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아르파드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결혼식 행렬에서 행패를 부린 황태자 앞에서 유일하게 나선 기사였다.
‘충심이 넘치는 기사라서라기보다는 반역죄도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로 사랑에 눈먼 자라는 게 더 말이 되지.’
게다가 그자를 유달리 감싸는 힐리아의 태도도 눈에 거슬렸다.
“예. 그러니, 기사의 죄는 당연히 주인인 저의 죄입니다. 제게 죄를 물어 주십시오.”
“아닙니다! 칼을 든 것은 전적으로 제 뜻. 공녀님께서는 잘못이 없으십니다!”
서로를 감싸 주는 광경은 눈물겹기까지 했다.
게다가 저 계산 빠른 게 확실한 힐리아가 빚을 하나 더 지면서까지 그자의 구명을 원했다.
사실 아르파드로서는 기꺼워야 마땅했다.
이 속을 알 수 없고, 능력의 한계도 계측 불가능한 여자가 스스로 알려 준 약점이다.
‘기뻐하면서 이용할 궁리를 해야 마땅한데…….’
그런데.
아르파드는 떠오른 의문을 입 밖으로 냈다.
“왜 그게 불편하고 거슬리는 거지?”
하지만 그녀는 아르파드의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지금 그의 옆자리에 기절하듯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피로가 엄청났을 것이다.
그는 일부러 연약한 여자의 체력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말을 몰았으니.
하지만 그동안 힐리아는 우는소리를 하지 않았다.
‘아, 아닌가. 마지막에 성 근처 와서는 토할 것 같다고 하긴 했지.’
하얗게 된 얼굴로 뛰어내려서는 쓰러질 뻔했더랬다.
그때 표정이 꽤 웃기고 귀염성 있었다고, 아르파드는 답지 않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곧 그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지워졌다.
‘확실한 건 절대 온실 속에서 자란 귀족 영애의 정신력이 아니라는 거야.’
수상하지 않은 점이 하나도 없는 신부이지만.
이 점은 특히 그랬다.
‘성장 배경은 전혀 특이할 것이 없는데.’
시간이 짧았지만, 아르파드 나름대로 힐리아 델핀에 대해 조사했다.
그 결과, 눈에 띄는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대단한 정신력을 키울 환경이 아니었고, 믿어지지 않는 능력을 보인 적도 없었다.
그야말로 하룻밤 사이에 사람이 바뀌어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특히 약탈혼 의뢰라는 미친 상황이 벌어졌던 때 아르파드는 칼날을 이 여자의 목에 들이댔었다. 그런데도 힐리아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단련된 기사라 해도 어려운 일인데 말이지.’
여러모로 수상하기 짝이 없는 여자였다. 경계해야 한다.
그러니, 정말로 그 기사가 이 여자의 약점이라면 아르파드는 즐겁고 만족스러워야 마땅했다.
이성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르파드의 감정은 다른 말을 했다.
“여전히 불쾌하군. 거슬림이 전혀 사라지지 않아.”
아르파드는 아침 해가 떠오르는 걸 지켜보며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는 색색 소리를 내며 깊이 잠든 아내를 내려다보며 작게 투덜거렸다.
“그나저나, 첫날밤에 신랑 앞에서 다른 남자의 안위를 걱정하는 신부라니. 너무하지 않나, 그대?”
당연히 세상모르고 잠든 힐리아가 대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르파드는 잠시 지켜보다가 그녀의 옆에 가까이 누웠다.
이 불가해하고 신기한 여자를 좀 더 가까이서 관찰할 겸.
“뭐, 어쨌든 내 손안에 있으니 계속 지켜보면 되겠지.”
그는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특히나 손안에 있는 것에 대해서는.
* * *
루드비히는 견디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오늘로 벌써 나흘째였다. 결혼식 날 멀쩡하게 눈 뜨고 신부를 약탈당한 날로부터.
‘온 나라에, 아니, 온 대륙에 내가 웃음거리가 되었어!’
그런데도 황제는 별다른 말이 없었고.
사라진 황태자와 신부는 머리카락 할 올도 보이지 않았다.
행방불명 기간이 길어질수록, 루드비히의 망상은 깊어져만 갔다.
아르파드가 신부를 데리고 무슨 짓을 했을까?
왜 납치한 걸까?
어디로 갔지?
지금은 대체 뭘 하고 있나?
고민과 망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나흘째가 되자 이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불어나 있었다.
루드비히는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아서 견디기 힘들었다.
당연한 자신의 여자라 여겼다. 그런데, 막상 빼앗기고 나니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첫날밤을 치렀을 텐데!’
기억 속에 남은 힐리아의 부드러운 분홍색 머리카락과 윤이 나는 뺨이 유달리 생각났다.
늘 그의 고집에 져 주던 유순한 표정도.
그 하나하나가 사무치도록 그립고 또 아깝게 느껴지는 건 어째서일까.
당연하다 못해, 그런 순진하고 어리석은 면을 조롱하던 여자였는데.
물을 들이켰지만 루드비히의 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불은 꺼지지 않았다.
그는 참지 못하고 외쳤다.
“힐리아의 소식은 아직도 없나?!”
“죄송합니다. 백방으로 찾아보고는 있습니다만……!”
아이러니하게도 루드비히가 서 있는 이곳은 델핀 공작저였다.
그리고 그의 앞에서 황공하다는 듯 납작 엎드린 집사 역시 델핀저의 집사다.
키에른 대공저보다 델핀 공작저가 훨씬 크고 호화로운 저택이라, 그가 여기서 생활한 지 벌써 3년 가까이였다.
그동안 루드비히는 저택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황궁에서는?”
“…역시 전혀 연락이 없습니다.”
“젠장!!”
다시 욕설을 내뱉으며 루드비히는 들고 있던 유리잔을 내던졌다.
쨍강!
크리스털이 산산조각이 났고, 익숙하다는 듯 공작저의 하녀들이 방을 치웠다.
혼자 화를 내던 루드비히는 저택 지하의 감옥으로 향했다.
거기 갇혀 있는 한 명의 기사에게 분풀이하기 위해서였다.
지하실의 문이 열리고, 그곳에 엉망이 되어 쓰러져 있는 남자에게 루드비히는 다시 분노를 풀었다.
“네놈이! 네놈이 신부를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내가 이따위 치욕을 당하다니!!”
루드비히는 벨테인 경의 등을 마구 짓밟았다.
그 충격에 기절에서 깬 벨테인 경은 꺼져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가씨…께서는……?”
“내가 어떻게 알아?! 네놈이 아르파드에게 갖다 바치고는……!!”
그는 벨테인 경의 팔다리를 걷어찼다.
힐리아가 납치당한 뒤 머리끝까지 분노한 루드비히 앞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스스로 죄를 청한 건 벨테인 경이 유일했다.
다른 기사들은 변명하기에 바빴다.
루드비히 본인의 기사들도, 또한 델핀 공작가의 기사들도.
“저희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황태자 전하의 광증은 유명하지 않습니까?”
“아르파드 전하 앞에서 검을 뽑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기사들이 벌을 안 받은 건 아니었다.
루드비히의 화풀이 대상에서 벗어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가장 강한 분노는 스스로 죄인이라 칭한 벨테인 경에게 향했다.
“주인을 지키지 못한 죄인은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이 없습니다.”
그는 상처 입은 몸으로 그날 바로 지하 감옥에 갇혀, 루드비히의 분풀이 대상이 되어야 했다.
그 결과 지금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것이다.
루드비히는 마치 할 줄 아는 말이 그뿐인 원숭이처럼 날뛰었다.
“죽어! 죽어! 죽어!!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번듯한 기사인 척, 잘도!”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가 경비를 서는 다른 기사의 검을 빼앗아 들고 들어온 참이었다.
짜랑짜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지하실 안을 울렸다.
“루드비히!!”
평소라면 루드비히는 저 목소리를 듣자마자, 웃는 얼굴로 몸을 돌렸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돌아가.”
아무리 사랑스럽던 연인이라지만, 지금은 그녀에게 할애할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안 그래도 결혼식 전날 웨딩드레스 건으로 싸운 앙금이 남아 있는데 말이다.
‘게다가… 내가 결혼식에 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기어이 나타났었지…….’
크림색의 화사한 드레스를 입고서 말이다.
역시, 웨딩드레스를 망친 범인은 에반젤린의 사주를 받은 고용인이었을지도 몰랐다.
당일에는 다투긴 했지만 에반젤린이 결국 질투 때문에 그런 것이라 넘겼다.
그녀의 말대로, 델핀 공작가를 손에 넣는 건 에반젤린도 바라던 바였으니.
그런데 정말로 그런 걸까?
웨딩드레스가 망가진 것부터가 이상하고 불길했다.
어쩌면 그의 결혼식을 망쳐 놓고, 웃음거리로 만든 배후에는 사실…….
“루드비히.”
그의 망상을 끊으려는 듯 에반젤린이 다시 한번 더 불렀다.
여전히 남자는 뒤돌지 않았다.
“가라고 했어! 지금 너까지 신경 쓸 여유 없어!”
결국 참지 못하고 분노를 쏟아 내는 루드비히의 등 뒤에서 그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소식이 있어. 아르파드 오라버니가 그 여자를 데리고 황도로 오고 있다고 해.”
“뭐?!”
루드비히가 고개를 홱 돌렸다.
남자의 눈이 위험스레 빛났다. 그걸 보며 에반젤린은 한숨을 쉬며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이런 남자가 원작의 남자 주인공이라니…….’
저도 모르게 혀까지 찰 뻔했다.
하지만 그런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다정하고 현명한 연인인 척 그녀는 루드비히에게 속삭였다.
“어머니가 심어 놓은 정보책들이 가져온 거예요. 어떤 길을 통해 오고 있는지, 지금 어디까지 왔을지.”
“그래! 어서 줘!”
루드비히는 거의 빼앗다시피 쪽지를 잡아당겼다.
그 폭력적인 반응에 에반젤린은 불쾌해하면서도 능숙하게 표정을 숨겼다.
그리고 그를 부추겼다.
“어머니가 본인의 기사단을 일부 내어 주셨어요. 어서 가서 힐리아를 되찾아 와야죠?”
그녀를 위해서라도.
분노에 차서 땅을 박차고 나가는 루드비히를 차가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에반젤린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원작에 이런 내용은 없었는데? 내가 원작을 많이 비틀어서 생긴 나비 효과인 건가?’
그렇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녀는 모든 걸 손에 넣을 테니까.
그녀는 답지를 놓고 시험을 보고 있는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절대 질 리 없었다.
* * *
꽤 높은 구릉에서 나와 아르파드는 함께 말에 탄 채 멀리 내다보고 있었다.
“벌써 황도가 보이네요.”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될 전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