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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11화 (11/210)

11화

신부가 사라졌으니 결혼식이 제대로 치러질 수 있을 리 없었다.

루드비히는 신전의 제단 앞에서 신부를 빼앗겨 결혼식을 취소하는 치욕을 당해야 했고, 하객들은 충격적인 소식을 황도 곳곳으로 나르기에 바빴다.

* * *

첫 회귀 때 나는 전생의 기억 역시 떠올렸다.

다른 세상, 한국에서 평범한 여자로 살았던 때의 기억을.

그때 아침 드라마에서 본 클리셰 중에 이런 게 있다.

결혼식 버진 로드에서 신부의 손을 잡고 도망치는 옛 남자!

의식한 건 아니지만, 이번엔 그걸 직접 실행해 본 것이다.

물론 저번에 벨테인 경과 함께 도망치긴 했지만, 결혼식 도중이 아니었다. 전날 밤에 필사의 탈출을 했었지.

그렇게 보면 이번에야말로 ‘드라마틱’한 경험을 한 셈이다.

누가 그 소감을 묻는다면 어떨까?

내 대답은 하나다.

“…살려 줘!”

다른 말로는 이렇게도 표현 가능하다.

“제발 내려 줘요!”

이번엔 제법 약탈당하는 중인 신부다운 대사 아닌가?

하지만 이런 헛생각을 길게 할 여유는 없었다.

아르파드는 상쾌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아직 안 돼! 안전한 곳으로 갈 때까지는 놔줄 수 없어!”

나는 울며불며 외쳤다.

“이미 황도는 벗어난 지 오래잖아요!”

내가 온몸으로 발버둥 쳤지만, 아르파드는 엄청난 힘과 균형 감각으로 끄덕하지 않았다.

“언제 추적이 붙을지 몰라!”

아니, 맞는 말인 건 나도 잘 안다.

하지만, 하지만!

다그닥 다그닥!

힘세고 빠른 말은 멈추지 않고 달렸고.

말발굽 소리가 울릴 때마다 세상이 한 번씩 크게 흔들렸다.

흔들흔들흔들흔들…….

게다가 나는 그냥 말 위에 탄 게 아니라, 아르파드의 무릎 위에 앉혀져 있었다.

높이가 더 높아서 배로 흔들렸다!

결국 나는 자존심이고 뭐고 다 접어 두고 솔직하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

“…토할 것 같단 말이야!”

“……!”

과연 그건 미친 황태자도 싫었는지 죽을 때까지 흔들릴 것 같던 말이 멈췄다.

“괜찮나?”

아르파드의 조심스러워진 목소리, 그리고 손길과 함께 나는 겨우 땅에 내려설 수 있었다.

하지만 발이 닿자마자 그대로 허물어졌다.

“우우욱!”

땅도 흔들리는 것 같아!

한국인으로 살 때도 몇 번 경험해 본 적 없는 엄청난 숙취와 비슷했다.

내가 바닥에 엎어져 있는 동안 놀랍게도 미친 황태자께서는 내 등을 두드려 주며 말했다.

“눈은 멀쩡한가?”

“안 멀쩡해요. 그냥 있어도 흔들리는 것 같아.”

“멀쩡하다는 소리군.”

그는 내 어깨를 잡아서 천천히 들어 올렸다.

(여기서 그도 내가 어제 먹은 걸 확인하는 걸 두려워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희고 예쁜, 하지만 거친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자그마한 흰 성이 보였다.

“저기가 우리 목적지야.”

그 말에 작고 소박한 성이 황궁보다 호화롭고 안락한 곳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사흘 밤낮 동안 말을 달려 황도에서 꽤 떨어진 별궁에 도착했다.

* * *

나는 마구잡이로 구긴 다음 흙바닥에 굴린 휴지 뭉치 같은 꼴로 성에 들어왔다.

그나마 아르파드가 부축해 주지 않았다면 제대로 걷지도 못했을 거다.

드디어 도착한 목적지에서 나는 만세 삼창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으로 외쳤다.

“드디어 씻을 수 있어. 침대 어딨어?”

그러자 나를 부축하고 있던 아르파드가 헛소리를 했다.

“나의 신부는 지나치게 적극적이라 좀 부끄럽군.”

어이가 없어서 고개만 돌리자 아주 불공평한 광경이 보였다.

나랑 깔 맞춤 한 건지 하얀 예복을 차려입고 온 아르파드는 재수 없을 정도로 희고 깨끗했다.

‘누구는 구겨진 휴지가 됐는데! 치사해!’

여전히 반짝거리는 남자의 얄미운 얼굴을 보며 나는 흐늘흐늘 대꾸했다.

“더는… 도저히 농담도… 화내는 것도… 못 하겠으니까, 좀 봐줘요.”

이건 진짜였다.

아무런 단련도 한 적 없는 귀족 영애의 몸으로 한 사흘간의 승마는 그야말로 극한 체험이었다.

새삼 지난번 생에 벨테인 경이 도주할 때 날 얼마나 걱정해서 움직였는지도 알겠다.

아, 혹시 그래서 빨리 잡혔었나?

뼈아픈 전생의 실패 이유를 깨달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몇 배로 중요한 게 있었다.

“나… 좀… 쉴…….”

그대로 가물가물 눈이 감기려는 것을 아르파드가 막았다.

“……!”

그런데 방법이 날 경악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뺨이라도 때렸으면 이렇게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촉.

그는 내 뺨에 키스했다.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고.

잠이 확 깼다.

나는 말 그대로 펄쩍 뛰었다. 그야말로 얼음 위에 내던져진 고등어처럼 생생한 움직임이었다.

아르파드마저 놓칠 정도로 말이다.

“이, 이게… 이게 무슨 짓이야?!”

그러자 아르파드는 눈매를 활처럼 휘며 웃어 보였다.

“잠꾸러기 공주님을 깨우는 가벼운 키스?”

“……!”

내가 놀라서 선 채로 기절한 사이.

아르파드는 나를 질질 끌고 성 안으로 향했다.

그다지 큰 규모의 성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곳에는 작은 예배당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나이 든 사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로 오셨군요, 전하.”

사제는 낭패한 표정으로 나와 아르파드를 번갈아 가며 보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잠이 확 달아나는 걸 느꼈다.

“납치로만 끝나서는 안 돼요. 바로, 결혼 계약서에 서명 끝내고, 신전 공증까지 받는 것도 잊지 마셔야 하고요!”

나의 협박… 아니, 의뢰 내용을 아르파드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지킨 것이다.

아르파드는 먼저 사제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요구했다.

“나와 힐리아 델핀 공녀의 결혼식을 집전하고 증인이 되어 주게.”

이건 우리의 결혼식이었다.

나는 허물어지듯 아르파드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사제는 더더욱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나를 보며 물었다.

“델핀 공녀께서는 루드비히 대공 전하의 신부가 아니십니까. 그런데 정말로 이 결혼에 찬성하시는 겁니까?”

여기서 내가 ‘그렇다’라고 대답하긴 꺼려졌다.

놀랍게도 아르파드는 이것까지 읽었는지 대신 사제에게 대답했다.

“내가 신부를 약탈한 게 결혼식 날로부터 벌써 사흘째야. 이대로 무사히 돌려보낸다 해도, 공녀의 평판이 무사할까?”

“…전하!”

“그녀의 명예가 가장 덜 상처받는 길은 나와 성혼하는 것뿐이네.”

사제는 아르파드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대는 이미 나에게 맹세한 바 있지 않은가? 어머니께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뭐든 하겠다고.”

결국 그는 더 버티지 못했다.

사제는 아주 간략하긴 하지만 나와 아르파드의 결혼식을 집전해 주었다.

주신과 모신 앞에서 서약을 나누고.

서약서에 이름을 썼으며.(이때 손가락이 후들거려 힘을 많이 줘서 서명해야 했다.)

머리 위에 성유를 받으며 축복의 말까지 들었다.

“이로써 두 분은 주신과 모신께서 돌보시는 부부로 다시 태어나셨습니다.”

나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혼인과 그 인정에 대한 권리는 신전 고유의 것.

황제나 심지어 드래곤이라 해도 이것을 침범하지는 못했다.

내가 안도하는 동안 전혀 예상 못 한 말이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하면 이제 두 분은 맹세의 키스를 나누십시오.”

“……!”

나는 놀라서 흘긋 옆을 보았다.

그곳에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띤 남자가, 이제 내 남편이 된 그가 있었다.

아르파드는 아주 자연스럽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평소였다면 놀라서 뒤로 물러났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건… 결혼식 절차의 일부일 뿐이야!’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거사(?)를 기다렸다.

시야가 차단되어서일까. 다른 감각이 더 예민해진 느낌이다.

내 심장 소리가 미친 듯 뛰는 듯했다.

귓전에서 누가 북을 두드리고 있는 것 같았다.

‘차라리 그냥 눈 뜰까?’

하지만 그랬다간 더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나는 꽤 길게 느껴지는 기다림 끝에 맹세의 키스를 받았다.

의외로 남자의 입술은 보드랍고 말랑말랑했으며, 내 입술을 감싸는 움직임은 생각보다 훨씬 다정했다.

이미 여러 번 경험한 루드비히와의 맹세의 키스와는 전혀 달랐다.

그의 키스는 곧 잡아먹을 듯 집요하고 격렬해졌다. 내 숨결을 온통 다 빼앗아 가려는 것처럼.

“…읍!”

나만이 아니라, 사제까지 놀랄 정도로.

사제가 벌게진 고개를 참지 못하고 돌릴 때까지.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서야 아르파드는 나를 겨우 놓아주었다.

“…하아! 사제께서 계시는데 좀 자제하세요.”

나는 민망해하는 새신부인 척 그를 가볍게 타박했다.

하지만 내심은 달랐다.

‘사람을 호흡 곤란으로 죽일 셈이야?’

그 비난의 눈초리를 받으면서도 아르파드는 기이할 정도로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등줄기에 소름이 살짝 끼쳤다.

‘뭐지? 설마, 벌써…….’

하지만 내 생각은 더 깊어지지 못했다. 결혼식 절차가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 * *

아르파드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 예민했다.

어려서 광증의 전조가 여러 번 있었고, 미약한 폭주 또한 겪었으니 당연했다.

그런데 조금 전의 키스는 너무나도 이상했다.

시작은 그저 결혼식의 절차상 필요한 행위였을 뿐이다.

그러나 막상 입술이 서로 맞닿았을 때 아르파드는 순간적으로 이성을 완전히 잃었다.

그는 한 마리 목마른 짐승이 사막에서 샘을 찾은 것처럼 그녀를 탐했다.

그리고 키스가 깊어질수록, 시간이 길어질수록 기이한 감각을 느꼈다.

늘 날카롭고 불쾌하게 꿈틀거리던 몸속의 짐승이 난데없이 얌전해지는 느낌.

생전 처음 느껴보는 만족감과 기쁨이었다.

‘이런 건 광증의 전조 때에도 느껴 본 적 없어.’

아르파드는 더더욱 미심쩍은 표정으로 방금 제 아내가 된 여자를 바라보았다.

* * *

“폐하! 제발, 제발 이 원통함을 풀어 주십시오!”

루드비히는 벌써 사흘 가까이 황제의 침실 바로 근처에서 시위 중이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궁 안에 없었다.

정확히는 황도 안에 이 소문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황궁 바로 앞 대로에서 공개적으로 벌어진 납치 사건이니까.’

새삼 치욕적이고 분노가 치밀어서 루드비히는 다시 한번 입술을 짓씹었다.

지난 사흘간 엉망이 된 입술에서는 다시 피가 흘렀다.

그는 주변의 시선들이 볼 수 있도록 부러 피를 닦지 않았다.

“지금 제 아내가 겪고 있을 고통을 생각하면 먹을 수도, 잘 수도 없습니다! 제발, 폐하!”

밖에서 들리는 조카의 절규를 들으며 황제는 생각에 골몰한 상태였다.

그의 주의를 현실로 잡아챈 것은 밖에서 고성을 지르는 루드비히가 아니라 맞은편에 앉은 여인이었다.

황후 이자벨.

“폐하. 이번 일을 어찌 처결하실 생각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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