 남자 주인공이고, 황제가 될 거라는 걸 알면서는 더더욱.
하지만, 그럼에도…….
그 아르파드가 누군가의 남편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꽉 막힌 듯했다.
아니, 타는 숯을 삼켜서 가슴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에반젤린은 제 입술에서 피가 나는 것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황후 이자벨이 손을 뻗어 제지하고서야 깨달았다.
“그만해라, 에바. 예쁜 입술이 다 망가지잖니.”
“…어머니. 괜찮겠죠?”
에반젤린과 달리 황후는 침착했다.
“뭘 그리 걱정하니? 어차피 델핀의 딸도, 아르파드도 다 죽여야 할 이들인데.”
황후는 더없이 침착했다.
“게다가 그동안 우리가 퍼뜨린 소문 덕분에 두 사람에 대한 평판은 이미 최악이야. 누구도 두 사람을 부부로 인정하지 않을 거다. 폐하께서도 허락하실 리 없어.”
“…네, 어머니.”
“잊지 마렴, 에바. 너는 꼭 이 어미가 제국의 진짜 황후로 만들어 줄 테니까.”
에반젤린은, 그녀 안의 빙의자는 황후를 비웃었다.
‘그 소중한 딸의 영혼이 바뀐 것도 눈치채지 못하는 책 속 캐릭터 주제에.’
그리고, 에반젤린의 불안감은 곧 형태를 갖추고 그녀를 급습했다.
“폐하! 황후 폐하! 아르파드 전하와 델핀 공녀가 입궁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전혀 바라지 않았던 소식이었다.
* * *
“뭐, 야?”
검을 들고 흉흉한 눈빛으로 마차 문을 연 루드비히는 당황했다.
마차 안이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마부석으로 달려갔다.
“힐리아는? 아르파드는? 왜 마차가 비어 있는 거냐?!”
분명히 황후가 준 정보에 따르면, 이 마차는 북쪽 별궁에서 황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마차에 아르파드와 힐리아가 모두 타고 있는 걸 봤다는 정보 역시.
루드비히는 불쌍한 마부의 목에 칼날을 들이밀고 외쳤다.
“대체 어떻게 된 거냐?”
마부는 벌벌 떨며 대답했다.
“한참 전에, 노엘 지방에서 이미 저희 일행과 떨어지셨습니다!”
노엘은 전속력으로 달려도 만 하루는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이제 와 쫓아가도 늦었다. 게다가 지금쯤이면 어디 있을지 누가 안단 말인가.
다른 몇 안 되는 기사들의 증언 역시 비슷했다.
이 일행은 처음부터 미끼였던 것이다.
“젠장!!”
그리고 지금은 알아봤자 별 의미가 없지만, 그가 사전에 힐리아와 아르파드의 황도 입성을 막을 가능성은 처음부터 없었다.
힐리아의 조언으로 아르파드가 준비한 미끼 일행은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 *
나는 약 일주일 전 떠난 황궁 앞 광장에 서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르파드와 함께 말에 탄 채로 황궁 정문을 올려다봤다.
이곳은 늘 사람들이 넘치는 곳이었으므로,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사방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웅웅, 벌떼처럼 울린다.
“설마 그 사라졌다는 황태자와 공녀야?”
“일주일 전 중지된 그 결혼식의 신부?”
“약탈혼이라던데 벌써…….”
나는 그 소리를 무시했다.
그리고 황궁의 정문, ‘영광의 문’을 복잡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이 문은 황궁의 가장 큰 입구로, 특별한 이들에게만 열리는 것이다.
직계 황족의 행차, 그리고 나라를 구한 영웅을 위한 퍼레이드 때 정도.
지금 아르파드는 나와 함께 말에 탄 채 당당하게 영광의 문 개문을 요구하고 있었다.
“어서 문을 열어라.”
영광의 문을 지키고 있던 황제 직속의 황실 2기사단 단장은 당황한 듯했다.
“황태자 전하?”
“그래. 다행히 그대의 시력이 정상이라 내가 말을 낭비할 필요는 없겠군. 열어라.”
“대체, 대체 그동안 어디를 다녀오셨던 겁니까? 게다가 옆의 그분은……!”
그는 낭패감으로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자는 황후와 루드비히에게 줄을 댄 자였지.’
나는 보란 듯 아르파드에게 몸을 기댔다.
그러자 맞닿은 피부로 그가 만족한 짐승처럼 그르렁거리는 듯한 울림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온몸의 솜털이 다 곤두설 정도로 긴장하게 된다.
하지만 그와 서먹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어쨌건 우리는 이미 결혼한 부부 사이니까 말이야.’
그 사실을 만인이 보는 앞에서 증명해 보일 필요가 있었다.
누구도 이 결혼을 부정하지 못하도록.
아르파드는 내 우려 따위 날려 보내 주겠다는 듯, 자연스럽게 내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 내 어깨에 고개를 묻은 채, 날카로운 눈으로 기사 단장을 노려보며 다시 말했다.
“내가 세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비켜. 황태자와 그 비(妃)의 행차를 언제까지 방해하고 있을 셈인가.”
단장은 알았을 것이다.
이 이상 막아선다면, 아르파드의 칼날이 그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지도 모른다는 걸.
그는 결국 힘없이 비켜섰고.
아르파드의 커다란 백마는 당당하게 황궁 정문을 통과해 입궁했다.
단 둘뿐이지만 분명한 퍼레이드였다.
* * *
“어때? 만족했나?”
“아주요.”
내 대답에 아르파드는 시원하게 웃었다.
참 웃는 소리도 비범한 남자다.
나는 작게 물었다.
“언제까지 계속 말 타고 움직일 거예요?”
황궁 안에서 말을 타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황족의 경우 마차를 타는 건 허용되고.
승전 퍼레이드의 주인공의 경우 황제의 앞까지 말을 타고 들어올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되곤 한다.
지금 우리는 그중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르파드는 일부러 보란 듯 말에서 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글쎄. 황태자 궁에 도착할 때까지? 그대가 바라는 대로 사방에 보여 줄 필요가 있어. 그대도 그러니까 내려 달란 소리를 안 하는 것 아닌가?”
눈치 하나는 귀신같다니까.
진짜 주는 것 없이 얄미운 남자다, 라고 생각하던 중.
나는 황궁 한쪽 구석에서 아주 열정적인 시선이 우리를 찌르는 걸 느꼈다.
할 수 있다면 나를 태워 버리고 싶어 하는 듯한 눈빛.
익숙한, 그리고 기대한 사람이었다.
‘에반젤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