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뒤늦게 정신을 차린 루드비히의 기사들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그들 모두 안색이 흙빛이 된 채였다.
“이런, 이런 치욕을!”
“이를 대공 전하께서 아시면 어쩐단 말인가!”
“사촌 동생이신 루드비히 전하를 생각하면 어찌 이러실 수가!”
그 와중에 단 한 명의 기사만이 신부인 힐리아를 위해 화를 냈다.
“어찌 귀한 레이디께 이러한 모욕을 주실 수 있습니까!”
챙!
그는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든 뒤 힐리아의 앞을 막아섰다.
벨테인 경의 급발진에 가장 놀란 것은 주변의 기사들도, 위협당한 황태자도 아니었다.
바로 힐리아 본인이었다.
‘안 돼! 난 오늘 약탈혼 당해야 한다고, 벨테인!’
이대로면 힐리아의 인생을 건 도박이 충직한 기사 때문에 방해받게 생겼다.
* * *
힐리아는 황태자가 신부 행렬을 가로막은 걸 확인한 순간 쾌재를 올렸다.
‘아싸! 살았다!’
그리고 황태자의 패악질을 응원하다가 몸이 달아서 직접 뛰쳐나왔다.
‘이러면 더 납치하기 쉽겠지!’
“이대로라면 결혼식에 늦어질 것 같습니다. 부디 비켜 주세요.”
요청 속에는 이런 채근이 들어 있었다.
‘어서! 빨리! 바람보다도 빠르게! 나는 약탈당할 준비 이미 끝났다고!’
아르파드만이 이를 완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는 피식 웃었다.
‘아무리 봐도 신기한 여자란 말이지.’
가장 놀라운 건 이 감정이 그다지 불쾌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생각해 보면 이상했다.
“저를 약탈해 주세요!”
그런 말도 안 되는 협박을 한 여자를 결국 살려 돌려보내지 않았나.
사실 이 여자를 그때 살려 보냈던 순간, 자신은 이미 줄다리기에서 진 것일지도 몰랐다.
역시 이해가 안 되는 건 졌는데도 불쾌하지 않다는 이 감각이었지만.
‘어떤 이유로든 옆에 두고 관찰할 필요는 있어 보이긴 하니.’
사실은 이조차 말도 안 되는 협박을 받아들이기 위한 핑계처럼 느껴졌으나.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한번 해 볼까’ 싶은 마음이 든 순간, 그것으로 끝이었으니.
꽤 흥이 올라 있었기 때문에 아르파드는 상당히 자비로웠다.
이 말인즉슨, 감히 칼을 뽑아 들고 자신의 앞을 막아선 기사를 한칼에 죽이진 않았다는 뜻이다.
“커헉!”
캉!
팔을 깊게 베인 기사는 칼을 떨어뜨렸고.
힐리아가 비명을 질렀다.
“벨테인 경!!”
그녀는 이 기사를 걱정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뭐지?’
이상할 정도로 고조되어 있던 흥이 순식간에 식어 버렸다.
아르파드는 깨달았다. 자신이 저 여자의 표정 하나에 갑자기 불쾌해졌다는 것을.
힐리아는 기사의 앞을 막아서며 호소했다.
“부디 자비를 베푸세요. 전하!”
조금 전까지 가련하고 정숙한 신부인 척하던 건 분명 연기였다.
하지만 이 기사를 걱정하는 건 연기가 아니다.
‘그냥 진심이야.’
아르파드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속이 뒤틀렸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유를 알 수 없었다.
Chapter 2. 약탈극
아르파드는 갑자기 배배 꼬인 심사를 말투 그대로 드러냈다.
“그대를 레이디로 모시는 기사인 모양이지?”
“예. 그러니 기사의 죄는 당연히 주인인 저의 죄입니다. 제게 죄를 물어 주십시오.”
힐리아의 긍정에 이미 꽈배기보다 꼬여 있던 아르파드의 기분이 더더욱 복잡하게 꼬였다.
상처를 누른 벨테인이 주인의 앞을 막아서려 하며 결연하게 외쳤다.
“아닙니다! 칼을 든 것은 전적으로 제 뜻. 공녀님께서는 잘못이 없으십니다!”
황태자의 피비린내 나는 분노 앞에서도 벨테인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제 주인께 치욕을 주신 건 전하이십니다!”
아르파드의 입가에 더없이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조금이라도 이 황태자에 대해 들은 자들은 알고 있었으리라.
아르파드가 화를 내고 있을 때보다 이렇게 웃고 있을 때가… 몇 배로 위험하다는 것을.
* * *
‘으악! 그만! 멈춰!’
벨테인 경이 기사도의 표본 같은 사람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미친 황태자 앞에서도 쓸데없이 올곧을 줄은 몰랐다.
내가 벨테인 경의 급발진을 말리려던 찰나, 황태자가 선수를 쳤다.
“조금 전에 한 말 지킬 수 있겠나, 델핀 공녀?”
“예? 무슨 말 말씀이십니까?”
‘좀 전에 내가 말을 꽤 많이 해서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황태자의 고운 입매의 한쪽 끝이 날카롭게 휘었다.
어쩐지 조금 불안감이 들었다.
‘설마, 화나게 했다고 약탈혼 무르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망하는데.
하지만 아르파드의 말은 의외의 내용이었다.
“기사의 죄를 주인인 그대가 직접 갚겠다는 것 말이야.”
아, 그쪽? 그런데 그게 왜?
그는 내 약점을 잡기라도 한 것처럼 웃고 있었다. 피비린내가 훅 끼쳐 왔다.
착각이 아닐 것이다. 이미 벨테인 경도, 또 이름 모를 종자도 피를 봤으니까.
하지만 나는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맹수 앞에서 등을 보이면 도리어 공격당한다. 그런 느낌이었다.
“예. 기사를 책임지는 건 주인의 의무니까요.”
물론 이건 벨테인 경이니까 하는 말이다.
그는 지난 생에서 단 한 번도 나를 배반하지 않은 정말 드문 사람이니까.
그리고 바로 이전의 생에서 그는 나 때문에…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죽음을 맞았다.
‘이번엔 절대로 그렇게 되게 만들지 않아.’
내 대답에 아르파드의 입가에 기이할 정도로 깨끗하고 싱그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까지의 위험하고 피비린내가 가득하던 미소와는 달랐다.
눈부신 햇빛을 등지고 있어서일까. 그는 기이하리만치 순수한 소년 같아 보였다.
그래서일까. 아르파드에게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미소에 잠시 넋을 놓고 있어 버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순간.
남자의 얼굴이 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의 한쪽 팔이 내 허리를 단번에 감아 그대로 들어 올렸다.
“아!”
시야가 어찌나 어지럽게 흔들리는지 하늘과 땅이 섞여 회색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니 나는 이미 아르파드의 품에 안겨 말에 올라 있었다.
‘어? 이건?’
경악한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아르파드의 속삭임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분명히 그대 입으로 말했어. 뭐든 하겠다고. 이건 그대의 협박과는 별개의 문제야.”
오싹,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내 의뢰를 잊은 거예요?”
“이것과 그건 별개라니까.”
“당신이 벌인 일 생각하면 벨테인 경이 상식적인 대응을 한 거라고요!”
“그렇다 해도 황태자 앞에서 칼을 뽑은 건 분명히 반역죄야.”
아르파드를 말싸움으로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그는 ‘말이 안 통하니 이길 자신이 없다’는 말을 인간의 형태로 빚어 놓은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벨테인 경에게 나서지 말라고 말해 둘 걸 그랬나.’
하지만 벨테인 경의 꼬장꼬장함을 생각하면, 내 말 한마디에 약탈혼을 묵인할 리 없었다.
그렇다고 회귀에 대해 말해 줄 수는 절대 없었고.
‘역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벨테인 경도 지켜야 하고.’
내 복잡한 표정을 보더니 아르파드가 불쑥 물었다.
“그자가 정말 걱정되는 모양이군?”
“…제 기사니까요.”
‘구하고 싶어.’
그는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말을 덧붙였다.
“꽤나 믿고 아끼는 것 같아.”
“맞아요.”
“하긴, 조금 전 꼴을 보아하니 그대에게 기사라고 할 만한 이는 저자 하나뿐인 듯하니.”
“윽.”
아르파드는 내 아픈 부분을 대놓고 쿡 찔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3년 동안 가문을 맡고 있었으면서 내 기사라고 부를 사람이 딱 하나뿐이다.
‘이건 분명히 내 무능이지.’
지나치게 순진하고, 세상을 몰랐다.
그저 루드비히만을 믿고 전부 맡겼었지.
‘이젠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잠깐 딴 방향으로 흐른 생각을 다잡은 후 나는 깨달았다.
‘뭐야, 이 사람 표정이 왜 이래?’
내 약점 중 하나를 순순히 알려 줬는데도 지금 아르파드의 표정은 미묘했다.
‘어쩐지… 조금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것 같기도 한데?’
하지만 그럴 이유가 있나?
내가 당혹스러워하는 사이 아르파드의 묘한 표정은 곧 사라졌다.
재수 없을 정도로 잘생긴 얼굴에 남은 것은 성격 나쁜 미소뿐이다.
“기억해 둬. 이걸로 그대는 나에게 빚을 하나 진 거야. 저 기사의 목숨만큼.”